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4/100회

 

2. 사회적 • 경제적 요인

 

혁명은 사회 발전의 조산원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로써 역사 발전의 필연적 현상으로 보고 그 원동력이 ‘경제적’인 것에 있다고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 생활이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특정의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에 의존하지 않은 여러가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화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것이 실질적 기초가 되어 이 기초 위해 법률적 • 정치적인 상부 구조가 서며 그 기초에 상당하는 특정의 사회적 의식 제 형태가 있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법은 사회적 • 경제적 및 정신적인 생활 과정 전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 이다. 그들의 발달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지금까지 그들이 그 내부에서 움직인 바 그 현재의 생산제 관계 또는 그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소유 관계와 모순 당착하게 된다. 이들 관계는 생산의 발전 형태였던 것이 이제 그 질곡으로 변한다. 여기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분석하여 보면 첫째, 사회 • 경제구조는 생산 관계에 기초하며 둘째, 법률 정치는 사회 • 경제구조의 상부 구조며 셋째,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 사회 • 경제구조, 법률 정치 제도를 규정하며 넷째,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이 혁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혁명론의 모순은 경제적인 요인을 중시하고 경제외적 요인을 경시함으로써 기계론적인 오류를 범하였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메리엄은 혁명의 경제적 원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과세에 대한 불만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불법한 과세, 불평등한 과세 등은 근대 시민혁명의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차알스 1세는 즉위 후 의회가 자기가 요구하는 세금의 승인을 반대하고 불과 7분의 1밖에 안 되는 두 가지의 세금만을 승인하자 ‘덕세’(Benevolence)라는 헌금을 강요하고 강제로 국채를 매입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629년에는 ‘둔세’(Tonage)와 ‘파운드세’(Poundage)로서 적자를 보충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두었으나, 연간 2만 파운드에 달하는 적자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630년부터 년 수 40파운드 이상의 토지를 가지는 지주로서 기사의 지위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벌금으로써 기사 강제 금 제도를 만들었으며, 또 1624년의 독점 조례의 미비를 이용하여 많은 회사를 설립시켜 특허상(Charter)을 팔거나 또 그 수입의 일부를 상납시키고 또 국왕 소유의 산림을 조사시켜 거기에 살고 있는 자에게 거액의 벌금을 과하고‘엔콜로저(Enclosure) 단속법’을 강화하여 벌금의 징수를 기도하였으며, 1634년에는 선박세 (Ship money)를 정수하였다. 이것은 그 합법성 여부로 많은 논란이 야기 되었으며 국왕 측의 법률가들까지도 그 일부의 불법성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1637년의 존 함프덴의 납세 거부 사건은 7대 5로 국왕이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후 국왕의 과세 정책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 하였다. 힐(C. Hill)은 이것을 ‘부르주아지는 파업인이 되었다.’라고 표현하였고, 마르크스는 ‘차알스 1세를 단두대로 보낸 영국혁명은 조세 지불 거부서 시작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1639년 단기 의회가 소집되자 국왕은 다른 토의에 앞서 국왕의 임시 과세를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핌은 그것을 반대하였다. 의회에서 과세에 대한 승인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국왕은 먼저 승려회의에서 연간 2만 파운드의 헌금을 가결시키고 이어 런던 시에 10만 파운드의 차회를 신청하고 선박세를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런던시의 불만은 극도에 이르렀고 국왕은 동인도 회사의 창고 속에 있는 호초를 차압하는 폭거를 자행하여 국민의 신임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1640년4월13일 개회된 의회는 국왕의 임시 과세를 승인하기는커녕 의회의 정치적 지상권을 주장하고 11년간의 무 의회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국왕과 대립하여 5월 5일에 해산되었다〈불과 3주일 만에 해산되었다 하여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라고 부른다>.

 

북미 식민지에 대한 본국 정부의 과세는 식민지인의 불만을 자아내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18세기 전반에도 본국은 양모품령(1699년) • 모자령(1732년) • 철조령(1750년) 등으로 식민지에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나 1764년의 사탕령(Sugar Act)은 특히 식민지인을 격분시켰다.

 

동년 또 본국은 통화조령(Currency Act)으로 전 식민지에서 지폐의 발행을 금지시켜 서인도 무역을 구속하여 식민지에 유입해 은 화폐의 공급이 중단되어 도처에서 통화의 수축을 가져왔으며, 무역상을 비롯하여 소상인 • 농민 등에게도 큰 고민을 주었다.

 

1765년의 인지령(Stamp Act)은 식민지인의 모든 계층이 본국의 부당한 과세를 절감케 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1765년9월 뉴욕에서 인지령 회의(Stemp Act Congress)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13개 식민지 중 9개 식민지의 대표자가 참석하여 식민지인 상호간의 행동 통일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식민지인의 권리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and Grievances of the Colonies)을 결의하고, ‘대표 없는 과세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주장하였다. 식민지의 혁명 단체인 ‘자유의 아들’(Son of Liberty) 등은 시위운동을 일으키고 인지 상인의 집에 몰려가 대중 앞에서 그 직을 그만두도록 성명시키는 한편 인지 창고를 불태우고 재판소를 폐쇄하였으며, 본국 정책에 따르는 자에게는 얼굴에 코울타르를 발랐다. 인지령이 발효한 1765년 11월 1일은 메이플라워 (Mayflower)호가 식민지에 도착한 지 145년이 되는 날 이었는데 이들은 ‘식민지의 자유에 대한 장례식’을 행하고 관 속에서 다시 자유가 살아나는 행사를 가졌으며, 식민지 여성들은 인지세법에 반대하지 않는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이러한 반대 운동으로 인지 상인들은 거의 모두가 사임 하였으며, 본국 내에서도 동 조령의 철폐를 주장하는 정치가 • 법률가가 속출하여 드디어 1766년 인지령은 철폐되었다. 인지령의 철폐 이후에도 1767년에는 ‘세법’(Revenue Act)을 신설하여 지류 • 차 • 유리 • 페인트 등에 과세하여 식민지 관사의 봉급을 지불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반하는 자를 엄벌에 처하려고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자 새무엘 아담즈는 ‘매사추세츠 회장’(Massachusetts Circular Letter)을 발표하는 등 자치를 고창 하고 불매 동맹을 결의하여 결국 1768년 매사추세츠 의회는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1773년 영국의회는 새로이 차 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당시 재정난에 빠져 있던 동인도 회사의 구제를 목적으로 동회사에 북미에의 차의 수출에 관한 특권을 주는 것으로 북미 상인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드디어 1773년 12월 ‘보스턴 차회사건’의 동기가 된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라는 결의는 정치적 의미, 즉 식민지인도 본국 선민과 동일한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한 것이다.

 

또한 프랑스대혁명 전의 국가 재정은 국왕 및 특권 계급의 낭비와 대미 원조로 인하여 극도로 궁핍하였다. 대혁명 전의 프랑스 구제도 하에서는 과세에 대한 불만은 주로 과세의 과중과 과세 방법의 불공평에서 부패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칼론느(Calonne)의 발언은 큰 자료가 된다. 그는 1786년8월20일 루이 16세에게 “국가 구제에 필요한 것은 국부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건물의 붕괴를 막으려면 전체를 토대에서부터 재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상 과세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차금만으로는 위험합니다. 개혁을 경제 개혁 만에 그치는 것은 불충분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 기구 속에 있는 모든 부정한 것을 개혁해서 국가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고, 1787년2월22일 명사 회의에서 “이 넓은 왕국에 있어서 서로 다른 법률, 서로 모순되는 관습, 특권 • 면세 등 모든 종류의 권리 및 특권의 주장 등에 부딪치지 않고는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 이 전체의 부조화가 행정을 복잡하게 하고 그 운영과 활동을 방해하고 도처에서 지출과 혼란을 과다하게 한다,"고 말하였을 정도였다.

 

부르주아지는 중세의 고통은 없고 무역과 대 상업 투기사업 및 징세청 부인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으며, 재력으로는 귀족을 압도하는 채권자의 입장에서 있었다. 금융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귀족을 구성하고 때로는 귀족과 결혼 하였으며, 상업부르주아지는 특히 흑인 노예의 매매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한편 산업부르주아지와 자유직업부르주아지 역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르주아지는 자기들이 활동적인 계급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생산적인 일을 불명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회 계층의 존재에 관격(慣激)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업조합이나 경제상의 통제, 국내 관세나 통행세, 다양한 도량형 제도 등 구제도가 자아낸 구속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키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제 3계급이기 때문에 납세의 의무가 있었으나 그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토지보다 관직을 샀다.

 

이들은 경제적 노력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정치적 권력을 획득코자 하였다. 혁명은 인민 대중의 궁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서 시작된다는 브린튼의 말은 바로 프랑스혁명 전의 부르주아지의 상태에 일치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1788년 3월에 재정 보고가 국왕에 제출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지출은 6억2천9백만 루우블에 수입은 5억3백만 루우블로 적자는 20%에 달했다. 구제도 최후의 수 년 동안은 1726~41년의 기간에 비해 물가가 65% 성승하면서도 임금은 22%밖에 오르지 않았다.

 

국왕은 차재와 관직매각 등의 비상책을 썼으나 그것으로도 국가 재정은 적자 일로를 걸었다. 1789년에는 차금이 45억 루우블에 이르렀고 그 이자만도 국가 세입의 반 이상인 3억 루우블에 이르렀다. 국세 중 간접세의 6년간 징수권을 징세청 부인에게 2억 5천5백만 루우블로 전차하였으나 그것으로도 재정은 호전될 수 없었다. 더구나 미 식민지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해서 약 20억 루우블의 적자를 냈다.

 

전기한 재정난올 해결하기 위해서 루이 16세는 수차 재정 개혁을 기도 하였으나 특권 계급의 반대로 실패에 돌아가 하는 수 없이 1789년5월 삼부회(Etats généraux)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부회는 재정 문제의 토의에 앞서 회의 방법으로 특권계급과 제3계급이 대립하고 국왕은 제 3계급의 주장을 묵살함으로써 혁명이 일어나고 말았다.

 

루이 필립은 7월 혁명에 의해서 국왕으로 즉위한 직후 과거의 ‘프랑스 왕’(Roi de France) 대신 ‘프랑스 인민의 왕’(Roi des francais)이라 칭하여 시민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상층 부르주아지 중심의 정치를 하여 중소 상공업자 • 소시민 • 농민 및 노동자는 정치에서 제외하였다. 더우기 선거에 있어서 매수가 성행하여 부패 정치가가 속출 하였으며, 의원관리제(systeme des députés Fonctionnaires)로써 정부는 의원을 농락할 수 있었다. 특히 기조(Guizot)는 7월 왕정 하에서 금융 귀족 중심의 정치를 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은 더욱 증대되었다. 농민은 다액의 세금이 부과되어 드디어 토지를 은행 • 자본가 • 고리대금업자에게 저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중한 세금의 부과가 원인인 것은 아니었지 만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그들의 노임은 형편없는 반면,식량의 가격은곡물 상인의 부당한 매점으로 극성하였다.

"노동시간은 평균 12~13시간이며 탄광에서는 15~16시간이었다. 부인이나 소아는 특히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노동자나 수공업자의 대다수가 축축한 지하실이나 숨 막히는 골방에서 살고 있었다." 일 관사는 “이런 정도의 빈곤은 생각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여 에텐(Etain) 감옥의 죄인이 모든 점에서 20배나 좋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1831년의 리용(Lyon)의 노동자 폭동 이후 1834년 4월 10일에는 형법을 개정하여 20개 이상의 결사를 해산하고 집회를 금지 시켰는데,1834년 4월 13일과 14일 리용에서 다시 폭동이 일어나자 극악의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거리에서는 병사의 난폭으로 노인 • 부인 • 소아 등이 무차별 학살 되었으며,체포 • 처형 된 자는 약 2천 명이 넘었고 그들을 재판하기에도 약 1년이 걸렸다. ‘트랑스노낭의 학살’(Massacre de Transneaunent)에 이어 1835년 9월에는 9월 법 루이스 테 챔템버를 제정하여 재판을 가혹하게 하고, 출판물을 엄중히 취재 하였는데 국왕의 만화까지 게재를 금지시켰다. 1835년 말까지에 모든 저항적 제 단체(sociétés de résistance)는 해체되고 1839년 5월에는 블랑키 (Blanqui)가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졌다.

 

결국 1845년부터 46년까지의 경제 공황으로 간접세를 증액하여 중산 계급을 파산케 함으로써 드디어 2월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과세의 불평등과 농민의 빈곤이 혁명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하류 계급보다도 부르주아지가 과세 정책에 대해서 더강렬하게 반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슐레징거(Schlesing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에 있어서 본국의 부당한 세법으로 경제적 손실을 본 것도 식민지의 상인이었으며,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지가 경제 활동의 제한을 철폐코자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예시 하였다.

 

이에 대해 헌터는 혁명은 ‘흉년이나 금융의 혼란과 같은 사회 • 경제적 혼란을 틈타서 이를 이용함으로써 야욕을 채우려는 포악한 사람들이 조성 해내는 것이다.’라고 사회 • 경제적 요인을 강조하면서 혁명의 조건으로 첫째, 기존 정권의 약화 둘째, 경제적 불안정, 특히 통화의 불안정 셋째, 무솔리니가 말한 소위 인민의 호의적 중립 넷째, 군대 및 중산 계급의 적극적 투쟁과 지지를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나 농민은 부르주아지 또는 중류 계급의 혁명에 동참함에 있어서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호퍼(Eric holler)는 ‘혁명은 급진적 변동을 이루기 위해 수행 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혁명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급진적 변동인 것이다.’라고 하여 혁명적 분위기는 급진적 변동의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 즉 욕망 • 좌절 등에 의해 조성된다고 하였고, 왈레스는 ‘사회 • 문화적 체계(sociocultural system) 의 심각한 해체는 이 체제를 균형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다양한 힘의 하나 혹은 복합적 영향에 의해 야기되며, 그러한 힘은 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 시키는 기후나 동물 생활의 변화, 인구 구조를 전반적으로 변화시켜 버리는 질병의 만연, 사회의 인력 자원을 고갈시키거나 패북 혹은 침략을 초래하는 전쟁, 적어도 일개 집단 이상에게 손해를 끼치는 이해 집단 간의 내적 갈등, 인근 사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사회의 지위 등이 라고 하여 혁명 원인을 사회적 불균형에 구하였다.

 

반면에 존슨은 ‘혁명이란 폭력의 한 형태인데 사회는 폭력을 초월하여 평탄대로 위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혁명이란 반사회적 특정 사회 형태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불만이 존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조다. 혁명은 무조건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또 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에는 전혀 일어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혁명이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는 사회에서나 혹은 더 큰 변동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만 먹혀들어가는 아이디어인 것이다. 사회의 가치와 그 것이 관련되는 현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 그 사회는 혁명으로부터 안전하다.’고 견해를 밝혔으나, 다른 요인으로써 사회적 불균형 사이에 존재 할지도 모르는 경제적 연관성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트촐크는 혁명의 원인으로 좋지 못한 정부, 군사적 혹은 외교적 실패, 독직, 직무나 명예로부터의 탈락 등 경제적 측면도 강조하였으나 토지의 욕구, 징세 • 용역에 대한 높은 보수의 지불, 불량한 도로, 상업적 제약, 기근 • 물가고 • 저 소득 • 실업 등 경제적 원인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리고 아렌트(Arendt) 역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까지 폭력적이며 많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변이나 격동은 이해에 따라 야기되고 빈부의 차에 기인한다고는 하나 그 차는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사와 같이 정치 체제에 있어서는 자연적이며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었다. 사회 문제가 혁명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며 그 이전은 아니다. 근대에 와서 비로소 사람들은 빈곤이 인간의 운명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힘으로든 기만으로든 빈곤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소수자와 빈곤에 시달린 노동 대중의 차가 불가피하고 영원할 것 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신세계의 식민지의 풍부한 조건의 영향을 받아서 처음에는 로크가, 다음에는 아담 스미스가 노동과 노고, 즉 빈곤으로 인해서 재산 없는 자에게 강요된 활동은 빈곤의 속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부의 원천이라고 말하였을 때 혁명의 무대는 마련된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