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5/100회

 

 

3. 사상적 • 심리적 요인

 

영국의 청교도혁명의 사상적 배경을 이룬 것은 16세기의 ‘폭군방벌론’과 청교도사상, 그리고 보통법(Common Law)의 관념이었다. 폭군 방벌론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는 영국에서는 존 보네트(J. Banet) • 에드먼드 스펜서(E. Spencer)며, 스코틀랜드에서는 부캐난 이었다.

 

이러한 폭군방벌 사상이 당시 기존 체제와의 투쟁 속에서 얼마나 큰 역 할을 하였는가는 1561년에 최초로 출판된 보네트의 「정치권력소론」이 1639년과 1642년에 중판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청교도는 처음에는국교도의 교의와 예식을 보다 순수화(purer)하기를 바라는 단순한 종교적인 집단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요구는 왕권을 직접 위협하고 제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이론 • 윤리 • 철학적 교리를 이론적으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어떤 종교상의 교의에 대해서 타 교의를, 어떤 교회의 양식에 대해서 타 양식을, 낡은 교회의 조직 원리에 대해서 새로운 교회의 조직 원리를 대치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개혁의 요구를 통해서 실제로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확립을 요구한 것이다. 교회 문제에 있어서의 청교도의 급진주의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의 급진주의를 낳게 하였다.

 

17세기의 30~40대에 헨리 바아커(Henry Barker)는 헌법상의문제에 대해서 청교도적 성격을 띤 일련의 정치평론을 발표 하였다. 권력의 기원이 사회 계약에 있다는 것과 영국민의 기본적 권리가 거기에서 나왔다고 말한 그의 학설이 혁명 시대의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보통법의 관념은 코크(E. Coke)가 17세기 초에 11권으로 된 보고서와 1628년에 출판된 「영국법 요강」(Institutes of the Laws of England) 속에서 집대성되었는데, 그것은 성문화한 조문으로 된 법률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전통과 관습과 판례가 누적한 것으로 봉건제도 속에서 성장한 법사상이었다. 그것은 봉건 영주가 주권을 제한하는 데 사용된 주장으로 이것이 절대주의 비판의 큰 무기가 되었다.

 

볼테르(Voltaire)는 1733년「영국 국민론」(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ers sur les Anglais)을 약술하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교회 및 정치조직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이 서적의 목적은 영국의 학문 • 문예 • 종교 • 정치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프랑스 국민에게 전하고 또한 자유스러운 영국의 정치를 전제적 프랑스의 사정과 비교하여 프랑스 국민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에 있어서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영국 국민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고가한 특성을 지불하였으며 전제 권력의 우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피의 바다를 흘렸다.…… 영국에 있어서는 계급에 따라 재판을 달리하는 일이 없고 수난을 위해서 타인의 소유지를 황폐시키는귀족이 없으며, 성직자 • 귀족이라도 면세되지 않는다.농민이 목화를 심어 발을 다치는 일이 없게 했으며, 다음 해의 과세를 두려워하여 수확을 감추는 일이 없다.’고 썼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에서 오랫동안 잠재한 영국 찬미론자 인데, 1721년「페르시아인의 편지」(Lettres persianes)를 써서 당시의 정치 • 종교상의 보수성을 조소하였으며, 1748년에는 「법의 정신」(Del’esprit des Lois)을 약술하였다. 그는 전제정치를 반대하였으나 귀족정치를 찬미함으로써 공화주의자는 아니었고 절대적 주권은 그것이 1인의 손에 속해 있는 다수자의 손에 속해 있든 전제정치가 되고 만다고 기술하여 그 나라의 국토와 인민의 성질에 따라 각각 특수한 형태와 역사적 사실에 따라 영국과 같이 행정 • 입법 • 사법의 3권이 분립되어 있는 권력 분립제가 제정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여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정치 형태는 군주정치인데, 그것은 국왕과 인민의 중간 단체(귀족)에 의해 전제적 행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자유주의적인 귀족이나 온건파의 사상적 표현으로써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프랑스 절대주의에는 큰 타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1751년에는 백과사전 제1권이 발간되어 디드로(Didrot) • 달랑베르(D’Allembert) 등의 백과사전파(Ency-clopé-disté)가 사상계에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들은 종교 • 국가를 모두 자아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해석하고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였으며, 전설 • 역사 • 신비는 무시되고 종교상으로는 자연신교의 사상, 국가에 관해서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어떤 점에서는 유리한 사상 이었으나 중세적 권위에서 탈각하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과도적인 것이었다.

 

특히 1752년 당시 루소는 문명을 비판하는 자연과 감정의 탐미자 였다. 그는「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és fondement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에서 불평등의 기원은 사회생활에서 만들어진 재산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반하는 것으로 자연 상태에 있어서 인간은 평등 • 고립 • 선량 하였으나, 사회의 성립에 의해서 부패하였다고 하였다. 또 1758년에 발표한 「연극론」(Letree á d’Alembert sur les Spectaces)에서 연극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사람들은 비극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나 참다운 슬픔에 대해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희극은 정직하고 소박한 자를 향해서 웃음을 터 뜨려고 인정을 경박케 하며 극장은 풍속을 해 한다”고 하였다. 1762년에 나온 「민약론」(Contrat Social)은 루소의 대표작으로 그 당시의 프랑스 민심을 자극하여 혁명가의 성서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로크나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주권의 불가분을 역설하여 집행권의 독립성을 반대하였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국가는 그 면적이 협소한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한 것도 그의 자연찬미 사상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의 사상은 정치 학설로써 매우 난해한 점도 있으나 행복한 자연 상태와 자유 • 평등이 유린된 현재의 노예 상태를 대담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제 정치와 특권 계급에 반감을 가진 일반 민중에게 큰 영 향을 끼쳤다.

 

드롤륨(Delolme)은 1771년 「영국 헌법론」(Constitution de l’ Angleterre)을 썼다.

 

그는 “영국 의회는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모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의회 정치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미국 혁명에서도 많은 사상적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혁명에 있어서 급진파를 대표하였던 세무엘 아담스는 1740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때, ‘군주에 대한 반항의 정당성에 대하여 ’라는 졸업 논문을 썼으며, 1765년에 출판된 모르티스(Morti)의 ‘영국식민지의 권리’(The Rights of the British Colonies)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라는 자연권을 준 전능 한 신의 부여와 자연의 법보다 우선하는 어떠한 법도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의회가 자연법을 위반하는 입법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시인인 필립 플레노(P. Plena)는 가장 민주적 경향을 가진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저작 속에서 자국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유 • 권리 • 독립 • 민주주의를 옹호하였다.

 

패트릭 헨리는 버어지니아 출신의 소장 법률가로 1775년3월23일 ‘자유의 연설’에서 “여러분! 자연의 선이 우리들의 손에 쥐어준 수단만 이라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약자가 아니다. ……퇴각하면 굴복과 노예의 지위가 있을 뿐이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올 것을 오게 하라. 또 한 번 말한다. 여러분 올 것은 오게 하라. ……쇠사슬과 노예적 지위의 대가로 채울 만큼 인생은 귀중하며 평화는 감미로운 것인가. 전능의 신이여 결코 그렇지 않기를!

 

여러분은 어떠한 길을 택할지 모르나 나의 길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연설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헌법상의 권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패인(Thomas Paine)은 1774년 영국에서 건너온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1776년 1월「Common Sense」를 썼는데, 거기에서 식민지인에게 무기를 들도록 호소하고 영국의 지배 계급에 대해 신의와 이성에 의해서 저주된 왕정에 항의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호소하였다. 그는 ‘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은혜를 주나 정부는 그 최선의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악이다. 더욱이 그 최악의 경우에는 참을 수 없다.’고 하고 ‘미국은 과거 영국과의 연결 속에서 번영하였기 때문에 장래의 행복을 위해서 동일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들었으나 이러한 의논같이 사람을 기만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유아가 우유로써 훌륭하게 성장하였다는 이유로 그 후로는 고기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공공연하고 확고한 독립의 선언만이 신속히 우리의 사태를 해결하는 길이다.’라 하였다.

 

이상으로 미국 혁명에 영향을 끼친 몇 사람의 사상가에 대해서 언급 하였으나 누구보다도 결정적으로 사상적 주류를 이룬 것은 바로 로크였다. 미국혁명의 정선을 집약한 문서는 독립선언인데 그것은 내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독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며, 둘째 부분은 조오지 3세의 치적을 열거하고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 첫째 부분은 자연권 • 사회계약 • 기본권 • 인민주권 • 혁명권 등 민주정치의 기본적 조건을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1690년에 발간된로크의 「정부론」(Two Treaties of Civil Government)의 내용을 거의 그대 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으며, 두 번째 부분은 비통한 문구로 메워져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배경은 멀리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 사상 또는 허무주의(Nihilism)사상으로 소급할 수 있다. 러시아 허무주의는 러시아의 특수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며, 주로 유럽에 유학 하였거나 여행한 지식 계급 및 청년 귀족에서 주창된 사상으로 러시아 전제주의의 비근대적 성격을 개탄하고 사회의 개조를 강조하였다.

 

알렉산더 헬첸(Alexander Heltzen)은 1857년 망명지 런던에서 「종」(Colocol)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러시아의 구제도를 비난하고 주로 언론의 자유, 농민의 자유, 납세자의 자유 등을 주장하였다.

 

체르니셰프스키(Chernyshevsky)는 유명한 경제학자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Tchto Dyelaty )라는 소설로써 많은 지식 계급에 지유 사상을 전파시켜 7년간이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또 바쿠닌(Michael Bakunin)은 무정부주의자로서 프랑스 체재 중 마르크스 • 앵겔스 및 프루동(Proudhon)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프루동의 사상적 영향이 컸다. 그는 완전한 민주정치, 언론 • 결사의 자유, 독립된 지방 제도의 유지,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스테프냐크(S. Stepnyak)와 더불어 “우리의 동지가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정부와 싸우고 전체주의를 타도할 때까지 어떠한 수단이 라도 불사할 것 ”을 다짐했다. 그는 고관의 암살을 주장하였는데, 그 방법 이외에는 러시아의 쯔아리즘을 타도할 길이 없다고 생각 하였다.

 

전기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 허무주의 • 부정부주의 사상 등을 노동운동과 직결시켜 러시아사회주의를 창시한 사람이 플레하노프(Plechaηov)였다.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의 십계를 시나이 산에서 끌어내려 러시아 청년에게 전했다.’

그는 처음 인민파(Narodoniki)로서 출발하여 ‘토지와 자유’(Zemilia, Volia) • ‘인민의 의지’(Narodnaya Volya) 등을 조직하였으나, 1883년 노동 해방단의 조직을 계기로 마르크스주의에 전향하여 마르크스주의 선전에 공헌하였다.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제 2차 대회에서는 레닌과 동조하였으나 1905년부터 전술 문제로 레닌과 대립하였다.

 

그는 ‘레닌은 의의를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가 1840년대에 비난한 바우에르 형제의 관념론적 이단을 부활하고 있으며, 직업적 혁명 군대를 제창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제자가 아니라 바쿠닌의 제자가 되었다.’고 공격 하였고 레닌의 패전주의를 비난하였다.

 

뿐만 아니라 레닌과 결별 후 볼셰비키(Bolscheviki)와 멘셰비키 (Menscheviki) 사이를 동요하였으나, 그의 이론적 활동과 선전의 공세는 레닌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레닌의 등장은 러시아에 있어서의 혁명 이론과 혁명 전략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일찍이 1895년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냐, 그리고 어떻게 사회민주당은 투쟁하고 있는가’ (Was sind die Volk-sfreundeund Wie gegendie Sozialdemokraten kamphen)라는 논문을 써서 미카일로프스키(Mikhailovsky)교수를 반박 하였으며, 1895년부터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단’과 접촉하고 동년 9월에 ‘노동자계급 해방동맹’올 조직하였으며 1896년에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1899년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술하여 경제주의자와 투쟁하는 한편 1900년 12월의 기관지「이즈크라」(Iscra)를 창간하였다.

 

그 당시 러시아 혁명의 이론을 보면 나로도니키(Narodoniki)는 러시아 농민이 러시아혁명의 주역이 될 것이라 하고 서유럽주의자는 서유럽에서 배워 이미 서유럽의 진보를 같은 단계에서 밟아 같은 방법으로 전진하는 것이러시아의 운명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경제주의자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경제는 노동자의 일이고 정치는 당의 지식인의 일이다. 노동자는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경제적 목표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함으로써 계급투쟁이 아니라 노동조합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사회주의자의 관념은 노동조합의 서기여서는 안 되며 인민의 보호자이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 정책이다.’라고 하고 ‘첫째, 혁명적인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 계급 정치적 의식은 자연 발생적인 성장이 아니라 외부에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노동자의 조직은 무엇보다도 먼저 직업에 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가능한 한 광범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가능한 한 비밀이 적어야 한다. …그와 반대로 혁명가들의 조직은 먼저 또 주로 혁명적 활동을 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이어야한다. ……이 조직은 필연적으로 너무 광범위해서는 안 되며 가능한 비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독재성을 드러냈다.

 

카아(E.H. Carr)가 말한바 ‘레닌은 그 자신의 생애를 통해 예외적일 정도로 단일의 사상, 단일의 목적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그는 단순한 혁명의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적인 혁명가였다.’ 1902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Que faire?)를 저술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제 2차 대회에서 의견의 대립이 생겨 레닌 중심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Martov)의 멘셰비키로 분열하였다. 그는 플레하노프와의 결별 이후 “나는 혼자다. 참다운 볼셰비키는 나 혼자다"라고 말하고 트로츠키 • 스탈린과 더불어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전개하고 또 운동을 지휘하였다.

 

레닌의 혁명론을 대표적으로 기술한 것은 1917년 8월에 발행된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인데, 거기에서 그는 ‘모든 혁명, 특히 20세기에 있어서의 세 개의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입증된 혁명의 근본 법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혁명을 위해서는 착취되고 억압되었던 대중이 옛날과 같은 상태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변혁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혁명을 위해서는 착취자가 옛날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또 통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필요하다. 하층계급이 구제도를 불원하고 상층 계급이 옛날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게 되었을 때만이 혁명은 승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진리는 바꾸어 말하면 혁명은 전 국민적 위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을 위해서는 첫째, 노동자의 대다수(또는 적어도 의식적이고 사려있고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혁명의 필요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을 것. 둘째, 지배계급이나 정부는 위기상태에 빠지고 이 정부의 위기는 가장 뒤늦은 대중까지도 정치 속으로 끌어들여 정부를 무력화하고 혁명가는 정부의 급속한 전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마르크스 • 앵겔스의 국가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러시아의 현실에 맞도록 전개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역설하였으나,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으로 러시아에 있어서의 혁명사상을 복합적으로 초래할 정치적 • 경제적 원인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치할 새로운 체제를 구상케 한다. 소위 지식인의 이반이 일어나는데, 그들의 사상은 민중에게 전파되어 인민을 계몽 하고 동요시킨다. 이런 현상은 필연적으로 일반적 불온 상태를 야기 시키는데,일부의 지배계층까지도 이에 동감하며 민중은 새로운 낙원의 실현을 갈망하여 혁명적 집단에 가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