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는 말한다._재스민 혁명이 몰고 온 중국해체(박사청구논문)_(Mr. Jung-Sun Kim)_38<세계재활기구_World Rehabilitation Organization>의 자료를 옮겨 제공합니다.<자료제공. http://www.wro5.com>

 

중국역사는 말한다._재스민 혁명이 몰고 온 중국해체_38

 

 

3. 1958年 台湾海峽 위기사태

 

 

1958年8月23日 中国이 金门島에 돌연 맹공을 퍼부으면서 台湾海峽에 위기가 몰아닥치며 前苏联(qián sū lián)과 中国, 两岸, 그리고 中国과 美国(měi guó)과의 关系가 악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당시의 배경 및 전개과정을 시간 순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中国은 1949年 건립 이래 철저히 社会主义를 추구해왔다.

 

그리고 社会主义의 精神的 지도자인 前苏联(qián sū lián)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一邊倒 政策을 취했다.

 

中国에게 있어 前苏联(qián sū lián)은 세계제일의 社会主义 国家이자 또한 발전경험에 있어 귀감이었다.

 

中国은 사상적으로 前苏联(qián sū lián)의 맑스 • 列宁(liè níng)主义를 신봉했고 经济的으로도 前苏联(qián sū lián)式 经济모델을 채택하여 그대로 적용하였다.

 

1950年代 초 맺어진 양국 간 우호조약은 中国 • 苏联(sū lián) 간 주종 关系를 확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1953年에는 일련의 经济•기술원조 협정 등을 맺음으로써 양국 关系는 더욱 긴밀해졌다.

 

台湾과 美国과의 关系역시 1953年 한국전쟁이 종결된 이래로 더욱 밀착되는 추세였다.

 

1954年에는 美国이 台湾과 공동방위조약을 맺어 台湾에 대한 影响力을 늘리고 对中国 방어태세를 공고히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같은 해 8月 周恩来(zhōu ēn lái)는 결코 명확하게 상대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美国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은 台湾 • 美国(měi guó) 동맹关系에도 불구, 단호하게 反제국주의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란 메시지를 전했다.

 

“만일 中国이 台湾을 解放하는 것을 어떤 외부 침략자가 감히 방해한다면, 만일 그들이 감히 우리의 主權을 위배하고, 우리의 領土를 넘보고, 우리의 내정에 감히 간섭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그러한 침략행위가 그들에게 남기는 엄청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1950年代 중반 이후 中国 • 苏联(sū lián) 간의 关系가 변화되는 조짐을 보였다.

 

1954年 흐루시초프가 中国을 방문하여 中国 • 苏联(sū lián)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과거 中国이 前苏联(qián sū lián)을 방문하던 전례를 깨고 처음으로 前苏联(qián sū lián) 고위관료가 中国을 방문한 것이었다.

 

이것은 中国과 前苏联(qián sū lián)과의 关系가 과거의 주종 일관적 关系에서 벗어나 中国이 前苏联과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섰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일로 中国의 对前苏联(qián sū lián) 복종태도가 사라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는 없지만 中国으로서는 자신이 前苏联과 대등한 关系에 들어섰다는 자아정체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해인 1955年1月 美国의회는 台湾의 방위에 美国(měi guó)의 지원을 늘린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美国 소로스 당시 국무장관도 1957年 이전에 台湾이 명실상부한 반공기지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는 등 中国을 겨냥한 경계태세가 강화되었다.

 

毛泽东(máo zé dōng)이 사상적으로 자신보다 혁명을 덜 강조하였던 邓小平(dèng xiǎo píng)을 우경분자로 간주하고 南寧회의에서 不斷的進行革命 할 것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台湾 • 美国 동맹关系에 대비하여 혁명정신을 더욱 고취시키고 前苏联(qián sū lián)과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中国의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1956年 들어 中国과 前苏联(qián sū lián)과의 关系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前苏联(qián sū lián)은 匈牙利(xiōng yá lì)를 武力으로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中国은 社会主义의 적은 자본주의이며 社会主义 国家끼리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前苏联(qián sū lián)에 대해 쇼비니즘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社会主义 国家들 간에 平和的으로 공존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아무리 前苏联(qián sū lián)에 대해 일방적 지지를 보냈던 中国이지만 자신의 역할에 위배되는 前苏联(qián sū lián)의 행위에 대해 불찬성 입장을 전달한 것이었다.

 

同年 2月14日 제 20차 前苏联(qián sū lián) 共产党대회에서 前苏联(qián sū lián) 共产党 서기장 赫鲁晓夫(hè lù xiǎo fǔ)는 战争可避说(zhàn zhēng kě bì shuō) “社会主义가 제국주의에 비해 이미 강해진 마당에 핵전쟁은 위험하므로 되도록 전쟁을 피해야 한다. (社会主义与帝国主义相比已经具有强势,核战争危险,应该尽量避免。shè huì zhǔ yì yǔ dì guó zhǔ yì xiāng bǐ yǐ jīng jù yǒu qiáng shì, hé zhàn zhēng wēi xiǎn, yīng gāi jìn liàng bì miǎn。)”을 주장하며 平和공존의 이념이 前苏联(qián sū lián) 대내외 政策의 기류를 흐르는 기본원리라고 강조하였다.

 

또 개인숭배와 테러를 이유로 들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9~1953)을 격하시키는 발언을 했다.

 

前苏联(qián sū lián)은 같은 社会主义 国家인 匈牙利(xiōng yá lì)를 침입하고 親西方으로 전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中国은 前苏联(qián sū lián)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刘少奇(liú shào qí)가 밝힌 “在国际事务的方针(zài guó jì shì wù de fāng zhēn)”에 “前苏联(qián sū lián)과 현재의 우위를 강화시키자”와 “대국주의를 반대한다.”는 방침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中国의 정통성 관념 및 세계관에 혼란이 생겼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요약해보면

 

첫째, 前苏联(qián sū lián)과 각 人民民主国家와 현재의 우의를 강화시킨다.

 

둘째, 오 원칙에 찬성하는 아시아 • 아프리카 国家들과 우호关系를 증진시킨다.

 

셋째, 자국과 外交 • 经济 •文化 关系를 맺고 싶어 하는 모든 国家와 정상적인 外交 • 经济 • 文化 关系를 발전시킨다.

 

넷째, 전쟁을 반대한다.

 

다섯째, 세계 국민의 平和的 운동을 지지한다.

 

여섯째, 아시아 • 아프리카 • 라틴 아메리카의 反식민운동을 지지한다.

 

일곱째, 大国主义에 반대한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당시에 毛泽东(máo zé dōng)이 刘少奇(liú shào qí) 보다 더욱 단호하게 아무리 前苏联(qián sū lián)이라도 그의 단점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였고 그 유명한 “종이호랑이론<美国(měi guó) 제국주의는 종이호랑이에 불과 하기에 언제든 싸워 이길 수 있다.>”을 강조한 것도 바로 1956年 7月의 일이다.

 

이것은 中国이 社会主义 지도자로서의 前苏联(qián sū lián)의 이미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낌과 동시에 社会主义 国家로서 자신의 역할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社会主义를 배신한 前苏联(qián sū lián)을 쫓는다는 것은 당시 中国에게 있어 그동안 자신이 지켜오고 쌓아온 자아 정체성과 그에 다른 삶의 의미가 흔들리게 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음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共产党대회에서 毛泽东(máo zé dōng)은 이 시대 가장 주요한 위험은 바로 수정주의라고 역설하였던 것은 대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제 親西方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反제국주의에 서지 않으려는 前苏联(qián sū lián)을 설득시키려는 것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东风压倒西风(dōng fēng yā dǎo xī fēng)<社会主义는 제국주의에 반드시 이긴다.>를 제창하며 범세계적인 투쟁을 통해 中国 • 苏联(sū lián) 양국이 함께 美国에 더 큰 압력을 가하자고 주장하였던 것도 다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毛泽东(máo zé dōng)의 태도에 대해 그가 前苏联(qián sū lián)을 제치고 세계共产党운동의 지도자 위치를 쟁취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中国과 前苏联(qián sū lián)과의 갈등关系는 政治的 노선에서 뿐 아니라 经济방면에서도 드러났다.

 

1957年은 中国이 前苏联(qián sū lián) 모델을 채택한지 첫 번째 5개年 계획이 끝난 해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다.

 

산업부문의 낙후 • 생산부진, 그리고 중 • 경공업 간의 불균형이 초래되면서 前苏联(qián sū lián)의 모방은 中国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자국 经济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前苏联(qián sū lián)은 中国에게 장기개발 차관을 상환 할 것을 공공연하게 재촉했을 뿐 아니라 차관 제공을 중단시켜 中国내부의 강한 불만을 샀다.

 

“우리더러 한국전쟁 참전비를 부담하라니 정말 말이 안 되는구나! 2차 대전 당시 美国(měi guó)도 동맹국에게 돈을 대여해줬지만 나중에 갚기 힘들어하자 받기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前苏联(qián sū lián)은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10年 내에 다 갚으라고 재촉할 뿐 아니라 이자까지 내라고 한다. 우리는 社会主义를 위해 싸워왔는데 결국 이런 꼴을 맞다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8年6月30日, 中国은 돌연 美国이 中国領土인 台湾을 침략하며 두 개의 中国을 획책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섰다.

 

7月 들면서 中国은 갑자기 台湾 问题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선전하였고 台湾, 中国 그리고 美国 간에 긴장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中国은 台湾의 国民党(guó mín dǎng)이 大陆 연해에서 军事的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고 대폭 보도하기 시작했고, 金门島(jīn mén dǎo) • 马祖島(mǎ zǔ dǎo)를 포격하기 위해 福建省(fǔ jiàn shěng) 내에 대포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돌연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美国의 전술적 핵무기가 台湾으로 운반되었고 金门島의 军事力이 1954年度의 3배로 증가하여 9만 명에 달하는 등 사태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긴장국면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中国은 8月 23日부터 金门島(jīn mén dǎo)에 맹공을 퍼부었다.

 

9月6日 周恩来(zhōu ēn lái)는 공식발표를 통해 “中国大陆人民은 金门島(jīn mén dǎo) • 马祖島(mǎ zǔ dǎo)도 같은 大陆연해에 존재하는 위협을 받아들일 수 없다. 中国政府는 연해도서를 점령한 蒋介石(jiǎng jiè shí) 군대에 대해 반격하고 필요한 군사행동을 취할 권리가 당연히 있다.”라고 밝혀 中国의 행위는 主權수호를 위한 정당한 행위임을 주장했으며, 9月20日 中国 외교부장 陳夷는 金门島(jīn mén dǎo)와 马祖島(mǎ zǔ dǎo)를 수복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陳夷는 정전을 요구하는 美国(měi guó)의 공식입장에 대해 中国 • 美国 간에는 결코 전쟁이 없으므로 거론할 정전의 问题도 없다고 밝혔으며, 中国 외교부 대변인은 美国의 선박이 만약 金门島(jīn mén dǎo) 밖 12해리 내에 진입한다면 침입자로 보겠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이번 台湾海峽 위기사태는 단지 내정问题이므로 美国이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美国(měi guó)이 먼저 도전하지 않는 한 中国 자신은 정작 美国과 충돌이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다음달 10月 들어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사태가 中国에 의해 台湾海峽에서 전개되었다.

 

10月6日 中国은 돌연 美国이 보호 운항만 하지 않는다면 金门島(jīn mén dǎo)가 台湾 내륙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발포를 중지하여 물자 공급선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台湾이 이에 응하지 않자 다시 金门島 발포를 재개하였고, 13日 다시 동일한 요구를 제안했다.

 

台湾은 이번에도 불응했고, 일주일이 지난 20일 中国은 다시 美国이 개입만 하지 않는다면 포격을 정지할 뿐 아니라 원한다면 中国이 스스로 金门島 주민을 위해 물자를 제공해주겠다고 밝히는 희극적인 사태를 연출해 내었다.

 

상술한 상황을 대상으로 中国의 武力동원 의도가 현실주의자들이 가정하듯 생존유지나 領土확장 등의 국력의 극대화에 있었다고 분석한다면 그 설명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中国의 갑작스런 포격이 감행된 1958年 중 하반기에는 비록 台湾과 美国 간의 동맹关系가 中国과 대치하는 상황이긴 했으나 결코 中国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과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고 느끼게 할 만한 세력이 金门島(jīn mén dǎo)에 존재했던 건 아니었다.

 

포격까지 이미 감행한 상태에서 金门島에 물자공급을 해주고 발포를 정지하는 대가로 中国이 원한 것은 오직 台湾이 美国의 보호선 없이 혼자 金门島로 운항하는 것이었다.

 

1958年 金门島(jīn mén dǎo) 발포사태를 통해 中国이 획득한 성과는 안보획득이나 시장개척, 또는 台湾수복 등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당시 中国의 전력이 台湾에 상륙 하기위해 충분치 못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中国은 美国의 원조를 받은 台湾의 军事力이 침공해 들어가는 自国军을 내륙으로부터 격퇴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예방차원에서 台湾问题를 통해 앞으로 늘어만 갈 것 같은 美国의 影响力을 차단하려는 전략적 고려가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당시 中国의 전력은 美国에 비해 월등히 뒤진 상태였을 뿐 아니라 자신을 지원해줄 가능성이 있는 前苏联(qián sū lián)과의 关系마저 악화된 상황이었다.

 

군사를 연합하자는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거부한 직후 그러한 의도로 武力을 동원하였다고 설명하기 어렵다.

 

中国의 对台湾 武力동원 政策에는 中国의 민족정서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정서만 가지고는 1958年 발생한 台湾海峽 위기 사태를 포괄적으로 설명해낼 수 없다.

 

당시는 台湾이 中国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던 때도 아니었으며 中国의 마음에 갑자기 台湾에 대한 민족주의 정서가 크게 자극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美国(měi guó)과 협력하는 台湾을 정벌하는데 포격의 주목적이 있었다면 金门島(jīn mén dǎo)를 대포로 봉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자 공급선조차 통과 못하게 저지했을 것이다.

 

中国은 줄곧 台湾에게 진정한 中国人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물자공급을 해라, 함께 反 제국주의 전선에 나서기만 한다면 내가 물자공급을 해주겠다고 말하는 등 자신의 관대성을 선전하였고, 자신의 주요한 관심은 오직 台湾에 있지, 美国과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美国이 먼저 도전하지 않는 한 美国과 충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공식입장의 표명은 향후 전개될 양국과의 충돌책임을 모두 상대 国家에게 전가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中国의 전형적인 外交 스타일이다.

 

1958年 中国이 对台湾 武力政策을 전개한 주요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왜 中国이 前苏联(qián sū lián)와 美国(měi guó)과의 关系악화를 무릅쓰고 台湾问题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을까’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다.

 

위기 사태의 전반을 종합하여 분석해 보았을 때 中国이 정말 원했던 것은 台湾領土 수복 혹은 전략적 고려에 따른 안보적 이익이 아니었다.

 

中国이 흐루시초프의 中国 • 苏联(sū lián)연합 해안군대 창설제의를 거절한지 몇 주일 만에 金门島 포격을 감행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58年度 对台湾 武力政策의 목표는 台湾问题를 이용해 타락해 가는 前苏联(qián sū lián)에게 자신은 前苏联(qián sū lián)의 親西方政策을 따를 수 없고, 前苏联(qián sū lián)이 없이도 스스로 자주국방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주체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美国 제국주의에 홀로 용감히 대적한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었다고 분석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다.

 

전쟁이 터진 뒤 中国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中国이 武力으로 台湾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지원할 수 없다”는 흐루시초프의 단언은 中国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남에게 의존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中国은 武力政策을 통해 前苏联(qián sū lián)과는 다르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社会主义를 견지하는 정의 세력의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다.

 

武力동원은 자국의 이익 도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無我觀을 지킬 수도 있었다.

 

反제국주의 및 反패권주의의 역할을 과감히 수행함으로써 당시 혼란에 빠진 자신의 자아 정체성과 国家이미지를 다시한번 확고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台湾问题는 中国에게 있어 자신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자국의 존재의의와 정통성을 확인하기에 더 없이 적당한 사례로 보였던 것이며 이를 위해 中国은 武力동원이라는 극적인 수단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설명력을 갖는다.

 

1958年 中国의 对台湾 武力政策에는 中国의 전통 • 역사 • 문화 및 가치관 등의 문화심리 요인이 中国의 政策에 심도 있는 影响力을 미쳤다.

 

따라서 1958年 中国의 对台湾 武力政策은 中国 外交政策(wài jiāo zhèng cè)을 분석하는데 있어 문화심리적인 요인의 분석이 필요함을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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