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는 말한다._재스민 혁명이 몰고 온 중국해체(박사청구논문)_(Mr. Jung-Sun Kim)_31<세계재활기구_World Rehabilitation Organization>의 자료를 옮겨 제공합니다.<자료제공. http://www.wro5.com>

 

중국역사는 말한다._재스민 혁명이 몰고 온 중국해체_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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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毛泽东시대의 对台湾政策

 

 

毛泽东(máo zé dōng)의 对台湾政策은 1958年 8月 23日을 정점으로 크게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军事的 공격에 의한 统一달성이라면 후기는 政治的 해결을 통한 统一추구였다고 볼 수 있다.

 

毛泽东(máo zé dōng)은 1949年부터 1959年 한국전쟁 발발까지 줄곧 台湾 및 澎湖(péng hú) • 金门(jīn mén) • 马祖(mǎ zǔ) 등지에 대해 武力을 사용했는데, 이는 두 가지 근거에 따른 것이었다.

 

첫째, 미완의 통일을 마무리 짓겠다는 것으로 台湾을 포함한 中国領土의 완전통일이며,

 

둘째 해리 트루만(Harry Truman) 美国(měi guó) 大統領의 불간섭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1949年9月30日 中国 共产党(zhōng guó gòng chǎn dǎng) 제 1기 政治협상회의<이하 政协(zhèng xié)-당시엔 中国 共产党(zhōng guó gòng chǎn dǎng)의 최고 권력기구였다.> 제 1차 전체 회의가 통과시킨 ‘中国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纲领(gòng tóng gāng lǐng)(共同綱領)’중 中华人民共和国(zhōng huá rén mín gòng hé guó)中央人民政府는 人民解放 전쟁을 통해 全 中国領土를 반드시 解放시키고 中国统一을 이룰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政协(zhèng xié)은 解放军에 보내는 전문 중에서 “오래지 않아 여러분들은 전국 人民의 간절한 소망을 실현해 투항하지 않는 적군을 완전히 전멸시켜 台湾解放, 西藏(xī zàng)와 모든 未解放지역을 解放시켜 완전한 中国统一의 위해한 과업을 완성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동年 12月31日 中国 共产党(zhōng guó gòng chǎn dǎng)은 ‘전선의 장병과 전국 동포에게 고하는 글<告前线将士和全国同胞书(gào qián xiàn zhàn shì hé quán guó tóng bāo shū)>’을 발표, “台湾 • 海南岛(hǎi nán dǎo) • 西藏(xī zàng)을 解放시켜 祖国统一의 과업을 완수하고, 美国(měi guó) 제국주의 침략 세력이 우리領土에서 어떠한 근거지도 갖지 못하게 하자”는 구호를 제창했다.

 

이후 ‘台湾解放’이라는 용어는 邓小平(dèng xiǎo píng)이 1979年1月30日 더 이상 이 구호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때까지 中国의 对台湾政策과 지도성 구호로 유지되어왔다.

 

中国의 军史에 따르면 1949年10月 하순 金门島(jīn mén dǎo) 전투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승리의 상황 하에서 고급 지휘관들은 적을 얕보고, 형세를 낙관해 전투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도시를 점령, 管理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동시에 작전 지시에 있어 상륙작전의 특징과 난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채 단지 전투기에 의한 정세 장악을 강조하고 적정과 해정에 대해 주도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미비했으며, 군함 등 함정에 대한 준비가 불충분했다. 전투조직의 지휘도 엄격하고 치밀하지 못했으며 서로 다른 편제의 3개단에 统一된 지휘체계가 없이 갑작스럽게 전투에 임해 엄청난 손실을 피할 길이 없었다.”

 

1950年1月5日 투르만 美国 大統領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美国은 台湾 또는 中国의 여타 領土에 대해서 어떠한 야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武力을 통해 현 정세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고, 美国(měi guó)政府는 中国내정에 개입될 수 있는 어떠한 과정도 거부할 것이다.”

 

1950年4月 林彪(lín biāo) 의 제 4 야전군이 海南岛(hǎi nán dǎo)를 점령한 후, 중공中央군사위는 3야전군으로 하여금 빠른 시일 내에 金门島(jīn mén dǎo) 재침공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同年 6月25日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6月27日 美国(měi guó)의 투르만 大統領은 美国 제 7함대의 台湾海峽 진입을 명령하면서 台湾에 대한 어떠한 침공도 막을 것이며, 台湾의 미래 지위 결정은 태평양의 안전회복 또는 联合国(lián hé guó)의 결의를 기다려야 한다는 ‘台海中立化(tái hǎi zhōng lì huà)’, ‘台湾地位未定論’의 입장을 보였다.

 

다음날(28日) 정무원 总理 겸 외교부장인 周恩来(zhōu ēn lái)는 ‘中国은 美国 침략자 손에서 台湾을 解放시키기 위해 끝까지 분투해야 된다.’는 강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상 中国의 金门島(jīn mén dǎo) 침공준비는 중지됐다.

 

毛泽东(máo zé dōng)과 中共中央军事委(zhōng gòng zhōng yāng jūn shì wěi)는 同年 11月 福州(fú zhōu)军区(fú zhōu jūn qū)에 정식으로 명령해 金门島(jīn mén dǎo) 공격을 취소했으며, 金门島 공격을 준비하던 24军 • 25军 • 32军을 철수시키고, 28军 • 29军 • 31军은 해안 방위를 담당케 했다.

 

따라서 美国(měi guó)의 台湾海峽 정세 불간섭 정책에 의해 金门(島(jīn mén dǎo) 포격에 나선 中国은 전환점을 맞게 됐는데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주적 개념의 변화로써 주요목표가 台湾으로부터 美国으로 바꿨다.

 

毛泽东(máo zé dōng)은 美国(měi guó)의 台湾海峽 정세 간섭의 목표가 中国의 영구 분열이며, 台湾을 그들의 비호아래 있는 ‘독립국’ 혹은 ‘신탁통치지구’로 만들려는데 있다면서 주요한 위험요소로 간주했다.

 

이런 정세하에 金门島 점령은 도리어 台湾독립 세력에 의해 이용돼 분단이 고착되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毛泽东(máo zé dōng)은 1950年11月 金门島(jīn mén dǎo) 점령 명령을 취소한 후, 다시는 金门島(jīn mén dǎo) 상륙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4年7月 中国은 재차 台湾에 武力解放을 시도하게 되는데, 同年 8月 福建省에 병력을 집결했으며, 9月3日 金门島(jīn mén dǎo)에 포격을 가하면서 제 1차 台湾海峽의 위기가 고조됐다.

 

그러던 중 1954年12月2日 美国과 台湾이「中美共同防御条约(zhōng měi gòng tóng fáng yù tiáo yuē)」을 체결하자 周恩来(zhōu ēn lái) 总理는 12月21日 제 2기 政协(zhèng xié) 제 1차 전체회의에서 “이번 조약이 美国의 中国領土 武力침략의 合法化를 제공했다”면서, “일체의 소위 台湾독립국, 台湾중립화와 台湾 신탁통치 주장은 실제에 있어 中国領土를 갈라놓는 것이며, 中国主權에 대한 침범이자 中国내정에 대한 간섭”이라고 지적했다.

 

둘째, 공격 전략에서 방어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일예로써, 1953年7月15日 金门島(jīn mén dǎo) 수비부대인 胡琏(hú lián)부대의 福建省(fǔ jiàn shěng) • 山东省(shān dōng shěng) 상륙으로 오히려 人民解放军이 200호 고지로 후퇴하는 과정을 보면, 당시 人民解放军은 胡琏(hú lián)부대를 반격하지 않고, 東山島의 방어시설 재정비를 했을 뿐이다. 毛泽东(máo zé dōng)이 台湾에 대해 군사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美国에 대한 政治공세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59年 4月 18日부터 24日까지 아시아 • 아프리카의 20여개 国家가 인도네시아 반둥에 모여 개최한 아시아 • 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한 周恩来(zhōu ēn lái) 总理는 中国의 台湾에 대한 입장을 간명하게 나타냈다.

 

周恩来(zhōu ēn lái) 总理는 “台湾은 中国의 領土이고, 나아가 台湾解放은 中国의 內政问题 ”이며, “台湾지역의 긴장완화를 위해 美国(měi guó)政府와 회담할 용의가 있다. (台湾是中国的领土,进一步说,台湾解放是中国的内政问题,为了缓解台湾地区的紧张趋势,有和美国政府进行会谈的想法。tái wān shì zhōng guó de lǐng tǔ. jìn yī bù shuō, tái wān jiě fàng shì zhōng guó de nèi zhèng wèn tí, wèi le huǎn jiě tái wān dì qū de jǐn zhāng qū shì, yǒu hé měi guó zhèng fǔ jìn xíng huì tán de xiǎng fǎ。)”고 강조했다.

 

同年 5月 13日 周恩来(zhōu ēn lái) 는 전국人民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 15차 회의에서 台湾을 解放시키는 데는 전쟁에 의한 것과 平和的인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中国人民이 원하는 가능한 조건하에서 平和的인 방식으로 台湾의 解放을 쟁취할 수 있다는 和平统一방안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中国의 이 같은 태도변화에 美国의 아이젠하워 政府는 환영을 나타냈으며, 7月 25日엔 中国  • 美国 쌍방이 영사급 회담을 대사급 회담으로 격상시킬 것을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1955年 8月부터 열린 中国 • 美国 대사급 회담에선 台湾问题가 주요쟁점사항이었다.

 

美国은 中国으로 하여금 台湾에 대한 武力사용 포기를 요구했으며, 中国은 台湾解放을 中国의 내정이라며 美国(měi guó)의 간섭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회담은 1957年12月12日을 기해 중단되게 된다.

 

1956年4月 “平和가 좋은 것(和爲貴), 애국일가족(愛国一家), 애국에는 선후가 없다. (和为贵,爱国一家,爱国没有先后。Hé wéi guì, ài guó yī jiā, ài guó méi yǒu xiān hòu。)” 제 3차 国 • 共合作(guó gòng hé zuò) 등의 毛泽东(máo zé dōng) 政策이 제기된 후 6月 28日 周恩来(zhōu ēn lái)는 全国人民代表大会(quán guó rén mín dài biǎo dà huì)<이하 全人代(quán rén dài)>에서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中国人民은 가능한 조건하에서 平和的인 방식에 의한 台湾의 解放을 바라고 있다. 台湾을 平和的으로 解放할 구체적인 단계와 조건에 대해 台湾당국과 협상하기를 원하며 台湾 당국자들이 적당하다고 여기는 시기에 대표를 北京(běi jīng) 혹은 기타 적당한 지역에 파견해 우리 측과 회담하기를 희망한다.”

 

이 같은 표명엔 台湾과의 접촉통로를 열어 美国의 台湾독립 혹은 台湾중립화 전략을 막겠다는 毛泽东(máo zé dōng)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中国은 台湾에 시도한 统一战线战术(zhàn shù)<이하 统战(tǒng zhàn)> 가운데 1957年5月 中国이 台湾에게 10가지 회담조건을 제시했는데 여기에서도 ‘하나의 中国’이라는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10가지 회담조건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蒋介石(jiǎng jiè shí)은 北京(běi jīng)政府 부주석으로 台湾自治區의 주석이다.

 

둘째, 台湾은 中国의 일부분으로 自治權을 누리고 自治區를 설치할 수 있다.

 

셋째, 国民党军은 그대로 蒋介石(jiǎng jiè shí)의 통수권 하에 있을 수 있으나, 人民解放军으로 개편돼 蒋介石(jiǎng jiè shí)은 北京政府의 국방위원회 부주석이라는 신분으로 台湾의 군사권을 갖는다.<국방위주석은 毛泽东(máo zé dōng), 국방위부주석은 周德 등>.

 

넷째, 国民党(guó mín dǎng)의 군정인원은 지원에 따라 大陆으로 돌아오든지 美国(měi guó) 등지로 가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大陆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겐 일자리를 마련해주며, 美国 등 그 밖의 지역으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다섯째, 해외 中国人들은 어떠한 당파를 불문하고 大陆으로 돌아와 적당한 공직을 맡을 수 있는데 胡适(hú shì)는 北京 中国科学院 부원장으로 재임할 수 있다. 全人代(quán rén dài) 및 政协(zhèng xié) 은 조직을 확대하고 인원을 증가할 것이다.

 

여섯째, 联合国(lián hé guó) 대표단은 北京政府가 파견하는데 宋庆龄(sòng qìng líng)을 대표단장으로 하며 현재의 国民党(guó mín dǎng) 대표는 철수한다.

 

일곱째, 台湾과 해외에 있는 각 당의 지위는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 国民党(guó mín dǎng)은 国民党 혁명위원회와 협상하며 民社党(mín shè dǎng) • 靑年党 등은 民主동맹과 협상하여 합병 혹은 독립적인 존재 여부를 결정한다.

 

여덟째, 종교는 自由이며, 于斌(yú bīn)주교는 大陆으로 돌아올 수 있는데, 외국과 정치상 특수연계를 맺을 수는 없다.

 

아홉째, 학술문화의 自由(zì yóu)로 ‘白花薺放, 百家爭鳴’ 방침을 확인한다.

 

열번째, 사유재산은 보호받을 수 있으며, 현재 갖고 있는 외화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준다.

 

일면 이 같은 统战(tǒng zhàn)政策을 펴나가면서도 毛泽东(máo zé dōng)은 1958年7月18日 중공中央군사위 부주석과 해군 공군지휘관을 소집해 金门島(jīn mén dǎo) 포격구상을 밝혔다.

 

따라서 同年 8月 23日 人民解放军은 4만여 포탄을 金门島에 퍼부었으며, 해군과 공군으로 하여금 金门島를 봉쇄케 해 제 2차 台湾海峽의 위기는 고조됐다.

 

이때의 포격 동기는 복잡한데 당시 中国內 政治環境<三面红旗(sān miàn hóng qí)> 변화와 美国측의 台湾政府에 대한 지원 의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 同年 10月 中国 국방부는 두 번에 걸쳐 告台湾同胞書(台湾동포에게 고하는 글) 발표하고, 台湾 당국에게 협상을 통한 平和的인 해결 추진을 제의했다.

 

1959年9月 刘少奇(liú shào qí) 国家주석은 특별사면령을 공포하고, 1949年 中国 共产党(zhōng guó gòng chǎn dǎng) 정권 수립이래 처음으로 ‘개전의 정이 뚜렷한 国民党(guó mín dǎng)의 전범’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다.

 

이는 中国의 对台湾政策이 점진적으로 军事的 수단에서 政治的 수단으로 전향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78年까지 中国은 台湾의 和平统一이라는 统战(tǒng zhàn)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武力사용의 가능성은 언제나 배제하지 않았다.

 

1966年 문화대혁명 등 국내사정과 中国 • 인도 국경전쟁, 中国 • 苏联(sū lián) 국경충돌 등으로 인해 对台湾政策은 平和的인 수단에 의한 통일의 추진이 기조를 이루면서 국제무대에서 台湾의 고립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는 이미 台湾问题가 단순한 내정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国際问题로 발전했으며 단순무력통일, 쌍방 담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한 예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70年代 들어 활발하게 각국과의 국교关系 수립을 추진한 中国은 국교를 회복하면서 각국에게 台湾과의 外交단교를 요구했으며, 台湾이 中国의 일부라는 것과 中国이 유일한 合法政府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1971年10月25日 联合国(lián hé guó)회원국으로 가입한 中国은 1972年 2月엔 美国(měi guó)의 닉슨(Richard M. Nixon) 大統領이 中国 大陆을 방문하면서 对台湾政策에서의 변화를 보였다.

 

이는 닉슨 大統領과 周恩来(zhōu ēn lái)가 서명한 ‘上海(shàng hǎi)성명’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성명에서 “中国은 中华人民共和国(zhōng huá rén mín gòng hé guó)政府로 中国의 유일 合法政府이며, 台湾은 政府의 하나의 省에 지나지 않으며, 台湾解放은 中国의 내정으로 다른 나라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 (中国作为中华人民共和国的政府,是中国的唯一合法政府;台湾只不过是政府的一个省台湾的解放是中国的内政问题,其它国家没有干涉的权利。中国政府反对 “一中一台,一个中国, 两个政府,两个中国,台湾独立和台湾地位未定论” 等一切活动。zhōng guó zuò wéi zhōng huá rén mín gòng hé guó de zhèng fǔ, shì zhōng guó de wéi yī hé fǎ zhèng fǔ; tái wān zhǐ bú guò shì zhèng fǔ de yī gè shěng, tái wān de jiě fàng shì zhōng guó de nèi zhèng wèn tí, qí tā guó jiā méi yǒu gān shè de quán lì. zhōng guó zhèng fǔ fǎn duì “yī zhōng yī tái, yī gè zhōng guó, liǎng gè zhèng fǔ, liǎng gè zhōng guó, tái wān dú lì hé tái wān dì wèi wèi dìng lùn” děng yī qiè huó dòng。)”면서, “中国政府는 一中一台(yì zhōng yì tái) , 一個中国, 两個政府, 两個中国, 台湾독립과 台湾 地位未定論 등 모든 활동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美国측은 성명에서 “美国은 台湾海峽 양쪽의 모든 中国人들은 하나의 中国을 인정하고 있으며, 台湾은 中国의 일부분”이라고 강조했다.

 

1972年7月23日 Hongkong 南华早报(nán huá zǎo bǎo)는 中国이 台湾과의 회담을 준비하고 있으며, 台湾이 中国에 귀속되는 조건으로 과도시기를 거치게 될 것과 이 과정 중에서 台湾內 외국상인들에겐 손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中国의 의도를 보도했는데 여기서 邓小平(dèng xiǎo píng)이 제기한 ⌜一国两制(yì guó liǎng zhì)⌟는 毛泽东(máo zé dōng)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3年2月28日 中国은 국내외 정세 변화를 祖国统一에 십분 활용하자는 의도에 따라 中国 共产党(zhōng guó gòng chǎn dǎng) 统战(tǒng zhàn)간부, 政协(zhèng xié)위원, 台湾 民主自治 동맹대표, 北京(běi jīng)에 있는 台湾국적 사람들을 참석시켜 北京에서 ‘二二八纪念 座谈会(èr èr bā jì niàn zuò tán huì)’를 거행했다.

 

1975年1月13日 全人代(quán rén dài) 제 4기 제 1차 회의에서 周恩来(zhōu ēn lái)는 政府 공작보고에서 “우리는 반드시 台湾을 解放해야 한다. 台湾동포와 전국人民은 단결해야 하며, 台湾解放과 统一祖国(zǔ guó)의 숭고한 목표실현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解放과 统一이라는 용어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同年 4月 8日 福州(fú zhōu)军区(fú zhōu jūn qū) 皮定釣 사령관은 福建省(fǔ jiàn shěng) 上記의 간부회의에서 ⌜一国两制(yì guó liǎng zhì)⌟의 구상이 내포된 台湾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台湾에 3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상황은 平和解放으로 대개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는 统一된 祖国(zǔ guó)에 하나의 中央이 있고, 台湾은 中华人民共和国(zhōng huá rén mín gòng hé guó)의 영도 하에 ‘하나의 省이나 自治區’로 그 지위가 설정되고 오랫동안 民主개혁을 실시하지 않는다. 제 2단계에는 社会主义 国家라는 조건 속에 民主개혁을 실시한다. 제 3단계는 低단계의 民主개혁에서 高단계의 社会主义 개혁으로 끌어올려 台湾을 전국에 있는 自治區의 최후 말미에 포함시켜 社会主义 대열에 합류시킨다.”

 

1958年 이후 中国은 台湾에 대해 武力행사를 하지는 않고, 平和 解放 平和회담의 구호를 제창했으나 武力에 의한 台湾统一 의사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은 것에 주시해야 할 것이다.

 

1978年3月 ‘1978年 新宪法(xīn xiàn fǎ)’ 머리말은 “台湾을 解放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