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복합체계 차원에서 본 세계무기시장의 순환경로_1회

 

 

전쟁자유무역의 첨단이자 위대한 인터내셔널의 핵이었던 무기 산업이, 1차 대전에서는 대량파괴의 수단으로 등장하였다.

 

앤드류 언더샤프트를 위시해서 노벨, 크루프, 자하로프가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정당한 가격이라면 누구에게나 무기를 준다.”는 무기상들의 신념은 어처구니없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가 전 세계에 팔고 있었던 무기가 이제는 거꾸로 자기나라 군대를 겨누고 되돌아 왔다.

 

터키에 팔았던 영국의 대포는 다다넬즈 해협에서 영국군 병사를 향해서 발사되었고, 히람경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에 판 맥심총은 서부전선에서 쌍방으로부터 발사된 기관총의 선두주자였다.

 

프랑스가 불가리아에게 판 75밀리포가 이제는 프랑스군을 향하여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크루프사가 적국의 무장에 큰 기여를 했다.

 

즉 러시아에서는 크루프의 대포가 독일병사를 행해 있었고, 벨기에 군대도 크루프사에 의해 무장되었으며, 주요해군은 모두 크루프의 특허로 제조된 장갑판과 포탄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유틀란트전투에서 쌍방은 크루프의 뇌관을 장착한 포탄을 발사했다.

 

이런 수익성 좋은 독점은 전쟁이 끝난 후 크루프사가 비커스사를 상대로 낸 포탄에 대한 사용료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을 때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곧 무기 상인들이 대중의 혐오와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회사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는 공급하면서도 자국 군대에 대한 공급약속은 이행하지 못했고, 해군의 군비에만 열중한 나머지, 대규모의 지상전용 군비개발에는 대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규제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영국 회사들의 수익은 엄청난 것이었고, U.S.스틸과 듀퐁에 의해 주도되던 미국 회사들은 전시 주문에 의해 변모되었다.

 

제 1차 대전을 통해서 미국의 가장 적극적인 무기회사, 듀퐁(du Pont)은 스페인 및 스페인과 싸우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공화주의자들 양자에게 모두 화약을 판 적이 있었고, 크리미아전쟁 때는 러시아와 영국에도 공급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때 남부에도 무기를 팔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후에, 듀퐁은 완전히 국내 수요에만 전념해서 강력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후에 거대한 화약 트러스트로 이를 더욱 굳혔다.

 

당대의 거물들이 국내시장 확대와 경쟁상대 제압에만 몰두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 상권 쟁탈전 그 자체가 일종의 전쟁 대체물이었다.

 

철도 붐이 수그러지고 이후의 행정부가 점점 더 제국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세기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의 철강회사들도 점점 정부의 무기구입계약과 해외 무기 수출에 매달리게 된다.

 

철도용품에서 군수품으로, 평화적 이데올로기에서 제국주의로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에 미국 최대의 철강 사업을 일으킨 앤드류 카네기의 평화주의는 처음부터 당시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평화주의처럼 모순된 것이었다.

 

즉 그도 미국의 팽창을 열렬히 지지했었고 청년 자본가로서의 첫 수익을 남북전쟁에서 얻었던 것이다.

 

그도 다른 대 독점가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피츠버그에다 카네기 철강을 일으켰지만, 전쟁에 관한 논의에서는 항상 평화주의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정부가 쓸모없는 해군을 유치하지 않고 있음을 칭찬했다.

 

그래서 1896년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승리(Triumphant Democracy)」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미국이 더 좋은 목적에 돈을 쓰며 전함다운 전함하나 없다는 것은 공화국의 큰 영광중의 하나다.”

 

그의 기업가적 도덕의 실질적인 첫 시험은 1881년 가필드 암살 후에 아더(Arthur)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였다.

아더는 의회가 마지못해 승인한 근대적 강철 전함 4척을 주문해왔다.

 

이는 ‘20세기 중엽의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창설을 향한 최초의 시도’에 해당하는 사업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 재직 시 해군력 증강은 철강 산업계에 구미가 당기는 사업이었으나, 카네기는 처음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1886년 클리블랜드 행정부의 해군장관, 휘트니(W.C. Whitney)에게 자기는 장갑판 입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해 말이 되자 그는 이미 동업자의 압력 때문에 심경을 바꾸어서 휘트니에게 “장갑판 때문에 외국으로 가야 될 것을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대포와 달리 장갑판은 본질적으로 방어용이라 확신하는 것이었다.

 

1889년 공화당의 해리슨 행정부 하에서 해군력이 더욱 더 증강되자, 그는 이제 감격하고 있었다. “장갑판 주문이 우리에게 몇 백만 불은 벌어다 주겠지요.”

 

이듬해에 카네기 회사는 장갑판 6천톤 매매계약에 서명하고 이어서 곧, 러시아 측의 시방서를 빼 돌린 미국 해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짭짤한 주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해군 장교 중 한 사람인, 스토운(C.A. Stone) 중위는 상투적인 변명으로 기밀누설을 합리화시켰다.

 

“미국이 생산을 유지시켜 줄 수 없다면, 수출용 무기제조를 계속하는 것이 미국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생산이 계속된다면, 개량이 가능하지만 생산이 중단되면 계속적인 개량이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카네기가 미국 내의 유일한 경쟁 상대인 베들레헴사와 주문을 양자 간에 분배함으로서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체결하자, 무기 수출의 수익성은 분명해졌다.

 

그 이후 카네기사의 장갑판 이윤은 약 300퍼센트로 추산되었고, 결국 높은 가격이 미국 해군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893년에 해군장관은 카네기사가 장갑판의 결함을 감추었고, 검사용 판은 특별 가공한 다른 장갑판을 쓰고 있다고 비난해서, 결국 카네기 사는 장갑판가격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었다.

 

철도 붐이 끝나자, 다른 철강 생산물의 수요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갑판 주문은 카네기사의 특별한 환영을 받았다.

 

카네기는 이제 대포제조에 반대하던 원칙을 버리고, 그의 동업가에게 대포제조를 권했으나, 이번에는 동업자가 대포가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익이 너무 적고 또 포탄 쪽의 수입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비록 자기 회사가 전쟁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카네기는 여전히 평화주의자임을 내세웠다.

 

점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노벨이나 카네기처럼, 자기들이 만든 무기의 파괴력이 커짐에 따라 더욱 더 평화를 위해 일 할 결의를 굳히는 것이었다.

 

쇼우와 벨록 같은 풍자가들은 1차 대전 오래 전에 이미 예리하게 파헤친 대로, 일본군의 반수가 작은 맥심총에 의해 살상되었다는 러시아 · 일본 전쟁 사상자 발표 이후, 무기업자들이 주장하는 억제효과는 이미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산업이 파괴수단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고서 고통스런 당혹감을 나타냈다.

 

암스트롱경이 사망하자 뉴우켓슬의「데일리 크로니클 (Daily Chronicle)」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상 최우수의 생산기계를 갖추고 있는 한편, 가장 전율할 살인기계를 가지고 있다.······자유와 인도주의의 세기가 끝날 때 복수심에 불타는 군국주의로 돌아가리라고 어찌 민주주의의 제창자들이 예언할 수 있었으랴.

 

1차 대전 중에 호황을 누렸던 초기 단계의 미국의 항공 산업은 평화의 도래와 더불어 극심한 타격을 받아서 계약은 취소되고 수백 대의 잉여 항공기가 헐값으로 팔렸다.

 

전쟁 중에 잠수함으로 수입을 올렸던 일렉트릭 보트사도 그로튼의 조선소의 조업유지를 위하여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주문 유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공황 중에는 미용기계 수리도 기꺼이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 제조업자들에게 세계무역이라 할 만한 기회가 찾아오기까지는 또 25년이 흘러야 했다.

 

금세기 초가 되자 군수산업은 대륙간의 연락망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산업이 되었다.

 

비커스사는 그들의 재정전문가 지그문트 뢰붸(Siegmund Loewe)의 도움으로 외국 회사들과 긴밀한 제휴를 맺게 된다.

 

뢰붸가 1900년에 전지추진식 신형 잠수함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일렉트릭 보트라는 활기 찬 미국인 회사(미국인 변호사 아이작 라이스「Isaac Rice」가 세운 회사로 후의 제너럴 다이나믹스의 전신)와 협정을 체결시킴으로써, 비커스사는 유럽 지역에 대한 특허권을 보유하는 대신, 일렉트릭 보트사가 미국 해군과의 계약으로 완전히 자립할 때까지 막대한 금액을 대부해 주기로 하였다.

 

뢰붸는 또 뉴 칼레도니아의 광산을 이용해서 강철 연마에 필요한 니켈을 독점하고 있던 프랑스의 르 닉켈(Le Nickel)사와의 협약도 체결해서, 1901년에는 닉켈 신디케이트로 발전시켰고, 뢰붸 집안이 투자하고 있던 도이췌 바펜(Deutsche Waffen)사와의 특허 사용계약을 주선해서, 독일 내에서의 자동소총 독점판매권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비커스사는 크루프가로부터 크루프의 모든 시한폭탄뇌관 제조특허의 사용권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가장 악명 높은 특허사용계약이 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계약은 새로운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갑판 사업부근에서 있었다.

 

1893년 크루프사가 포탄에 아주 효과적으로 견디어낼 수 있는 특수강을 개발해서, 톤당 9파운드라는 비싼 사용료를 받고 경쟁사에게 사용권을 판 후, 1897년에는 영국의 주요 철강회사 모두가 크루프의 강철을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