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복합체계 차원에서 본 세계무기시장의 순환경로_2회

 

 

한편 미국에서도 헤이워드 오거스트 하비(Hayward August Harvey)가 신종의 장갑판을 개발해서 역시 세계 특허를 취득했다.

 

그 후 1894년 비커스사, 크루프사, 카네기사를 포함하는 10대 장갑판 생산업자들이 하비 강철의 가격규제와 대외 주문의 배분을 위한 하비 신디케이트를 결성하여 이후 17년 동안 경쟁상대인 크루프의 특허와 함께 이 신디케이트가 양 특허권의 만료시간인 1911년까지 장갑판 생산을 규제하였다.

 

무기회사의 국제화는, 가끔 구식 전쟁의 멋진 전통을 더 좋아하는 자국 정부와 제독 및 장군들의 보수적인 본능에 거스르기까지 하는 혁신과 실험의 변함없는 자극제였다.

 

영국 조선소는 영국해군보다 흔히 외국의 주문에 솔깃해서 1899년에 해군조선부장 화이트(William White)경이 일본 전함 건조 주문 때문에 영국 전함 건조가 지연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고 1902년에 비커스사와 암스트롱사가 아주 성능 좋은 칠레 전함 두 척을 건조해서 결국은 영국 해군이 이것을 자기들에게 팔아달라고 고집할 정도였다.

 

그 후에도 자주 그렇게 되지만, 당시의 남아메리카는 강대국의 병기 시험장이었고, 엘스위크의 암스트롱사의 조선소에게 있어서 일본의 팽창이란 특별히 구미당기는 일이었다.

 

청 · 일 전쟁(1894년)과 러 · 일 전쟁(1904년)이란 해군 기술의 새로운 실험장으로, 뉴우켓슬의 어떤 사가의 말로는 일본의 승리가 “어느 정도는 엘스위크의 승리”라는 것이다.

 

1905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이 러시아 해군을 격패 시킨 후에, 암스트롱사의 노동자들은 하루 동안의 기념 휴가를 가졌었다.

 

금세기 초, 다른 낡은 전함을 모두 구식으로 만들어버린, 큰 대포와 강력한 장갑판으로 무장한 영국 전함, 드레드노트(Dreadnought)호의 출현과 함께 전함 경쟁이 다시 치열해졌다.

 

이는 정부의 힘의 균형 계산을 뒤엎어 버리는 무기 기술의 초기의 예에 속한다.

 

트레빌코크는 군수회사들이 다른 산업을 자극시켜 막대한 기술혁신에 이바지했음을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다.

 

“현대 항공 산업만 보아도, 정부의 방위시설이 군용에서 민간경제부문으로 전환 될 때 전수 가능한 기록 혁신을 자극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무기회사들이 산업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버어밍검의 소형무기(Small Arms)사가 소총에서 오토바이와 다이믈러 자동차 생산회사로 바뀌고, 비커스사는 전함뿐만 아니라 대양 항해선도 만들었다.

 

그런데다 업계의 많은 거물들은 무기산업이 초래한 결과에 관심을 보여주었다.

 

후에 가끔 주장되는 바처럼 이들 세계적 회사들이 유럽의 전쟁을 도발시키고 싶어했다는 증거는 없다.

 

만일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들의 모든 장래가 위험해질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업체가 군축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공산당에 의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영국 공산당의 폴리트(Harry Pollitt)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전쟁은 자본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전쟁이란 무서운 것인 동시에, 끔찍스러울 정도로 수익성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군수산업과 관련된 문제가 현 체제가 소멸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고 실업이 급증했을 때, 배로우와 뉴우켓슬을 포함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은 대개 무기 산업에 주로 의존하던 지역이었다.

 

공황 최악의 해인 1932년에 비커스사는 만 6천명 밖에 고용하지 못했다.

 

빈 선가와 버려진 크레인이 무기수출에 매달린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불황의 와중인 1931년 3월에 「뉴우 스테이츠맨(New Statesman)」지에는 ‘호황으로의 복귀인가 가상전인가?’ 라는 제목의, 반은 익살스럽고 반은 진지한 글이 실렸다.

 

이 글은 4년 내에 노동자의 반수가 실업자가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이 때, 각국 수상들은 알지 못하는 적에 대한 가상 전을 전개할 체제를 짜낼 것이고, 이 체제 내에서, 실업자들에게는 군복이 입혀질 것이고, 조선소는 주야로 작업할 것이며, 군납을 위하여 식품과 의류업이 소생될 것이다.

 

그리고 전함 건조가 과도할 경우, 남은 전함은 영국 해협에 메꾸어 져서 도버와 까레 사이에 놓을 다리의 기초로 쓰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시의 번영이 확고하게 되어버리면 정치가들도 평화를 유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31년 일본은 영국이 가입된 국제연맹의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만주를 침공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의 대 일본 및 대 중국 수출이 새로운 호황을 맞이하였다.

 

대 중국수출은 나중에 중국 공산당에 맞서는 장개석 지원에 사용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영국정부가 금수 조치를 취했지만, 별 효력이 없는 것이었다.

 

육군성의 재무담당 차관 쿠퍼(Duff Cooper)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2주일 만에 금수조치는 해제 되었지만, 그 동안 우리는 많은 주문을 잃었습니다. 우리 영국이 금수조치를 취했다고 중국과 일본의 무기 수입량이 줄어든 게 아닙니다. 줄어 든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먹을 것과 일자리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금수조치를 반박하는 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