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복합체계 차원에서 본 세계무기시장의 순환경로_4회

 

 

전시 붐은 해안선에서 확산되어 중서부와 남부로 퍼져갔다.

 

센트루이스에서 ‘미스터 맥(Mr. Mac)’으로 불리는 짐 맥도넬(Jim Mac- Donnell)이 1939년에 창립한 회사가 3년 만에 이 도시의 주된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방위산업과 군비의 확대로 전 미국의 고용 양식이 변모되었다.

 

1939년에 국방비 지출은 국민총생산의 1.5퍼센트로 발표되었고 실업률은 17퍼센트에 달했으나 1944년이 되자. 국방비가 국민 총생산의 45퍼센트 실업률은 1.2퍼센트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전 극심한 실업사태를 겪었던 캘리포니아에서의 변화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런 팽창과 번영은 일시적인 전시 경제와, 워싱턴 당국의 가부 결정에 의존한 대가였다.

 

이제 그들의 온 장래는 포토막 강변에 우뚝 선 오각형 요새(미국방성건물 : 펜타곤)에 달려 있었는데, 펜타곤이 언제까지 자선을 베풀리는 없었다.

 

진주만공격 18개월 후인 1943년 중엽 록히드사의 고용자 수는 이미 정점을 넘어섰다.

 

1944년 일 년 내내, 펜타곤 당국이 주문을 취소하자 그해 말의 록히드사의 취업자 수는 6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1945년 여름에는 1939년 당시보다 적은 3천 5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1945년 8월 6일, 보잉의 대형요새(B29기)가 히로시마 상공으로 날아가서 원자폭탄을 투하시킴과 동시에 무기산업의 전 장래는 일변하였다.

 

원폭 투하의 정치적 결정은 일부 과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도덕적인 고려 없이 미국과 영국에 의해 내려졌다. (처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본의 항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은 전혀 문제거리가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일단 사용되어서 1차적인 목표가 달성되자 이에 대한 공포와 가능성은 분명해졌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모종의 강대국 기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장에 내다 놓은 거위 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애치슨과 릴리엔탈(Lilienthal)에 의해 마련되고 1946년 바루크(Baruch)의 안으로 제안된 계획은 반세기 전 노벨이 꿈꾸던 일종의 공포를 통한 평화를 약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따르면 원폭의 개발을 모든 나라에 금지시키고, 개발은 강대국의 감시와 관리 하에 전문과학자를 실무진으로 하는 국제기관만이 맡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미 자체 핵개발에 열을 올리며 - 4년 후에 핵실험을 한다. - 바루크안을 일축했다. 이렇게 되자 관리되는 평화를 바라는 희망은 깨어지고 노벨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불확실하고 가공할만한 공포의 균형이 뒤따랐다.

 

원자탄 투하 후 처음 몇 달 동안 찾아온, 평화 속에 젖어있는 많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공포야 어찌됐건 원자탄이 재래식의 대포, 전투기, 함정, 전쟁을 곧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보였다.

 

이 후 4년 동안 미국만이 원자탄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안전감과 평시산업으로 신속하게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평화와 폭탄의 결합으로 대부분의 미국 산업계의 경제활동이 부양되었지만 모든 항공기 회사에 있어서 1946년과 47년 두해는 최악의 시기였다.

 

으로버트 그로스에게도 이 때 만큼 어려운 해는 없었다.

 

1946년에 록히드사는 다시 적자를 내고 있었으며, 1948년 4월에 고용자 수는 13,800명으로 격감하였다.

 

자동차 · 주택 · 텔레비젼 등의 여타 소비재 산업이 붐을 누리고 있는 중에도 항공기 생산업계는 여전히 불황에 빠져 있었다.

 

경비행기 대량생산과, ‘집집마다 격납고’의 꿈은 이내 깨어져 버렸고, 모든 대형 회사들은 컨스텔레이션 등의 새로운 여객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보다도 회사들이 자기의 존재가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 : 만곡과 급경사가 있는 공중유람 철로)와 같다는 것을 더 잘 의식한 적은 없었다.

 

1948년에 업계는 ‘항공시대에 있어서의 생존’이라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면서 공군력의 확대와 재정이 강한 항공기 산업의 필요성을 역설한 핀레터 위원회(Finletter Commission)로부터 다소 후원을 얻었고, 몇달 후에 베를린 공수작전에 의해서 공중 수송의 필요성이 극적으로 입증되었다.

 

1948년 말이 되자 업체들은 최악의 사태를 넘어서게 되었고, 록히드사는 다시 이윤을 내었지만, 또 다시 군용 항공기에 매달렸다.

 

보잉사는 신형 제트폭격기 B47스트라토제트(Strato Z)로 지탱해 나갔으며 더글라스사는 이제 생산물의 87퍼센트를 군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매달려 있는 산업과 지역은 여전히 동요하고 있었고, 서해안에는 그 도가 특히 심했다.

 

194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캘리포니아에는 그 수용상태에 비해서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구는 1천 60만 명으로 50%나 늘어 ‘사상 최대의 이민’이 일어났지만, 일자리와 자원에서 볼 때 그 기반은 위험할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다.

 

1949년 3월 캘리포니아는 50만 명의 실업자에 14퍼센트의 실업률을 가리켜 전국 평균의 두 배였다.

 

그러나 인구는 다음 25년간에 천만 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한 증가를 수용하기 위하여, 얼 워렌(Earl Warren)지사는 자원, 특히 에너지와 수도부문에 극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인들도 전시 전환 과정에서 자립성을 크게 상실하였다.

 

그들은 리차드 닉슨 같은 우익 정치인이 어느 만큼 자기들의 소박한 자립성을 이해해 주길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워싱턴에다 근본적인 지원 - 특히 계속적인 방위산업계약 - 을 기대했다.

 

1950년 6월,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롤러코스터는 갑자기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결코 다시 내려가지 않을 상승이었다.

 

한국전쟁은 원자탄의 등장으로 지상전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대신 그 후 윌트 로스토우의 거침없는 분석에 따르자면, “산업자본이 상당한 정도까지 아시아의 지상군을 대신할 인력으로 대치될 수 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산업자본에 대한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미국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극히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한국은 곧 현재 소련의 미그기에 대항할 신형 제트전투기의 실험장이 되었다.

 

더글라스사는 신예 스카이나이트(Skyknight)를 공급하였고, 수송기 C124의 대규모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동란은 록히드사의 전쟁이었다.

 

록히드사의 제트 전투기 슈팅스타가 전 전투비행임무의 40퍼센트를 수행하였으며 최초로 미그제트기를 격추시킨 것도 슈팅스타였다.

 

한편, 해군에서는 록히드사의 수송기 수퍼 컨스텔레이션을 주문해서 병력을 태평양 상공으로 공수시켰다.

 

1950년 말, 록히드사는 2차 대전 후 방치되어 있던 세계 최대의 항공기 조립공장인 조지아주 마리에타의 공장을 인수하여 더 많은 양의 보잉 B47폭격기를 생산하였다.

 

1951년, 이 공장에는 만 명의 노동자가 취업하고 있어서 조지아로의 확장은 록히드사의 발전에 전환점을 이루었다.

 

한국동란으로 항공기 산업에 대한 펜타콘의 지출은 1950년의 26억 달러에서 1954년 106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휴전과 더불어 주문은 감소되었지만 계속되는 냉전으로 지속적인 국방비 지출은 확보되었다.

 

1952년 수소폭탄 시험 폭발이 성공하자, 항공 산업계에 수소폭탄이 ‘재래식’무기 수요를 감소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또 다시 일어났다.

 

‘재래식’무기라는 말은, 수소폭탄 실험폭발이 성공한 직후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의미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