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복합체계 차원에서 본 세계무기시장의 순환경로_5회

 

 

우리는 새로운 무기의 출현으로 많은 재래식 무기의 감소가 가능한지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선택이 결정되지는 않고, 재래식 무기들은 계속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사일과 탄두가 연이어 생산되어 연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한 개발계획과 이에 대항하는 개발계획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신개발 무기들을 수년이 못되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항공기 업체들의 방위산업 계약이 일 년에 100억 달러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마침내 항공여행이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서 민간항공 분야가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일거리를 주었지만, 바야흐로 펜타곤이 항공기산업의 수주액 중 90퍼센트를 차지하여 업계는 재차 군사예산에 매달리게 되었다.

 

1957년 펜타곤이 항공기 생산예산을 삭감하였지만,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성공과 더불어 미사일산업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는 ‘기술공학 전쟁의 진주만’(미국 · 소련 기술경쟁에서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전격적으로 발사한 것을 2차대전시 일본이 미군기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에 비유한 말)이었다.

 

이제는 대륙 간 탄두 탄이 최우선 무기가 되고, 보잉사가 미니트맨(Minuteman)제작의 주인공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1960년에 4대 항공기 회사가 10억 달러 상당의 방위계약을 획득했는데, 이들 중 3회사(록히드사, 보잉사, 노스 아메리칸사)는 서해안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제너럴 다이나믹스)는 미주리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이들 네 회사가 모두 다음 10년 동안, 부의 기복에 따라 부침이 있긴 했지만 그 지위를 고수하게 된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독점적 구매자(monopsony)인 펜타곤에 무기력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다.

 

다른 어느 곳으로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펜타곤은 그들을 서로 대립시켜서, 상대방보다 싸게 팔도록 하거나, 파산시키거나 합병시키거나 아니면 구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들도 자신의 대항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펜타곤은 적절한 방위산업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고, 육, 해, 공군도 각자의 주장에 따라 각기 좋아하는 공급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들은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및 대량의 취업 노동자의 힘을 통하여 각자 워싱턴에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제너럴 다이나믹스사는 대체로 미주리 출신상원의원 스튜어트 자이밍턴(Stuart Symington) 의원의 지원을 믿을 수 있었다.

 

보잉사는 ‘보잉사의 상원의원’으로 통하는 헨리 잭슨(Henry Jackson) 의원의 변함없는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록히드사는 이제 캘리포니아와 조지아 두 주에서는 없어선 안 될 고용주였고, 조지아에서는 러셀 상원의원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펜타곤 계약의 규모는 커지고 숫자는 줄어들고 이에 따라 회사들도 점점 더 불안해지자, 이들과 펜타곤의 관계는 도저히 전통적인 자유 기업 활동으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펜타곤 자본주의’라는 자체의 논리를 가진 체제가 된 것이다.

 

펜타곤은 이제 점점 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해서 공장은 계속 가동하고 정치가들에게도 만족을 줄 수 있도록 3군과 주요 항공기 회사들의 요구 사이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업이 끝나거나 어느 회사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계속 명령’ 혹은 ‘구제 명령’에 발맞추어서 신규 사업이 추천되곤 했다.

 

전략적인 이유가 불분명한 일부 지나친 사업은 항공기 회사를 생존시킬 필요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회사의 장래는 복잡하게 얽힌 힘 - 펜타곤의 전략가들, 노동조합, 상·하의원, 경영자 자신들로부터 행사되는 힘 - 의 상호작용에 좌우되는 것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기술 중 많은 부분이 다른 요소를 움직여서 최대의 주문과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대립시키는데 있었다.

 

서로간의 속임수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최고위층의 한 개인은 더욱 중요해진다.

 

보잉사의 빌 앨런, 록히드사의 로버트 그로스 혹은 노스 아메리칸사의 짐 킨들버거, 이들 모두가 워싱턴 밀림의 약탈자가 되어야 했었다.

 

분명히 그들이 의존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강력한 비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는 언제나 국가방위의 수호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번영의 초석으로서 그리고 고용의 보증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국면에 사용될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에 대한 최초의 중대한 경고는, 이의 결성을 주재하였으며 군부의 사고를 잘 이해하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적절하겠다.

 

“우리는 영구적인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조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명한 1961년 1월의 이임 연설 중에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군사시설과 대규모의 무기산업의 결합이란 미국인에게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는 정신적인, 전체적인 영향은 모든 도시, 모든 국가기관 및 연방정부의 전 사무실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정관청 내에서 우리는 군산복합체에 의한 유형무형의 부당한 압력을 막아내야 합니다. 부당한 권력의 출현이 부당한 결과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고 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이 획기적인 경고는 여러 명의 현직 공무원들이 무기회사로 전직해간 것을 보고 분개한 아이젠하워 연설문의 작성자 말콤 무스(Malcolm Moos : 후에 미네소타대학 총장)의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아이젠하워 자신도 자기 연설문의 입장을 고수해서 재직기간 중에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평시의 엄청난 군비지출이 국가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 점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성장을 촉구하는 여러 압력이 결합되어서 거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정당화시킬 수 없는 군비지출이란 국가자원의 남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젠하워의 경고는 이후 민주당 정부 하에서 ‘군산복합체’란 용어가 모든 급진파의 월남전 항의 어휘의 일부가 되자 더욱 더 절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부당한 권력과 자원 남용의 문제는 월남전보다 더 생명이 깊고 광범한 것으로써 무기회사들이 해외에서 이윤을 찾으면서부터 세계적인 규모로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