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위기관리_한반도통일전략과 동북아시아의 운명 (Mr. Jung-Sun Kim)_(10-13)

 

 

목 차

 

1. 동북아 안보전략 환경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2. 동북아의 대한반도 위협요소 평가

3. 한반도 통일전략과 동북아 경제 블럭화

 

 

3. 한반도 통일전략과 동북아 경제 블럭화

 

 

세계사의 흐름은 공존공영과 개방화, 자유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한반도 내에서도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국제질서 재편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정세의 변화는 남북한이 평화공존체제를 정착시키고 통일에의 본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정세와 주변환경이 제공하고 있는 민족의 공존, 번영, 통일의 좋은 기회를 잘 활용하여야 하며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자세로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 속에서 대립과 대결을 벗어나 통일을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지구상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북한은 기대와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에서 구소련은 한국과 90년 9월 수교이후, 2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통하여 국내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경제협력 관계에 중점을 둠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질서가 정착되어 온 동북아 지역에서 신사고 외교정책을 수행하는데 한반도를 조종간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구상하였으며, 특히 한국 ․ 소련 우호협력조약 체결제의나 아시아 ․ 태평양 안보협력기구 창설 같은 획기적인 제의들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축소하고자 하는 구소련의 전략적 의지이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신 국제질서 조류에 동참과 불참의 선택의 폭을 좁혀가고 있으므로 북한으로서는 이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환경의 변화와 북한 권력 엘리트들의 성격변화, 주민들의 요구변화 등은 경제개혁을 촉진함으로써 물질적인 동기와 관심이 주체사상의 이념을 퇴색시킬 가능성이 높아질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던 주변강대국의 정책 역시 한반도 문제에 관해 남북한 두 당사자의 통일의지를 부추기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소련, 중국의 북한 일변도정책이 완화되고 대한국․대서방정책을 희망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일본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희망하면서 북한과의 교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문제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의사가 중요시 되고 있고 소위「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현상이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남북한도 점차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으며 이를 남북한 통일로 연계하여 민족통일의 열망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영원한 우방이던 미, 일에 대한 경제적 감정으로 반미, 반일 감정이 일고 있고 남북한 통일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지역경제와 결부되어 남북한 경제교류협정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북한의 개방화는 멀지않은 장래에 다가올 것이라 예측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 국제질서의 전망은 첫째, 동서 냉전체제에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주도하던 미국 ․ 소련 초강대국의 위상이 쇠퇴하고 힘의 다극화 현상이 야기되고 있다.

 

국제정세의 대변혁이 민주화, 자유시장경제화 양상으로 변모, 전개됨에 따라 국제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역적 통합으로 경제 블록화 될 전망이다.

 

정치적 측면에서의 민족주의는 자체적으로는 통합운동으로, 대외적으로는 배타적 분리운동과 민족분쟁, 영토분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경제적 측면으로서의 경제 블럭화는 지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민족분쟁의 대표적인 예는 독립국가연합의 민족분규,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민족대립을 들 수 있고, 경제 블럭화는 유럽공동체를 들 수 있다.

 

유럽공동체(EU)는 이미 자유무역지대 설정, 관세동맹, 공동시장 등 경제통합 단계를 지나 정치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둘째. 냉전 시 국제적 외교무대에서 중시되었던 군사력의 중요성이 반감되고 점차 경제력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셋째, 냉전 시 이데올로기 대립의 결과로 파생된 제로섬(Zero-Sum)적 사고가 핵무기를 비롯한 무기체제의 발달로 더 이상 무한경쟁을 계속할 경우 자칫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자각과 더불어 상호공존이 협력적 사고로 전환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는 한반도 주변질서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과거 북한의 동맹국이며 일방적인 후원국이었던 중국 ․ 러시아 양국이 노선을 바꿔 한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대한반도 정책의 기조를 이념중시에서 경제중시로 전환하고 있는 점이 대표적인 실례라 하겠다.

 

이러한 주변정세의 변화는 독일이나 예멘의 통일사례가 분명히 입증해 주었듯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념적이고 군사적인 대결을 지양하고,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시키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동구의 각 나라들은 공산당 독재에서 벗어나 다당제의 정당정치와 의회 민주주의의 기초를 수용했으며, 다양한 소유형태의 인정과 시장경제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1989년 몰타에서 열렸던 미국 ․ 소련 정상회담, 그리고 1990년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 34개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합의 서명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은 냉전시대의 종식을 공식선언함으로써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 세계를 동서 양대 진영으로 나누어 놓았던 냉전체제는 해체된 것이다.

 

역사는 올바른 사관을 읽는 민족과 국가편에 항상 서 왔다.

 

오늘날 독일, 일본 등이 세계사에 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음은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내적 통합역량을 극대화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외적 흡수 및 영향력 확장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부터는 민족주체성을 갖고 남북관계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선하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부터 먼저 결속하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즉 지역감정, 계층 간의 불신,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 등을 종식하는 등 남한 내에서 먼저 민족적 통일을 이룩한 뒤에 남북한이 통일되는 것이 순서이다.

 

통일자체가 무조건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선이 아닌 것이다. 각각 상이한 체제에서 서로 다른 의식구조, 사고방식, 행동 및 생활양식을 갖고 살아온 남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해서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통일은 그 당위성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즉, 40여년의 긴 세월 속에 형성된 분단구조를 일시에 해결할 수는 없다.

 

독일의 통일도 20여년이 넘는 민족교류를 추진시켜온 결과였으나 서독경제력에 의한 흡수통일로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독일과 비교할 때 그 분단의 배경이나 성격뿐만이 아니라 남북한 양 체제의 특성으로 인해 직접적인 대비는 곤란하겠지만, 우리는 1991년 12월에 ‘남북한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도출하였다.

 

이 ‘기본합의서’는 독일의 ‘기본조약’에 비견되는 한반도의 분단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일노력을 기울이는 데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와 같은 시기에 분단의 비극을 안게 된 독일과 같은 경우에는 우리처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적도 없었고, 이미 1969년에 들어와 빌리 브란트정권은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을 통하여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공존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동․서독 기본조약으로 서독은 그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동독을 국내법적으로 인정하여 “1민족 2국가”라는 특별한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동독은 대외정책에 있어 소련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독일의 통일은 중립화와 주권 및 군사력의 제한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서독정부의 거부와 냉전의 심화로 결국 독자적인 사회주의국가 노선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민족 이론을 내세워 분리정책을 고수한 동독의 호네커 정부는 서독의 끈질긴 설득으로 1973년 9월에 UN에 가입하여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인적 교류를 늘려가면서 신뢰회복을 구축해 갔다.

 

이어 1974년 3월에는 상주대표부를 교환, 설치한 후 양국의 개방과 정치지도자의 접촉과 교류, 시민의 교류와 전화․통신이 급증하여 양 독 간의 정치적, 경제적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통일노력은 브란트의 말처럼 “지루하고 끝없는 대화”를 필요로 하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통일에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분단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통합논리의 기능주의적 접근을 택하여 경제교류, 인적교류, 문화교류, 스포츠 교류, 언론교류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에서부터 협력 체제를 증대시켜 나감으로써 통일의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우선 공동 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 형태는 결과적으로 ‘빵’을 요구하는 동독의 상대적 빈곤감이 체제를 압력하고 개방과 통일의 열기, 탈냉전과 유럽평화유지의 영향 등으로「2 민족 2국가론」을 정립하여 체제를 유지하려는 호네커와 강경파들이 축출되었다.

 

이어서 크렌츠가 총서기가 되어 정치국이 개혁파와 보수중도파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1989년11월28일 콜 서독총리는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서독의 통일정책은 독일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지원을 전제로 동독의 자유총선을 유도하고 계약 공동사회를 통해 공화국연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독일인의 통일의지를 국제사회에 확고히 천명하고 EU와 유럽안보협력회의, 그리고 평화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주변국을 설득하려 하였다.

 

한편 동독과 소련은 서독에 흡수 통합 가능성이 엿보이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독개혁과 통일문제에 대한 동서독의 쟁점이 부각되면서 소극적 반대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고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이후 1989년 12월 22일에는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브르크’문이 양 독의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서 베를린 시장에 의해서 개방되는 역사적 환희를 맞이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90년 1월 6일 통일의 전제조건이「안보2000」이라는 군축안이 제시되고 2월에는 모드로프의「4단계 중립화 통일방안」이 서독에 제의되었다.

 

이로써 동서독내의 통일방안은「1민족 1국가론」에 입각한 콜(Kohl)의 흡수통합방식인 급진적 통일방안과 중도개혁과 좌파의「1민족 2국가론」에 의한 점진적 통일방안으로 대별되어 전개되어 나갔다.

 

그러나 1990년3월18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조기 통독을 주장한 기민당이 높은 지지율을 받자 기민당 주도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고 이어 논란을 거듭해온 동독 ․서독의 통일방법에 대해 급속한 재통일방식을 동독의회가 채택하고 서독 기본법에 의한 통독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사실상 흡수통일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경제 ․ 화폐통합에서 전 독일의 자유총선거와 1990년 10월 3일에 ‘서독의 동독흡수’에 이르는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