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위기관리_한반도통일전략과 동북아시아의 운명 (Mr. Jung-Sun Kim)_(11-13)

 

 

목 차

 

1. 동북아 안보전략 환경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2. 동북아의 대한반도 위협요소 평가

3. 한반도 통일전략과 동북아 경제 블럭화

 

 

3. 한반도 통일전략과 동북아 경제 블럭화

 

 

최근에 통일을 이룬 예멘의 경우를 비롯하여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는 중국의 경우와 이미 오래전에 통일된 오스트리아와 베트남의 경험을 분석하여 한반도의 통일 환경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1945년8월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당 ․ 공산당 합작을 잠정적으로 유지해오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투쟁은 급속하게 표면화 되면서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1949년 5월에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물러나게 되고 10월에 공산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어 분단되고 말았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1국양제론”이다.

 

즉 한나라가 그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그 나라의 일정한 지역에 주제도(Main system)와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채택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지역의 지역정부는 지방정부들로서 국가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중국 통일정책은 현재 대륙에 이 씨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정부는 통일문제 접근에 있어서 내외적 여건이 전혀 대등한 위치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중국을 대표하는 주권정부가 되는 것이며 홍콩과 대만은 특별 행정구로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당분간 유지하는 정치적, 경제적 자치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정책은 완벽한 단일국가체제도 아니고 연방제 성격도 아닌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대만정부의 입장은 그들이 중국의 정통정부이며 공산주의는 포기되어야 하고 국민당 ․ 공산당 합작의 예로 보아 일국양제론의 제의는 결국 위장평화공세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제의를 일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만정부가 주장하는 정책은 일국양정부체제로서 하나의 국가에 두개의 정부를 두어 내정과 외교를 분리시키고 외교활동과 국방관계에 있어서 상대방 정부에 간섭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통일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갈등, 대립의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 이해와 불간섭의 원칙을 준수하려는 것이다.

 

분단된 국가에서 통일을 목적으로 잠정기간 동안 평화적 경쟁을 통하여 일정한 통일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한다면 어느 면에서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대만정부는 최근까지 3불 정책(불 접촉, 불 담판, 불 타협)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점차 3화 정책(평화공존, 평화경쟁, 평화통일)으로 대체 전환되고 있는 것이 일국 양 정부 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점진적 전환으로 보고 있다.

 

둘째, 오스트리아는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천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 ‘오스트로-마르크시즘’을 표방하던 사회당계가 심한 갈등을 보이면서 시민전쟁을 일으키는 등 첨예한 대결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합방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 패전국의 하나가 되어 4대 강국의 분할 통치하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서로 갈등, 대결 상황에 있던 보수, 진보세력들이 그동안 겪었던 시민전쟁에 대한 반성과 치욕적인 히틀러 나치폭정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극한적인 내적 이념투쟁을 버리고 오스트리아를 위협하는 외부 이데올로기 세력인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응하여 민주주의 수호와 획득을 제1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당 지도자들은 그들은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투쟁적 성격이 강했던 사회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오스트로-마르크시즘에서 크게 후퇴하여 인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표방하게 되었고 종교에 밀착되어 보조적이었던 국민당도 국민정당으로 과감히 변신하면서 오직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독립과 분단 상황의 극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오스트리아의 국민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동구를 적화시킨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를 공산화 시키겠다는 소련의 의지를 일축해 버렸고 소련은 오스트리아를 서방 세력으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으로 통일되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통일의 성공요인은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위치, 당시 국제적 환경 등의 작용도 부인할 수 없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고 민주 ․ 자유국가를 건설해야 하겠다는 정치 지도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국민적 합의와 오스트리아인들의 슬기와 끈기가 이룩해 놓은 결과로 본다.

 

셋째, 베트남은 프랑스의 오래 식민통치를 받았고 일본군에 의해 국가의 체제가 붕괴되고 포츠담 협약에 따라 북부 베트남에는 중국군이 남부 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고 미국의 참전과 미국의 철수도 끝이 나는 등 매우 복잡한 국제관계에 얽혀 있어서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외세에 의한 식민지, 분단, 이데올로기의 대립, 동족 간의 전쟁 등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오랜 프랑스의 수탈과 착취 위주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경험에 의해 베트남인들에게는 반자본주의, 반 식민주의, 반외세의 성향이 뿌리 박혀 있었으므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주장하며 반 프랑스 식민주의와 투쟁에 앞장선 호지명의 공산주의 세력이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남부 베트남의 지도자들인 바오다이, 고딘디엠 등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 식민세력과의 연계아래 수립된 정부로 인식되어 대다수 베트남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지명은 하노이에 수도를 정하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위해 베트남의 지리적,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베트남의 지하세력인 베트콩을 동원하여 베트남 내부의 불안을 조성하였다.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주효하여 농촌지역을 독립화 시키는 등 베트남 정부의 행정력을 농민층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60년대 후반에는 영토의 반 이상이 낮에는 사이공 정부가 통치하고 밤에는 베트콩이 지배하는 형태를 빚어내기도 하였다.

 

베트남인들의 오랜 식민주의 정치체제와 지겨운 전쟁경험에서 비롯된 이기주의, 기회주의적 성향은 각종 비리와 분열의 요소가 되었고 종교계의 갈등, 군 지도자들의 반목과 알력, 민간 지도자들과 군 지도자들 간의 갈등, 베트남 민족과 소수 타민족과의 잦은 마찰 등이 국가안보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을 자아내게 되었다.

 

결국 1975년 국내정치의 혼란에 편승한 베트콩의 게릴라 활동과 북부 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이 엮어낸 전형적인 내우외환 적 사례의 공산화 통일로 39년간 외세가 개입된 내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을 때 통일논의는 고사하고 패망의 지름길이 된다는 커다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넷째, 아라비아반도 남단에 위치한 예멘(Yemen)의 분단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이 터어키에 점령되어 그 지배를 받게 된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1918년 전승국인 영국은 패전국인 터어키로 부터 예멘을 불리, 북예멘만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남 아라비아 연방에 편입시켜 지배해 왔다.

 

이후 북예멘은 영국의 보호조약 아래 이슬람 종작들이 통치하는 반봉건체제를 거쳐 왕정을 실시하다가 1962년 군사 쿠테타로 공화제로 전환, 이른바 ‘예멘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남예멘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북예멘에 통합되지 않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을 도입, 중동 유일의 사회주의국가가 되었다.

 

북예멘이 비동맹 중립정책을 표방하는 보수 이슬람 국가로서 쿠테타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남예멘은 독립직후 소련과 군사 및 기술 원조 협정을 맺는 등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출범, 근대적 개혁정책을 펼치며 사회주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남 ․ 북예멘은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통일의 주도권 다툼을 계속해 왔다.

 

양측 노선의 차이, 이해대립 등 갈등관계 속에서 국경분쟁과 충돌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양 정부 당 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면서 통일논의를 활발히 전개해 왔다.

 

1972년9월 양국은 국경분쟁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나 아랍연맹의 중재로 충돌 1개월 만에 카이로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양국의 정상은 11월 트리폴리(Tripoly)에서 회동하여 통일국가수립에 합의하였다.

 

이 정상회담에서는 국명을 예멘 공화국으로, 수도를 북예멘의 수도인 시나로, 국교를 회교로, 국어를 아랍어로 할 것, 그리고 양측의 통일실무위원회의 구성 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이 합의는 1973년 다시 국경분쟁 발생과 1974년 친 사우디아라비아 경향을 가진 함디(Ibrahim al-Hamdi) 정권의 등장으로 진척을 보지 못했다.

 

이후 1977년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되었으나 북예멘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양국 간에 지속되어온 국경이 전면전으로 비화되어 통일의 기운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 내전도 아랍연맹의 중재로 양국이 휴전에 합의하고, 휴전협상 차 만난 양국은 통합원칙에 또다시 합의하게 되었다.

 

1978년 국내문제 1979년 재 국경 분쟁 등으로 양국관계는 악화되었으나 무력분쟁의 극한 상황을 계기로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북예멘의 살레(Ali Abdullah Saleh)정부와 남예멘의 무하마드(Ali Nasser Muhammad Hosni)정부가 모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통일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81년11월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방문함으로써 예멘통일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1982년 1월 양측은 전문 136조로 된 통일 헌법 초안을 채택, 국호, 입법부 및 행정부 구성 등에 관해 확정하였다.

 

1983년 8월 남북예멘 통일헌법 초안 심의, 그러나 1986년 남예멘에서 친소 강경파 주도의 쿠테타가 발생, 무하마드 대통령이 실각 북예멘으로 도피하고 알 아타스(Haidar Abu Bakr al-Attas) 대통령이 집권함으로써 통일 열기는 다시 냉각기를 맞이하였다.

 

1986년 내전종료와 함께 양국정상은「가다피」의 초청으로 리비아에서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 1988년5월 남북예멘 간 여행규제 완화 합의, 1989년11월 여행규제 완전해제 등의 통행자유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서신교환, 국제전화와 팩시밀리의 상호 송수신 허용에 이어 개인의 자유왕래까지 확대 되었다.

 

결국 남예멘의 사회주의 법률이 폐기되고 다당제를 허용, 북예멘에 대한 국경개방조치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구소련의 개방 ․ 개혁정책과 탈냉전의 국제정세에 강한 영향을 받아 결국 1989년11월 30일 아덴의 정상회담에서 예멘연방이 선포되고 정치 ․ 외교통합을 이루는「통일헌법초안」에 합의서명을 하였다.

 

이어 1990년 1월과 3월 양측은 공동 각료회의를 잇따라 열어 세금, 은행, 여권, 재외공관 등 정부 및 공공기관 조직 법안을 승인하고, 5월20일 군 통합이 발표되었으며, 1990년5월22일 통일예멘국가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예멘의 통일과정은 제1단계 통일협상단계(1972. 11 -1989. 11.30), 제2단계 통일교섭 단계(1989.11.30-1990.5.22), 제3단계 통일과도기(1990.5.22-1992.5.22)로 구분될 수 있다.

 

결국 통일된 예멘은 외형적으로는 무력에 의한 일방적 통일의 베트남의 경우와 국력이 강한 체제가 약한 체제를 흡수하는 통일 독일과는 달리 쌍방이 거의 동등한 지분을 나누는 균등통합방식이었다는 유례없는 형태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28년 동안의 꾸준한 접촉의 결과라고 할 수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만 내적으로 볼 때 예멘의 통일을 말 그대로 ‘합의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멘의 경우 합의란 정권세력간의 쌍방의 이익에 의한 합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합의, 즉 국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는 어떠한 형식과 과정, 환경조건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결국 지금의 예멘과 같이 전쟁으로밖에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합의 측면은 통일의 합의, 즉 총선에 의한 국민적 합의가 더욱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예멘에서는 3가지 정도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첫째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문제점으로, 통일과정에서 형식상으로 1:1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북예멘 위주의 흡수통합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일 예멘이 과거 북예멘의 국기, 국장, 국가를 채택하고 권력배분에서 대부분의 요직을 북예멘이 차지한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잠재적 불평등 관계 속에서 남북예멘의 야전군은 통합되지 못하였고 기존의 군 배치와 동일하였기 때문에 총선에서의 인구가 적은 남예멘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둘째, 경제적인 부분으로서, 석유수입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리라는 낙관적인 기대 때문에 남예멘지역의 국유와 기업과 토지를 사유화 하는 과정을 너무 과소평과 하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걸프전 당시 예멘이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미국 등은 연합군을 지지하지 않은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철회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제난과 실업난이 급증하게 되었다.

 

셋째, 사회적인 측면이다. 남북예멘은 각각 사회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즉 부족세력과 같은 봉건체제 적 집단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요인은 비록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등의 긍정적인 기능도 하였지만 통일 후 이슬람정신이 사회통합의 기조가 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길들여졌던 남예멘의 정서와 많은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를 통일정부는 적절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문제점 때문에 예멘은 결국 다시 내전이라는 더욱 악화된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멘의 통일과정에서 국민적 합의 의사가 없이는 다시 분열될 수밖에 없음을 가장 절실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