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워(War) 게임_(Mr. Jung-Sun Kim)_(3-12)

 

 

1. 군사전략의 개념

2. 한국의 군 구조 실태와 문제점

3. 예상되는 한국군의 작전술

4. 전쟁과 군비통제 항공강압 및 해군전략

 

 

1. 군사전략의 개념

 

 

전장의 광역화와 살상력의 증대가 경합해온 20세기에 들어와 전쟁은 다시 한번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여진은 한반도, 베트남 뿐 만 아니라 중동까지도 파급되었다.

 

1949년에 휴전한 제1차 중동전쟁 후, 이집크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와 관련하여 영국, 프랑스 및 이스라엘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가 1956년 10월 말에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로 진격하였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수에즈운하 북단에서 헬리콥터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이집트군은 약체로 밀리게 되자, 이에 놀란 소련은 핵무기 사용을 불사한다는 강경한 태도로 영국과 프랑스에 정전을 요구하자, 미국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급진전되어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래서 이집트는 위기를 모면하였고 운하의 국유화가 성취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악몽(Nightmare)은 지상군의 기동방법을 변화시킴은 물론 발전방향을 모색토록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어력을 압도하는「공격력」의 향상이 전제조건이 되었다.

 

즉 난공불락의「기관총+유자철조망+참호진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기본적인 과제였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전차요 항공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기는 처음에는 단순히 기관총 진지를 극복하기 위하여 구상되었으나,「풀러」,「리델하트」등에 의하여 장갑화된 기병개념으로 운용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무기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공격력을 압도하게 되자 전선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방어진지는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었다.

 

군은 이제 기계화의 추세에 따라 기민성을 갖게 되었고 고도의 기동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군의 기동은 먼저 상대보다 압도적인 부대화 화력을 집중, 적의 방어진지에 틈(Gap)을 만들고 틈을 신속히 확대한 후 적중으로 종심 깊게 전진하여 적 방어진지의 유기성을 파괴하여 굴복시키는 기동방식이 대두되었다.

 

이제 기동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적진에 간격을 만들어 돌입(Break-in)이용, 돌파구를 신속히 확대하는 돌파(Break-through), 돌파된 진지를 종심 깊게 진출,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는 돌진(Break-out)의 3단계 공격방식이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동방식은 2차대전시 독․불전 초기 전투인「프란더즈」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시기에 다시 공격적 전략이 수세적 전략에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동방식에 대하여 당시 오스트리아군이나 프러시아, 러시아군은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태리 전역(戰役)에서는 피에드몽트 군과 오스트리아 군을 정면공격으로 고착시킨 후 약한 측익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드몽트 군을 분리시켜 격파하는 기동을 보여주었고, 울름 전역에서는 정면공격과 포위공격을 연결하는 절묘한 기동을 보여 주었으며, 예나 전역에서는 분진합격에 의하여 상대방을 분산시킨후 집중하여 정면과 측방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공격방법을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조직은 그후 프러시아 군에 전수되며, 현대적인 참모제도로 계승 ․ 발전되었다.

 

그러나 군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성장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시기이다.

 

왜냐하면 1차 대전 중반이후 나폴레옹식 기동 방식의 유용성이 서서히 감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방어력의 공격력 압도현상은 러일전쟁 시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남북전쟁 시 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기관총은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실 나폴레옹이후 크라우제비츠의 절대전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일, 프랑스 등은 공세위주의 전략사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독일의 몰트케, 슐리펜 등은 크라우제비츠의 수제자로서 공격위주의 군사사상을 형성시키는 주역이었다.

 

거기에다 보․불, 보․오 전쟁에서의 승리는 독일군에게 공격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게 하였던 것이다.

 

프랑스도 공격위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듀피크, 포슈 등이 프랑스군의 공격중심사상 형성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사상의 기류와는 역행되게 1953년 5월 북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전쟁 역시 프랑스군의 화력에 대항한 북베트남측의 백병전에 의한 대결에서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전장을 옮기려는 북베트남군의 기도를 예견한 나머지, 라오스에 이르는 요충지인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를 점령하고 요새화함으로써 북베트남군을 원격지에서 포착 섬멸하여 전세를 일거에 만회하려 했던 바, 다음과 같은 4가지 계획을 구상하였다.

 

첫째, 북베트남군은 보급력이 빈약하므로 근거지에서 수 백 킬로미터 나 떨어져 있는 대부대에 대한 보급이 곤란하지만 프랑스군은 공수보급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다.

 

둘째, 디엔 비엔 푸는 분지라 주위의 능선으로부터 중심의 활주로까지가 5킬로미터 이상 되는 바, 열악한 북베트남군이 비행장을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만약 북베트남군이 능선내부로 들어오면,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폭격으로 섬멸한다.

 

넷째, 디엔 비엔 푸를 근거지로 하여 분지의 안팎을 기동부대에 의해 수 십 킬로미터에 걸쳐 기동작전을 전개한다.

 

이리하여 1953년 11월에 프랑스군은 보병12개 부대(약 1만6천명)로 비행장을 중심으로 반경 1.5킬로미터의 요새화된 전면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현지 주민에 의한 병력충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본국으로부터의 증원도 불가능해짐으로써 처음부터 병력의 열세함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제네바회의가 시작되는 날인 1954년 4월26일을 기하여 북베트남군은 3개의 경보병사단과 1개의 중 보병사단을 디엔 비엔 푸에 투입하였다.

 

당시 각 사단은 디엔 비엔 푸에서 1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수많은 노무부대, 마필, 나룻배, 자전거 등으로 예상외의 진격속도로 공격대기지점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의 주 화력인 105밀리와 75밀리 야포는 주변 고지 후사면의 암반에 지하진지를 구축하여 비행장을 집중 포격하였으나 프랑스군은 반격을 가하지도 못하였다.

 

55일간의 격전 끝에 고립무원 상태에서 화력에 제압당한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말았다.

 

둘째는, 군 규모의 성장이다. 산업혁명 제2기 이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국가의 재정이 증가되자 무기생산을 싼값에 대량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이제 모든 국가가 징병제를 실시하게 됨에 따라 군대의 규모가 거대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군은 선(線)의 단계에서 면(面)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즉 군대는 이제 전면과 종심을 전체적으로 커버할 수 있을만큼 증가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증가된 화력, 기관총의 위력은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나폴레옹」식의 측익탐색(Out flank)에 이은 돌파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전장이 곧 전선이 되어 측익을 탐색, 포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슐리펜의 웅대한 대 포위전략 계획은 피아간의 측익탐색(Out flank)의 경쟁 속에서「마르느」일대에서 종료되었다.

 

리델하트는 이러한 현상을 「Race to the Sea」(해안으로의 경주)로 표현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지 못해 전선은 알프스에서 도버해협까지 연장되었으며 교착되었다.

 

이제 전장에서 기동은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작전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만 누가 얼마나 더 많은 화력을 쏟아 넣느냐의 경쟁으로 전쟁양상은 변화되었다.

 

전투가 곧 전쟁이 되었고 「장수의 도」는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전선은 교착되고 무모한 돌격의 연속 속에서 대량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비극적인 전쟁이 되었다.

 

이시기에는 공격 전략이 수세전락에 압도되었다.

 

이는 주로 화력의 획기적인 증가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기관총은 방어력을 증강시키는 획기적인 무기가 되었다.

 

전쟁은 정부의 전쟁에서 국민의 전쟁으로, 군인들만의 전쟁에서 전 국민의 전쟁으로, 군사적 영역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복잡화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 2차 세계대전과는 군사적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러한 현실은 무기체계의 발달, 특히 항공기, 전차의 발명에 따라 파괴력의 엄청난 증가로 신속한 기동력과 화력의 증가로 전술적으로는 기동전, 단기전의 양상을 기대할 수 있으나 전략적으로는 소모전, 장기전, 총력전의 양상을 띄었다.

 

특히 지상군의 기계화추세는 가속화되어 일반화되고, 방어적인 측면에서 대 기갑, 기계화능력이 변증법적으로 병행, 발전되고 있다.

 

항공력이 전쟁의 일개차원을 더하면서 전쟁을 완전히 입체화시켰다.

 

2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게 발전된 두 가지 사항은 항공력의 획기적인 발전과 전차 및 대전차무기의 변증법적인 발전이다.

 

항공력은 2차 세계대전 육군의 부속부대로 출발하여 전투에서 독립된 군으로 성장하였다.

 

항공기는 이제 항속거리에서, 폭탄 적재능력 면에서 정확도면에서 2차 세계대전의 수십 배로 성장하였다.

 

육군항공의 발전을 심프킨은「회전익 혁명」(Rotarg Revolution)은 특별한 의미라고 지칭하면서 기계화 부대 발전의 과정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회전익 항공기 역할의 증대는 현실적으로 볼 때 제 2차 대전 이후 발발된 3, 4차 중동전에서 그 가치가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