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2/100회_혁명의 끝.

 

 

제 2 장 공산화 이념의 어제와 오늘

 

 

제 1 절 마르크스-레닌주의란 무엇인가

 

소련 정치문화의 특성은 한마디로 전체주의적 독재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소수 공산당 엘리트가 대중을 동원하고 조종하며 대중의 적극적 참여와 지지를 요구하는 소련의 독재는 대중의 적극적 참여 여부를 고려함이 없이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던 전통적 일인 독재나 왕조적 전제와 구별하는 의미에서「전체주의적」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레닌(V. I. Lenin)은 노동자 계급을 위하여 정권을 탈취한 후「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고 공언하였는데, 이 독재는 다수파(Blosheviki ; 노동자 및 그 협력자)가 소수파(Mensheviki)를 지배하는 체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란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소련연방 국가기관 그리고 정부의 조직과 영이 이론적이거나, 법률에 의하거나, 실제 면에 있어서 전적으로 소련공산당의 주도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소련정치체제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원칙을 전제로 소련 정치체제에 있어서 당은 권력의 최고수 부이자 정통성의 상징이며 체제내의 요구가 집약되어 처리되는 중심적 기관이다. 다시 말하면 이론상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가를 최상으로 하는 소련 정치조직이 당에 의해 일원화되어 있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 집단 등에 의하여 타당한 요구가 표출되기는 극히 힘들다. 따라서 이 표출 기능의 주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 기관과 내각의 각 부처 및 그들의 예하기구들이 담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대중의 여론이나 이익집단의 요구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대외정책의 경우 광범한 정보를 집하고 분석하여 밖으로부터의 요구를 독점적으로 표출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TASS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혁명 초기 당시부터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그들이 표방하였던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선전하는 반면 혁명의 성공적 수행과 자위책을 위해서 중앙 집권적인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상반된 문제에 부딪쳤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레닌은 “우리 공화국에서 국가 기관에 의하여 결정되는 중요 정치문제나 조직문제의 어떠한 것도 당 중앙위원회의 지침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당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전제적으로 집행된다는 식의 민주적 중앙 집권주의라는 표어를 내걸고 레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치에서 실제로 나타난 것은 바로「중앙집권주의」이다.

 

이론상으로 마련된 중앙집권적 원리는 일사불란한 통일성과 기율을 강조하고 있다. 소수는 다수에 양보하여야 하며, 하급 당 기관들은 무조건 상급기관들의 결정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적인 참여의 측면에서 본다면 또한 당원들이 당에 관한 제반 사항에 관해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다는 것과 이들의 의견이 상부에 도달되어 결과적으로 당의 정책결정에서 종합되고 조화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곧 소련의 정치문화는 위로부터 창조되어 사회에 뿌리 깊게 침수되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울러 공산당의 소수엘리트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창조되는 제 가치를 전체 소련인의 가치로 화하기 위하여서는 위협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대중의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대중이 복종과 충성심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보일 때 독재는 「민주적」이란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최고의 독재자는 그의 동조자들을 권력의 중심부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소련 정당체제에서 독재를 영구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체주의적 독재는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유형화된 과정에 준거하여 접근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소련 정치체제가 어느 때 어느 상황 하에서라도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소련 정치의 기본단위가 무엇이냐 하는 데는 먼 러시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비잔틴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한다.

 

슬라브(Slav)민족이 7세기에 러시아 땅에 정착하여 키에프(Kiev)공화국을 건립한 이래 최초의 정치적 영향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았다. 러시아는 이 비잔틴을 통하여 케사르(J. Casar)의 개명인 황제 칭호 쯔아(Tsap)를 상속 받았으며 케사르-파시즘으로 알려진 특수 비잔틴 기독교의 영향 하에서 법황과 황제의 권위가 동시에 쯔아의 권위에 융합되는 신황 제도를 답습하였다.

 

1234년으로부터 1460년까지 계속된 몽고-달단의 지배 또한 비잔티움에서 답습한 전제적인 정치적 기질을 더욱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서구와의 접촉에서 절연시키고 사회 및 경제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구에 비하여 러시아의 정치 • 경제 • 사회의 발전 속도를 무려 2세기나 뒤떨어지게 한 이 몽고-달단 지배는 러시아인에게 전제정치의 세련, 권력집중, 후진이라는 숙명적인 전통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후일 지배자들의 강제적인 노력 등을 유산으로 남기었다.

 

밑으로부터의 혁명 감정도 또한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기 오래전부터 러시아 사회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최초로 인민의 지배를 받고 이룩될 혁명은 1564년 이반 공포제에 의하여 수행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고, 이보다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1825년의 이른바「12월 반란」이었다. 12월 봉기는 쯔아 근위대의 순박한 젊은 장교들에 의한 미완성의 궁전 혁명으로 이들은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이론에 고무되어 전제정치를 러시아 발전의 주된 장애물로 간주하고 이를 타도하려고 공동의 궐기를 하였던 것이다.

 

12월 봉기는 새 황제 니콜라스 1세에 의하여 좌절되고 러시아는 반동과 억압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이 반란은 많은 혁명 운동과 테러집단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1861년 자유주의적인 의식을 가진 황제 알렉산더 2세에 의하여 농노제도가 폐지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의 지성인들과 대학가는 점점 프랑스혁명 또는 피히테, 칸트, 쉘링 및 헤겔과 같은 이상주의적 철학,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고무되고 있었다.

 

이들의 저항운동은 주로 나로드니크(인민당원들) 운동에서 정치적 조직으로 전환되었는데 이 운동은 직접 농민에게 파고들어 현 쯔아 질서에 반항하라고 선동하였다. 물론 농민들은 이 계획에의 적응에 실패하였지만 나로드니크 운동과 같은 견지에서 1905년의 혁명과 그로부터 12년 후 1917년 공산주의 혁명들 역시 그와 연관된 선례가 없이 독립적으로 발발한 것이 결코 아니며 쯔아 통치 천년을 두고 누적된 증오, 고통, 저항력, 그리고 승화된 기대 등 갖가지 요소들의 종합적 폭발이었다. 쯔아의 절대권을 제한하려는 저항은 러시아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견지에서 볼 때 이론적으로 소련이 내세우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기본적 이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과정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이고, 불가변론 적이어서 이「과학적」인 논리에 의한 역사적 요구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힘과 전통의 유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명확히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철학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누적된 서구철학의 한 유산이며,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는 19세기에 감행하던 많은 철학 및 정치이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내용엔 다섯 가지 요소가 혼합되었다.

 

첫째는 헤겔로부터 영향을 받은 역사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이념 또는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밝혀냄으로써 지적 및 사실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역사 및 사회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역사적 유물론으로 발전시키었다.

 

둘째는 마르크시즘의 계급투쟁 개념이다. 즉 역사적 변증법에 힘을 주는 연료는 계급투쟁이 만들어 낸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잉여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 됨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에 의하여 착취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계급 간의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은 혁명에 의하여 해결되며, 자본주의는「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존재하는 최종의 역사적 사회라고 그는 주장했다.

 

셋 번째 요소는 경제적 결정론에서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 질서가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어 그 위의 사회적 • 정치적 • 윤리적 및 법적 「상부 구조」의 성격을 결정하고 있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경제 질서는 변증법 원리에 따라 자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구질서를 옹호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과 신질서를 원하는 자들 사이에 계급투쟁을 통해 낡은 계급은 타도되고 새 계급이 군림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적 기반이 변할 때 본래의「상부 구조」는 무너지고 새 질서에 일치하도록 순응한다고 보았다.

 

넷 번째 요소는 프롤레타리아혁명론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자본가 계급의 수는 점점 증가하고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빈곤해지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이익을 위해 자본주의 지배계급을 타도할 역사적 사명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먼저 일어날 것으로 예언하였다.

 

그러나 레닌에 이르러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그의 혁명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각도에서 합리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후진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원했던 레닌은 자본주의가 러시아에서 충분히 성숙할 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당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그 발전의 길에 접어들자마자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섯 번째 요소는 국가이론이다. 즉 마르크스와 레닌 모두에게 있어 국가는 계급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국가는 지배적 경제계급의 도구이며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이상사회가 건설될 때 국가는 소멸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를 이용하듯이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권력을 잡을 때 노동 계급에 봉사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개념이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