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3/100회_혁명의 끝.

 

 

제 2 절 소련 공산화 이념의 역사적 배경

 

1. 제정 러시아 시대 이후~

 

러시아의 역사는 징기스칸(Ginghis Khan)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바투(Batu)에 의하여 서진이 시작되어 진군에 방해가 되는 것을 모조리 불사르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방비가 없는 러시아의 평원을 석권했다. 러시아는 이로부터 약 240년 간 몽고(Mongo)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몽고인의 지배는 러시아의 절대 군주주의와 군주주의에 뿌리를 남겨 놓았으며, 서구에 비해 러시아의 발달을 2세기 가량 뒤로 미루게 했다.

 

16세기 중엽 모스크바의 대공 이반 3세(Ivan III, 1462~1505)에 의하여 몽고의 지배를 물리치고, 1917년 로마노프 왕조가 혁명에 의하여 무너질 때까지 서구는 문예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 등으로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노프왕조의 기초를 닦고 강대국을 형성하게 된 것은 피터 1세(Peter the Great, 1682~1725)이다. 그는 우선 낙후된 사회를 향상시키려고 서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서구의 과학, 군사, 행정제도 등을 도입하고 대학과 정규군을 창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로마(Roma)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에서는 국어와 문자가 라틴어였고, 국교는 로마 가톨릭 인데, 반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에서는 국어와 문자가 그리스어였으며, 이러한 동로마 제국의 문명으로부터 러시아어, 러시아문학, 러시아종교 등이 나왔다.

 

대외 정치적인 면에서는 스웨덴과 전쟁을 일으켜 발틱 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청나라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외흥 안령 일대를 새로운 영토로 삼았으며, 낙후된 산업을 육성키 위해 많은 공장 등을 건설하고 상인들에게는 구매의 특권을 주고 공장이 팔릴 때에는 공장 노예도 함께 팔 수 있는 등의 정책을 펴 새로운 계급이 출현했다.

 

피터 대제는 서구화에 매료되어 많은 혁신을 단행하였으나 이 혁신으로 인하여 공업화를 위한 특혜 정책에 있어서 대규모의 노동력은 노예제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역행하는 농노제를 더 한층 강화하였다. 이것은 러시아에 있어서 근대화 초기부터 상류 귀족계급과 하층농노계급의 확대의 발상에 씨앗을 뿌려 놓은 것이 되었다.

 

피터 대제가 죽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캐서린 2세(Catherine II, 1762~ 1796)가 위를 계승한다. 이 여자는 원래 본명이 소피아이고 프러시아 장교의 딸로서 15세의 나이로 러시아 황실에 들어와 러시아 정교의 입교하여 황태자 피터와 결혼하여 황녀가 되어 황제 피터를 음모 살해하고, 그녀 자신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황제가 된 그녀는 서구화 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볼테르(Voltaire), 디드로(Diderot)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러시아 귀족 상층부에 서구 문화를 깊숙이 받아들여지게 하고, 사법, 행정 등은 모든 귀족에게 일임하여 자유농민과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는 등 일대 혁신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자유화의 물결에 따라 궁중 문화내지 귀족문화는 엄청난 경비가 필요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업종과는 반대로 궁중의 낭비를 메꾸기 위해 농노제를 더욱 강화시켜 새로운 농노가 100만을 넘어 기존 농노와 합쳐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노로 전락하게 되고 이들 농노의 생활은 짐승에 가까운 상태이었다.

 

이러한 상태를 참다못한 농노와 농민들은 드디어 1773년 프카초프(Emelyan Pugachev)의 반란이 우랄지방 코삭크(the Cossacks of the Ural)를 중심으로 일어나 프카초프는 자칭 피터 3세(Peter III)라고 칭하면서 오렌버르크(Orenburg)지방을 점령하고, 모스크바에서 급파한 1천 5백 명의 정부군을 격파하면서 북쪽으로는 바쉬키르(Bashikir) 지방을 석권하고, 이어 카잔(Kazan)시를 불사르고 서쪽 볼가(Volga)강 연안으로 진격하여 수도를 위협하게 이르렀다.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는 프카초프를 중심으로 한 용맹한 코사크인의 반란은 농민과 농노에 호응을 얻어 반란이 농민전쟁(Peasant War)으로 성격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 앞에 다급한 캐서린은 당시의 최고 명장으로 터키전과 폴란드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를 급히 불러들여 1775년1월 겨우 반란군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프카초프는 잡혀 사형에 처했으나, 이 농민전쟁은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항상 농민을 두려워하는 교훈을 남겨놓았다.

 

이와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알렉산더 1세(Alexander I, 1801~1825)는 자기 나름대로 전통적 정치체제의 기반에 흔들림이 없이, 새로운 시대의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노예제를 증오하면서 세습군주제에 반대하는 등 그의 통치는 비교적 자유주의사상을 가지고 공화주의적 정신을 토대로 자유주의원칙에 대한 찬양을 표명할 줄도 알아 러시아를 위해 성문헌법을 제정한다는 생각까지도 지녀 성문 헌법에 대한 시도를 여러 차례 해 보았다. 즉, 1809년 스페란스키(Mikhail M. Speransky)가 매우 거창한 헌법 초안을 마련한 것도 알렉산더 1세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그 문서는 오늘날 러시아 정치사상 중 가장 귀중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헌법이 완성되지 못하고 문서로서만 남게 된 원인은 알렉산더 자신이 자유주의 사상과 전제주의 사상 둘 다에 대한 존경의 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주의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헌법을 원하였기 때문에, 즉, 자유와 전제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성문 헌법의 탄생을 두려워했다. 또한 알렉산더 1세는 유럽의 모든 혁명 세력을 탄압키 위해 1815년9월 신성동맹(Holy Alliance)을 제창하여 당시 영국의 섭정, 로마 법왕, 터어키 황제를 제외하고는 전 구라파의 군주가 참여하여 크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해 서로 돕고, 신앙, 평화 및 정의의 구현에 노력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보수반동 세력인 비인 체제를 옹호하자는 것이었다. 즉, 그의 정책의 근본 지침은 러시아 안팎에서 정통주의 원칙을 완강하게 수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체제의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고 현실을 개혁하겠다는 알렉산더 1세의 생각은 하나의 유토피아였다.

 

한편 구라파에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 당통(Jacques Danton, 1759~1794),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cois Marie Isiodore de Robespierre, 1758~ 1794) 등이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으나, 마라가 암살되고, 당통을 숙청하여 로베스피에르가 명실상부한 자코뱅(Jacobin)의 단일 지배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794년7월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1795년 새로이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동안 혁혁한 무공으로 두각을 나타낸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 1769~1821)이 구라파전쟁을 일으키자 알렉산더 1세는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 연전연패하여 1807년 탈지트조약(Treaty of Tilsist)을 체결하고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Continental System)을 받아들였다.

 

후에 대륙 봉쇄령을 깨자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전에 나섰으며, 이 나폴레옹 침략에 대항하는 황제군은 초토전술로써 나폴레옹 침략군을 물리쳤다. 이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는 러시아 민족은 물론 알렉산더 1세의 위신은 천하를 찌를 듯 했고 구라파에서 러시아가 강국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 마무리를 결산하는 회의가 비엔나(Congress of Vienna)에서 열렸다.

 

알렉산더 1세는 위대한 군대라고 자랑하던 나폴레옹 원정군을 격파함으로써 해방자로써 자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옛 폴란드령 전부를 획득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핀란드를 영유하여 스웨덴을 억제함으로써 발틱해에 진출하였고 더욱이 남쪽으로는 벳사라비아(Bessarabia)를 합병하여 중동에 진출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확실히 나폴레옹 전쟁은 이 거대한 대륙에 혁명의 씨앗을 남겨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알렉산더 1세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에는 이겼지만 국내재정은 압박당하여 오히려 점점 더 반동화하고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 출전했던 청년장교들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이 이룩한 성과와 그에 따른 인권존중 및 자유주의 사상과 입헌제도에 감명을 받았다. 또한 체제개혁에 대한 초기의 정부 측 시도가 하나의 시도로 끝난데 대한 실망으로 이들 젊은이들에게는 점차 반동화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 했다.

 

알렉산더 1세가 점유지인 폴란드와 핀란드에서는 입헌 체제를 유지하면서 본국인 러시아에서는 전제 체제를 고수하려는 알렉산더 1세의 태도에 대해 이들 젊은 장교들은 적개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이들 청년장교들은 군대 내에서 파스텔(Pavel Pastel)대령 등이 주동이 되어 비밀결사를 만들고, 1825년12월 알렉산더 1세가 서거하자 그 혼란한 시기를 틈타 왕위에 오른 니콜라이 1세(Nicholai I, 1796~1855)가 등극하여 12월 반란을 진압시켰다. 이것을 12월 장교단의 반란(Decembrist Revolt)이라고 하는데 이들 반란 장교들은 공화제, 토지국유화, 농노철폐, 계급차별 반대 등을 내세워 궐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이 혁명의 악몽에 사로잡혀 국정에 대한 선의에 비판까지도 탄압하여 니콜라이 30년 집정기간 중 전제정치는 최고의 권위를 확보하고 그 권력에 도전해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콜라이 1세의 탄압 정치가 국내에서만 행한 것이 아니라 국외 즉 폴란드 사태에도 개입하여 더욱이 지중해 진출을 꿈꾸어 1853년2월 멘쉬코프 공(Prince Menchi-Koff)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여 반 러시아적인 터어키 외상 파우드 • 메헤멧드 • 파샤(Faud Mehemed Pasha)를 파면케 하고 터어키에 있어서 그리스 정교의 보호권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크리미아 전쟁을 일으켰다.

 

니콜라이는 터어키의 힘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어키는 니콜라이 1세의 예측에 어긋나게도 예상외로 선전하여 터어키 군은 다뉴브 방면에서 러시아군의 셀비아 통로를 차단하고 아시아 방면에서는 흑해에 있는 세인트 • 니콜라이(St. Nicholas)요새를 함락시켰다.

 

이에 니콜라이는 격분하여 흑해함대를 동원하여 소아시아 해안의 시노페(Sinope)에서 터어키 해군을 전멸시켰다. 이것을 시노페 대학살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니콜라이를 피투성이 니콜라이, 채찍의 니콜라이, 유럽의 경찰이라는 악명을 가진 황제였다. 그러나 우방인 영국과 프랑스가 터어키를 지원 하였고, 러시아와 친교 관계를 맺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구의 입장에서는 이 전쟁이 전제 압정인 동양적 야만주의에 대항하는 성전과 같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군인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크리미아 전쟁은 러시아에게 참패를 가져다주었고, 이러한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뜻하지 아니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니콜라이 1세의 급서였다. 니콜라이 1세가 서거하자 황태자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1855~1881) 가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더 2세는 원래가 성격이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조속히 전국을 수습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1856년3월31일 파리강화 조약(Treaty of Paris)을 체결하였다.

 

알렉산더 2세는 파리강화 조약과 동시에 평화를 선언하고 농노제도 폐지(1861), 징병제 채택(1874) 등 알렉산더 2세의 치세는 러시아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물론 알렉산더 2세가 타고난 개혁자는 아 니었다. 그것은 그의 착한 성품의 탓이기도 하거니와 원래 정치라는 것은 탄력성이 있어 강한 독재정부 다음에 출현하는 정부는 대개가 자유가 많고 혁신이 많은 민주적 개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알렉산더 2세의 개혁정치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농노제도의 폐지이다. 그는 과거의 프카초프(Pugachev)에 의한 농민반란을 생각했고, 크리미아에서의 패전은 여하한 소요나, 반란, 혁명 등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패전, 아버지의 탄압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 불평 등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반란 등을 않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개혁을 하기로 결심했다.(It is better to abolish serfdom from above than to wait until it begins to abolish it self from below) 그러나 당시의 대토지 귀족들은 농노제도 하에서 그들이 누렸던 권리를 고집하고 철폐나 양보를 하려들지 않자, 알렉산더 2세는 농노제도 폐지에 대한 공개토론을 주선했고, 개혁의 구체적인 조항을 내놓기도 하였다. 3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알렉산더 2세는 대토지 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황제 스스로 농노 제도를 폐지시켰던 것이다.

 

농노폐지는 당시 4천만의 사람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데서 제정러시아 사상 일대 큰 변혁이었다. 지주들은 토지를 상실한데 대한 보상을 받았고 농노들은 경작지를 분할 받고 그에 해당하는 액수를 49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연불로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토지가 농민 개인에게 분할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무산 농민층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을 단위의 농민 공동체에게 분할되었던 것이다.

 

농노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연속적인 개혁정치는 구체제의 봉건적 잔재를 외형상이나마 쓸어버리는 일대 혁신이었다. 농노제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가진자를 없애주었고, 젬스토보 회의는 과거의 주인과 종이 한 자리에서 국사를 논하게 되었으며, 대지주의 몰락은 러시아에서 미약하나마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싹을 안겨다 주었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농노제의 폐지는 물론이거니와 지방 자치제의 주장을 요구하는 등 보다 더 급진정책을 요구했다.

 

이것이 곧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에 기초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정러시아의 극동진출이 일본의 대륙 정책을 위협하여 양국은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일본은 명치 이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달성한 후 세계적인 경기불황과 국내시장의 협소로 인한 산업의 침체화를 타개하기 위하여 1872년 유구열도, 1874년 대만, 1875년 운양호사건, 이어 청 • 일 전쟁, 러 • 일 전쟁까지도 일으켰다.

 

결국 알렉산더 2세 치하에서는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했던 제한된 자유이나마 누리게 되자, 위에서부터의 개혁의 시도와 아래로부터의 과격한 개혁의 시도가 교차되는 혼란기에 처해 있었으며 위로부터 보다 실질적인 개혁을 단행하자고 주장하는 내무대신 멜리코프(Loris Melikov)의 의도를 알렉산더 2세는 승인했으나 1881년3월 급진 혁명 세력들에 의해 암살당하여 그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881~1894)는 급진파 사회주의자에 의해 부왕이 서거하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정치는 정치의 진자의 법칙(the law of political pendulum)에 의하듯이 캐서린 여제의 탄압 정치가 알렉산더 2세에 와서는 어느 정도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다시 알렉산더 3세에 와서는 강경책으로 나가, 부왕의 암살에 대한 충격은 곧 자유주의 세력을 전면 공격하고 탄압하는 반동정치로 나갔다.

 

이와 같은 여건 하에서 등극한 니콜라이 2세(Nicholai, II)는 국민의 강요에 못 이겨 또는 유화책의 일환으로 위와 같은 광범위한 약속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하루 속히 군대가 난동을 진압하고 사회가 정상화되기를 바랐다.

 

짧은 기간이나마 신뢰를 되찾는 듯하다가 1904년7월28일 내무대신 풀레베(V. K. Pleve)가 사회 혁명주의자들에 의하여 암살되자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해 사회 어느 분야에서도 지지를 받을 전망이 거의 없었던 전제 정부는 1905년1월 초에 페터스브르크(Petersburg)에서 시위 주동자 멜리코프(Melikov)를 체포 처형시키며,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에서 어떠한 소요와 혼란에 대해서도 전제 왕정을 강호하고 수호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황제와 국민 특히 나로도니끼(Narodoniki)가 기대했던 농민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나로도(Narod)라는 말의 뜻은 민중이며 나로도니끼 주의하면 민중 주의자라고 옮길 수 있다.

 

당시 제정러시아의 사회개혁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Mir)를 기초로 전제주의를 청산하고 농민 또는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기초하여 소수의 집단에 의한 음모로써 혁명을 부르짖은 것이 지하조직인 나로도니끼(Narodoniki)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사회주의에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나르도니끼 운동은 크게 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무차별 테러와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바쿠닌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플레히노프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이다.

 

기존의 나르도니끼 특히 바쿠닌 등이 주장했던 무차별 테러리즘을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플레하노프(Georigi Phekhanov, 1856~191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