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4/100회_혁명의 끝.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성립되는데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자본주의 고도 단계에 이르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 때문에 플레하노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농민과 제휴하는 형태로 나갈 것을 제의했다.

 

첫째, 정치 혁명인 부르주아지 혁명이 먼저 수행되어 제정 러시아를 타도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둘째, 다음 단계로서 사회혁명을 시도하여 정권을 탈취한 후 프롤레타리아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을 수립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귀족과 농민의 대립을 서구 선진국과 같은 과정을 밟아 자본가와 노동자로 대립시킨다는 것은, 러시아의 개혁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공장 임금노동자를 산출하여 그 프롤레타리아가 수적으로 전 사회에서 우세할 때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이 전개되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러시아의 현실 상황과 플레하노프가 주장하는 마르크스 이론의 러시아에 적용은 상당한 모순내지 괴리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레닌이 볼 때 당시 러시아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은 약하나, 반면 자본가 계급은 더 약하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낡고 오래 된 전제 왕정을 쓸어 트릴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만일 수가 적더라도 헌신적인 소수 정예분자들이 혁명을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정부를 전복할 기회가 곧 올 것이다. 이러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소수의 혁명주체 세력이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고 직업적인 혁명가들로서 구성된 당원들이 당의 계획과 실천에 충성을 받쳐야 할 것이며 잘 훈련된 당원들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혁명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에서의 혁명 사업은 일반 대중 정당을 가지고는 힘들고 소수 정예분자가 핵심이 되고 그 밑에 혁명사상으로 뭉친 정예 당원이 노동 계급을 지도하는 전위가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실을 러시아에 부합되는 변형된 마르크스주의를 창조한 레닌의 조직의 기본원리는 1902년 3월에 출간된 무엇을 해야 하나(What is to be done?) 에서 모든 나라는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고용자에게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되는데, 노동자의 운동을 추진할 강력한 중앙 집권화 될 당의 문제와 직업 혁명가의 조직망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 방식에 따라 권력을 잡는 계획은 러시아에서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보다 현명한 방법인 지름길을 택하자는 것으로 혁명가의 조직을 통한 공산혁명방식을 부르짖게 되었다.

 

레닌의 이러한 혁명사상의 기초는 플레하노프의 농민 공동체론을 배격하고 노동자 계급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은 것은 서로 일치하나 투쟁 시기에 있어서 플레하노프는 좀 더 자본주의가 발달한 연후에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전개하자는 것인데 반해 레닌은 지금 상황으로서도 중앙집권화 된 전위당만 가지면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방법론상의 차이가 나온다. 바로 이상과 같은 플레하노프와 레닌의 방법론과 혁명시기의 불일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간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 후 1905년1월22일 약 20만의 시민들이 “신이요, 황제를 구하소서(God save the Tsar)”라는 노래를 부르며 궁전을 향하여 시위가 진행되자 황제군은 이들 시위 군중에 대하여 무차별 난사를 자행하였다. 이 사건을 속칭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건이 터지자 가퐁(Gapon)신부는 전 러시아의 폭동을 요구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 성명 후에 성난 노동자들은 온통 거리로 뛰쳐나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기고를 습격하며, 모든 노동자는 파업에 돌입하고, 농민은 폭동을 자행하는 등 러시아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즉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후 혁명세력들의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위원회(Bolshevik Committee)보다 더욱 확장되고 그 규모가 볼셰비키 집단보다 더 큰 멘셰비키(Menshevik)들이 페터스브르크에서 페터스브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Petersburg Soviet Workers' Deputies)를 조직하여 당시 진행되고 있던 총파업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러시아 전 도시에서 선동에 자극을 받아 농민은 농민대로 토지를 요구하며, 지주들을 살해하거나 농장을 방화하는 혼란에 극치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습책으로 나온 것이 위테(Witte) 백작의 충고 즉, 군사독재로 제정을 강화하든가 아니면 국민에게 폭넓은 자유를 포함한 소위 10월 선언(October Manifesto)이었다. 즉 1905년10월30일 니코라이 2세(Nicholas II)는 위트(Witte)백작의 자문에 응하여,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완전한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향유할 것과 국민을 통한 선거에 의하여 국회(Duma)를 소집할 것 등 완전한 전제정치의 붕괴를 의미하는 약속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개혁조치가 있었음에도 러 • 일 전쟁의 결과로 군대의 대부분은 아직도 극동에 주둔해 있고 당장 동원하여 군정을 베풀기는 힘들어 마지못해 10월 선언을 택하면서 탄압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05년 혁명은 모든 주동자가 체포되어 처벌과 유배됨으로써 멘셰비키나 볼셰비키 어느 한 파도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들은 1905년의 혁명에서 그들의 역할이 미미했음을 시인하고, 1905년9월 15개의 볼셰비키 조직과 멘셰비키 조직으로 구성한 남부 지역회의는 동년 11월 페터스브르크 볼셰비키 위원회와 멘셰비키 집단이 중앙위원회 허락도 없이 통합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레닌(Lenin)의 기대와는 달리 멘셰비키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레닌은 그 결정을 일단 따르고 관망하는 상태에서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브(Martov)와 단(Dan)을 포함하는 이들 멘셰비키는 당 조직의 엄격한 중앙 집권화만이 혁명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문제로 당헌 제 1조의 민주주의적 중앙 집권주의(democratic centralism)가 투표에 의해서 채택되자, 이것은 레닌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되는 견해이었다. 1906년에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멘셰비키들은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혁명은 봉건주의적 사회형태(feudalism)를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형태(bourgeois capital from of society)로 대치시키도록 유도될 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볼셰비키는 여하한 식으로도 구성되는 국회(Duma)는 참여할 수 없고, 그것은 전제정부와의 타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1905년 12월에 볼셰비키는 국회의원 선거를 완전히 거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공동의 결정을 보지 못하고 국회참여 문제는 지방위원회 각자에게 맡기도록 결정했다. 따라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분열 상태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군국주의 독일에 항복할 수 없다는 신념아래 모든 호전적 사회주의 정당은 전투행위의 정당성을 지지했고 카우츠키(Kautsky)와 플레하노프(Plekhanov)도 국가의 어려움이 끝날 때까지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를 반대했다. 그러나 레닌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자가 공모하여 시장의 약탈과 영토를 추구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있을 수 없고, 전쟁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위한 총알받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갈 길이란 혁명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가 수적으로 적고, 약세이나 자본가 계급은 독일군에게 참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붕괴를 가져왔고 군대의 사기저하는 정치의 무정부 상태 즉, 사회적 진공상태가 나타났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의 쇠퇴는 강한 힘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쉽사리 전복시킬 수 있다는 자기 나름대로 계산하고 독일과 전쟁에서의 패배만이 탄압 전제국가를 쉽게 무너뜨리고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잠정적으로 농민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그 다음 계급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레닌은 제 1차 대전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는 것을 바랐고 그것이 바로 제정 러시아를 저절로 무너뜨렸고 레닌에게 혁명의 성공을 안겨다 준 것이다.

 

위에서 밝힌 제 1차 대전(1914~1918)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에게 독점되어 있던 영토 관계가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세계 영토의 재분할 관계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1차 대전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14년1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 페르난도(Franz Ferdinand)부처가 육군 기동훈련 작전에 참관하고 사라예보(Seraevo)에 들렀을 때 세르비아의 푸린치이프(Carilo Princip)라는 청년에게 저격당하여 이것이 전쟁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황태자 저격사건은 오스트리아의 외상 베르히토올드(Berctold)는 프란츠 요젭(Franz Joseph) 황제의 친서를 독일 빌헬름 2세(Willehem II) 황제에게 전하자 카이자는 흥분한 나머지 전쟁을 해도 괜찮다는 백지 위임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는 세르비아로부터 원조를 요청받자 1914년 6월 24일 긴급 각의에서 오스트리아의 전쟁선포를 연기할 것과 필요시에는 케프(Kiev), 오뎃사(Odessa), 모스크바(Moskva), 카잔(Kazan)의 4개 군단과 발틱과 흑해의 2개 함대를 동원할 것에 결정을 보았다. 동년 6월 25일에는 전쟁 준비기간을 선포하고 전쟁 준비에 매진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셀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것을 알자 지금까지 내각에서 총동원에 반대하여 오던 외상 사조노프(Sazonoff)도 크게 당황하여 군부의 총 동원령에 찬성하고, 니콜라이 2세(Nicholai, II)황제로 하여금 서명케 하여 동년 11월30일 하오 6시에 총동원령이 발표되었다.

 

1914년7월28일 오스트리아가 셀비아에 대하여 군사행동을 개시하자 전쟁은 일주일도 못되어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전쟁은 확대되어 전쟁 초기의 영 • 불 • 러 • 벨지움 • 세르비아 등 5개국 대 독일 • 오스트리아 2개국이었던 것이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터어키가 독일 측으로 가담했으며, 후에는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세계 대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련 혁명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떻게 보면 레닌이 투쟁에 의해서 혁명이 성공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당시 국내외의 상황적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는 제1차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에게 패한 것이 혁명의 성공에 주된 원인이 된 것은 틀림이 없다.

 

근대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국민적 단결과 자신감, 그리고 정부의 능률적 전쟁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짜르 제정은 이러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고 있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늙은 정권이 한 번 세계적 규모의 전쟁에 휩쓸리게 되자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일시에 노출되고 이는 다시 짜르 전제주의의 누적된 병폐와 결합함으로써, 러시아 국가 자체를 내부에서 폭발하기 시작한 급격하고도 변혁적인 대사건들 속에 말려 들어가고 있었으며, 걷잡을 수 없이 변천하는 대규모의 소용돌이는 국가와 사회에 혁명적 상황을 조성하면서 짜르 전제의 권력을 계승하려고 기도하는 여러 새로운 세력들에게 혁명의 조건과 기회를 풍족히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바닥을 들어냈고 탄넨베르크(Tanneberg) 전투에서의 패배는 러시아 정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사망자와 부상 군인이 속출했고 일반군인들의 사기마저도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국민의 정치적 불만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니콜라이 2세(Nicholai II)는 황제 자신이 군대의 총지휘를 담당하고 전선에서 진두지휘하는 상황에서 독일군의 일제 공격으로 전세가 더욱 약화되자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한편 니콜라이 황제가 군무에 열중하고 최전선에 있는 동안 국사에 대한 황후 알렉산드라(Alexandra)의 역할이 커졌으며, 황후는 사회주의자들과 국회(Duma)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여자로서 악명 높은 승려 라스푸틴(Rasputin) 에게 쉽게 조정되어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황후에 대한 라스푸틴의 영향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고, 니콜라이 2세는 황후와 그의 조력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황후 알렉산드라(Alexandra)의 괴승 라스푸틴(Rasputin)의 불륜한 관계의 소문이 계속 퍼지고, 1916년 가을에는 사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소문은 소문을 낳아 황후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공모하여 러시아 제국을 독일에게 인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짐으로써, 그러한 유언비어는 군대 내부까지 파고들어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되자 1905년 혁명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1916년부터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민중은 산발적인 데모와 파업이 시작되면서 1917년에 이르러는 파업이 점점 확대되었다. 국내사태가 이렇게 험악해지자 니콜라이(Nicholai II)는 칙령으로서 국회 해산을 명하고, 파업을 즉시 중지를 요구했으나 국회는 해산을 거부했고, 오히려 1917년1월27일 노동자 그룹의 지도자들이 파업의 혐의로 체포되자 2월14일 노동자 중앙그룹 산하조직은 대대적인 시위계획을 세우고 또한 볼셰비키대로 동년 2월13일 4대 국회의 볼셰비키 대표 5명에 대한 재판 선고기념일에 대규모 파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노동자 중앙위원회 지시나 볼셰비키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있다가 2월14일 페터스그라드시의 60개 공장 노동자 10만 여명이 대규모 파업을 단행했고 이것이 2월 19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다 1905년 혁명과는 달리 군대가 중지 내지 민중에게 가담함으로써 제정 러시아는 막판에 이르렀다.

 

군대의 지원에 용기를 얻은 페트로그라드(Petrograd) 과격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군대의 대표로서 소비에트 회의(Soviet Council)를 조직하고, 한편 국회의 지도자들은 니콜라이 2세(Nicholai II)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황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아우 미카엘 대공(Grand Duke Michael)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미카엘이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제정러시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2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동년 3월14일 국회는 소비에트와 타협에 의하여 온건 자유주의자인 로보브 공(Prince George Lovov, 1811~1925)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 정부는 언론 • 출판 • 결사의 자유, 모든 민족적 종교적 차별의 철폐,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 등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상태에서 임시정부와 독일은 전쟁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이 양국의 전쟁 관계에 레닌(Lenin)이 개입되어 있었다. 독일은 레닌이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참전 등 복잡한 상황이 전개됨으로 하루빨리 동부전선에서 휴전하고 여세를 몰아 연합국과 대항하는 것이 독일에게 유리하므로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가면 전쟁의 의욕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일의 승리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우편열차에 실어 국경을 넘어 보낼 준비를 착수하여 레닌(Lenin), 지노비에프(Zinoviev) 등 다른 혁명분자들과 함께 스웨덴(Sweden)을 넘어 4월3일 핀란드 철도로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 도착시켰다.

 

레닌은 1917년 4월에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볼셰비키파와 임시정부에 의하여 추방이 면제된 트로츠키(Trosky)등과 더불어 혁명을 획책했다. 그는 독일 정부의 주도로 귀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러시아를 패전시키려는 독일정부의 첩자노릇을 볼셰비키가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소비에트(Soviet)에서의 레닌의 인기는 높았다. 그는 러시아에 도착하여 노동자와 군인, 농민의 대표에 의한 정치제도, 모든 지주 계급의 재산몰수, 토지의 국유화 등의 정책을 폈다.

7월이 되자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가 임시정부의 수상이 되어 행정상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역시 대중의 반감과 전쟁의 혼란과 경제적 혼란을 회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육군사령관 코르닐로프(Kornilov)장군은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 계엄령과 현 내각의 사퇴 등을 요구하자 케렌스키 수상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코르닐로프(Kornilov)장군에 퇴임을 명령하였다. 코르닐로프는 이를 거절하고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래서 레닌(Lenin), 지노비에프(Zinoviev)는 지하로 숨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7월의 소요(July Disturbances)라고 한다. 7월 소요사건으로 트로츠키는 체포되었으나 코르닐로프(Kornilov)장군에 의한 쿠데타 사건으로 정세가 바뀌면서 트로츠키는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과 동시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손을 잡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키 위해 임시정부를 타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임시정부의 견해와 볼셰비키와의 차이는 점점 더 커졌다. 농민들은 토지를 원하고 병사들은 휴식을 원했으며, 노동자들은 빵을 원했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지 못한 임시정부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전쟁을 계속하며 내정에 시달린 임시정부는 갈팡질팡했고, 이제 병사들도 분노를 터뜨리며 무장 시위를 벌이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라고 촉구했다.

 

그래서 돌아가는 상황은 레닌에게 상당히 유리했다. 이때 케렌스키 수상은 당황한 나머지 볼셰비키에게 원조를 청하자 이것을 계기로 레닌은 10월7일 페터스브르크시에 잠입하여 트로츠키와 협력 하에 10월24일 볼셰비키 당원과 공장노동자, 크론쉬타트와 발틱 함대(Kronstadt and the Baltic fleet)의 수병으로 구성된 붉은 전위대(Red Guard),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수비대(Petrogard garrison)로 구성된 소수의 세력을 규합하여 평화, 토지, 빵(Peace, Land, Bread)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쿠테타를 감행하였다.

 

쿠테타 직후 10월25일 케렌스키(Kerensky)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서 탈출하여 10월26일 볼셰비키와 대항하기 위해 수백 명의 코사크(Cossaks)병력을 가지고 있는 크라스노프(Krasnov) 장군과 함께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했으나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크라스노프는 체포되고 케렌스키는 도망하였다.

 

그 결과 볼셰비키는 지금까지의 열세를 만회하고 소비에트(Soviet Council)의 주도권을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넘어갔다. 이러한 군부 쿠데타 사건으로 멘셰비키와 임시정부는 볼셰비키 조정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면 러시아의 정치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Soviet)가 「2월 혁명」후의 러시아 권력 정치를 양분함으로써 러시아 정치의 「이중구조」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혁명적 상황을 잘 이용하여 무식한 공장 노동자와 우직한 농민의 동원에 성공한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직업혁명가 집단」은 정치권력을 종국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탈권 후에 뒤이어 일어난 내란에서 「적군」을 효과적으로 창설한 「소련공산당」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연합국 세력의 무력개입을 이용하여 조국수호와 애국의 명분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때에 짜르 전제 타파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이다.

 

인류역사상 전혀 새로운 전쟁으로서 그 규모나 양적 크기에 있어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 당사국들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던 이 대전에 제정 러시아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하게 되자, 러시아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적 상황에 빠져 들어갔다. 러시아의 전제체제를 내외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항상 짜리즘의 지주가 되어온 것은 제정 러시아의 군대였다.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고 끊임없는 물량 소모전에 국내경제가 피폐하여 지자 국민의 염전사상이 고조되었다. 특히 볼셰비키(Bolsheviks)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세력들이 평화주의와 반전사상을 선동함으로써 제정 러시아 군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급기야 짜르의 군대는 그 내부로부터 붕괴되기에 이르렀다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10월 혁명이 성공하게 된 것은 레닌 등의 주도면밀한 볼셰비키의 활동 이전에 제정 러시아가 전쟁으로 무너진 것이 10월 혁명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이때부터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이라는 말은 오늘날 볼셰비즘 또는 공산당(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혹은 공산주의이라고 바꾸었다. 블랙(Cyril Blak) 교수는「러시아 10월 혁명」을 전후하여 소련은 러시아의 정치 문화적 전통과 경제 • 사회의 발전 수준을 토대로 하면서 공산혁명의 성공을 위한 3대 상황 조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그중 기존 중앙정부 통치 권위의 추락을 첫째 조건으로서 제시한다.

 

세계 1차 대전은 짜르 중앙정부의 통치권위를 파멸시켰을 뿐망 아니라 관료, 경찰, 군대 등을 주축으로 하여 조직된 국가통치 구조를 파괴시켰으며 러시아의 사회 ․ 경제를 파탄 상태에 이르게 하고, 특히 러시아의 역사적 짜르 전제주의의 몰락의「필연성」을 국민 모두에게 확신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토지, 빵, 자유, 평화」 「모든 권위를 소비에트」라는 볼셰비키의 혁명구호는 혁명 당시 러시아가 처한 정치상, 사회상, 경제상을 잘 요약해주고 국민대중의 심정을 명확히 표현해 준다고 할 것이다. 토지를 갈구하는 농민의 불만, 빵을 요구하는 도시 노동자들의 참상, 자유를 외치는 지식계층의 사명감, 그리고 평화를 부르짖는 전체 국민의 염전 사상은 소련 공산당이 정치권력을 장하는데 결정적 여건을 마련하여 주었다.

 

혁명당시 상황적 조건 중에서 특이한 사실은 러시아 혁명기「정권의 이중성」이다. 짜르 전제정권이 무너진 이후 그 정치권력의 승계가 가능한 잠재 세력으로서는 농민층, 상공업자 중심의 부르주아 계급, 자유주의자를 포함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도시 노동자계급, 그리고 군대세력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실제권력은 이상 어느 한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인텔리겐치아 및 부르주아 계층으로 형성된 「임시 정부」와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에 의하여 배분되었다. 혁명기 정권의 이중성은 소련 혁명의 한 특성으로서, 노동자 • 병사 • 농민의 자발적 회의체인 소비에트를 자생시킴으로 하여 급기야는 볼셰비키 쿠데타에 의한 소비에트 정권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소련의 역사가들은 혁명기 정권의 이중성과 소비에트 출현을 소련 혁명의 승인의 하나로 중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