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5/100회_혁명의 끝.

 

 

2. 레닌 시대 이후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시민혁명(군주제의 붕괴, 봉건 대지주의 해체와 공화정의 수립)과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러나 1900년대의 제정러시아의 인구구조는 국민의 대부분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자본 사회는 겨우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전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과 5%를 차지하는 하류 계층은 빈부 격차의 극한적인 상황을 나타냈고, 노동자와 농민은 단지 유산계급의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 제정러시아에서도 노조운동이나 합법적인 정치운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생존과 권익의 옹호를 위하여 불법적인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자본주의의 부정적 장래에 대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라든지, 그리고 완전한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길은 언제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계층서 혁명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이론을 전개했는데 당시 마르크스의 혁명론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에 적용 • 발전시킨 레닌(Nikolai Lenin, 본명은 Vladimir Iljich Ulyanov, 1870~1924)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적인 원칙에서 발달되지만 그것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자유경쟁이 아니라 오히려 독점적인 경향을 나타나게 되어 카르텔 등 독점형태가 나타나게 되면, 필연코 이 독점을 지배하는 금융자본이 나타나게 된다.

 

금융자본이 독점을 위해 투하되는 자본이라고 하여 제국주의란 독점 자본주의이며, 이 독점자본을 움직이는 금융자본이 해외에 투자되어 세계 분할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각국의 치열한 식민지 개척으로 나가며, 식민지 개척은 전쟁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그는 주장하기를 마르크스가 밝힌 선진 자본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급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선진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구태여 국내 노동자들의 급료를 깎아 내리지 않아도 그들의 이윤 돌출구가 새로 발생했기 때문이며, 또한 매수된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하며,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산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즉 그렇게 해야만 러시아에서의 혁명 운동이 합리화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전개한 것이 제국주의와 독점 자본주의론이다.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1916 : 보통 ‘제국주의론’으로 불리움)에서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①자유경쟁에서 출발한 자본주의가 생산과 자본의 집중 • 집적과 결과, 독점을 특징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②은행 자본과 산업자본이 결합한 금융자본이 모든 산업을 과두 지배하에 두기에 이르렀다. ③상품의 수출 대신에 자본의 수출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④세계의 경제적 분할을 위한 국제적인 자본가 단체의 결합이 성립된 것이다. ⑤세계 분할이 완료되어 재분할이 역사의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 등을 들었다.

 

위에서 읽은 것처럼 레닌은 자본주의가 이윤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어서, 국내시장의 협소로 후진지역의 투자가 불가피하고, 그 투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정책이 불가피하다. 만일 식민지 분할이 더 이상 힘들다고 판단될 때 제국주의들 간에 전쟁의 불가피론을 주장하는데, 전쟁은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싸움인 레바논 전쟁 등은 경제적인 요인보다는 종교와 민족 등 복합 요인이 게재되었고,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싸움인 포클랜드 전쟁은 오히려 양국 모두가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는 전쟁으로써, 이것은 자국의 위신에 관한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마르크스 이론이 현대사회에서 맞지 않듯이, 레닌의 제국주의 주장도 당시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에 적용하고자 할 때 러시아적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레닌은 자기합리화의 이론이 필요하여 제국주의 이론이라는 것을 내세우게 되었다.

 

러시아의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그의 독창물이 아님은 틀림없다. 따라서 오늘날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강조한 ①전쟁이 경제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주장, ②자본주의가 특히 제국주의적 경향을 촉진한다는 주장, ③19세기 식민주의가 유독 자본주의의 결과라는 주장 등은 잘못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이 마르크스나 레닌의 주장도 아니라면 그 성공요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러 • 일 전쟁의 패배와 특히 제1차 대전이 저절로 혁명 분위기를 갖다 준 것이다. 레닌의 혁명이론보다는 전쟁의 혼란이 제정 러시아를 저절로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러시아에서 아직 프롤레타리아가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은 그 혁명의 핵심체인 제국주의론에서 목표한 의도는 세계를 식민지소유국과 식민지로 구별 • 대립시키고, 식민지 • 반식민지 및 후진지역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을 선동 • 촉구하는데 있었다.

 

여기서 레닌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민혁명을 완수한 후 얼마나 빨리 그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이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와 비례해서 레닌의 말대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은 제정러시아의 폭정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즉 레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전략 • 전술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부분적 계승과 대폭적인 수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하여 러시아에서 시민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1898년 민스크에서 불법적으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이것이 소련 공산당의 모체가 되었다. 아울러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의 당원과 그 간부들은 체포와 유형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합법적인 개혁의 실천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옥중과 유형지에서「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달」(1900)을 집필하여 나로드니키와 이론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0년1월 유형지에서 돌아와 기관지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7월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 해 12월24일(러시아력으로 12월11일)라이프치에서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등과 함께 이스크라(Iskra, The Spark, 불꽃)라고 하는 비합법적 정치신문을 발간하여 레닌은 이 신문을 통하여 자기 이념이나 전술을 한껏 이용하였다. 이 신문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중심기관이었다. 1903년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은 온건파에 속하는 멘셔비키(Menschewik)와 혁명적 과격파에 속하는 볼셰비키(Bolschewik)로 분열되었으며, 그 후 레닌은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당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레닌은 1900년 2월에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 5년 동안(1900~1905)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무엇을 해야 하는가?」(Was Tun?, 1902)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레닌주의의 주요 골격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당 이론이다. ①당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일반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대중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되고, ②소수정예(핵심엘리트)의 직업혁명가가 중심이 되며, ③규율이 엄격하고 중앙집권적 원칙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여야 하며, ④노동자 계급에 의해 지도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지도하는 전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 계급이 별도의 정당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면서, 다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만 제기하였다. 레닌은 이를 수정 • 발전시켜 전위당으로서의 공산당 결성을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아닌 공산당의 당 독재체제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레닌의 당 조직론이 독재적 • 전제적 • 비민주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당 독재에서 마침내는 독재자의 1인 독재로 전락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혁명 전략이다. 특히 ‘노 • 농 동맹’ 전략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농민경시 이론을 수정 • 변경하여 ①노동자 계급을 선봉적인 혁명 세력으로 규정하였고, ②농민을 추종세력으로 동맹군 화하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노 • 농 동맹에 입각하여 짜르 전제를 타도하고,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수행하는데, 이때 노 • 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정권’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도시와 농촌의 모든 프롤레타리아와 동맹으로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제국의론’과 민족해방 투쟁론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먼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선진공업 국가에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하여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이 서구의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론화하였다.

 

1905년의 혁에는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의 사회민주당의 2개 전술”을 써서, ‘노 • 농 동맹’에 의한 짜리즘 타도와 노동 민주혁명 독재정권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 1차 러시아혁명(1905~1907)기간 동안에 소련에 귀국하여 정치 및 언론 활동을 재개했으나, 그에 대한 정부의 체포령 때문에 다시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출판하여 당의 기회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비판하였다. 10년간의 망명생활 동안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내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권력 투쟁을 하였는데, 레닌은 1912년1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개최된 제 6차 당 협의회에서 멘셰비키를 제명시키고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하여 당을 전위적 혁명조직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1914~1917) 기간 중 레닌은 스위스에 체류하면서 전쟁문제와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수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제국주의 이론서인「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라는 책도 이 때 쓰여진 것이다. 1917년2월 혁명(일명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군중과 농민 • 노동자, 군대 등 많은 집단들이 연이은 시위와 폭동, 파업 등으로 혼란정국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 2월 혁명은 어떠한 단일계급에 의한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조직이나 지도자에 의한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물론 멘셰비키, 볼셰비키, 사회혁명당(Social Revolutionary Party)이, 이 혁명에 참가했으나, 어느 한 집단에 의해서 러시아의 마지막 제 니콜라이가 퇴위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당은 이 2월 혁명이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에 도달할 수 있는 제 1단계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가 자본주의 발전단계 최고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여 현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멘셰비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스위스에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레닌은 귀국하여 2월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러시아는 비록 경제적으로 완전한 사회주의를 실현할 만큼 경제의 발전이 없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권력을 노동자에게 이전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즉각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유도하기를 원했으며, 소비에트(Soviet Council)는 그와 같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기관으로 여기고 임시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여러 준비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그 기간 중「국가와 혁명」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그의 정치적 대안들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7년 8월 혁명이 성공하자 ‘봉함열차’에 태워져 독일군에 의해 국내에 송환되어 혁명을 진두지휘하게 됨으로써, 레닌은 볼셰비키의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레닌은 1917년10월 혁명에서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무장봉기를 조직하여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자, 레닌은 즉각 소비에트(Soviet)회의를 열어 소비에트 인민위원회(Soviet of People's Commisars)를 결성하고, 인민위원회 의장에 레닌(Lenin), 외무위원에 트로츠키(Trotsky), 민족문제 인민위원에 스탈린(Stalin)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완전히 무너지자 레닌의 첫 당면과제는 민심 수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케렌스키 정부가 약속했던 제헌의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7년11월 말에 사상 유례가 없는 민주적 방법으로 선거를 실시한 결과 볼셰비키의 예상과는 달리 참패를 당했다. 선거결과에 당황한 레닌은 1918년1월 의회의 구성이 여론에 따른 의회가 아니라는 구실을 내세워 제헌의회가 구성되기도 전에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일당 독재체제(레닌은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이라 칭하고 있음)를 도입 • 실시함으로써 볼셰비키당 내부의 민주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1918년7월22일 전(全) 러시아 소비에트(Soviet) 회의에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선포하였다. 이어서 독일과의 브레스트리토브스크의 강화조약 체결, 신경제정책(NEP) 채택, 코민테른 결성 등 모두 레닌의 지휘 하에 실시되었다.

 

이처럼 독일과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시키고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집단의 농촌에서의 취약성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농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대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때 농민에겐 토지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실은 볼세비키의 내심은 국유화정책(Nationalization of the land)이었는데,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마자 자기들의 국유화정책을 포기하고, 사회혁명당(Socialist revolutionaries)의 계획인 토지의 매매와 임대 등 토지제도를 철폐하고 모든 토지를 노동력 있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초기의 국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경쟁 상대인 사회혁명당의 정책을 채택한 것은 볼셰비키들은 농촌에 대한 기반이 약하므로 농민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와 아울러 대내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였고, 볼셰비키 당을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하였으며, 나라의 정치 • 경제 • 군사력을 볼세비키 당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보수 세력이며, 혁명 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외치던 콜착(Alexander Kolchak) 휘하의 백 러시아군을 소탕함으로써, 러시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명목 하에 볼셰비키 과두체제인 독재정부를 탄생시켰다.

 

그 후 레닌의 사상이론은 레닌주의 내지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되었다. 그리고 레닌주의는 ‘제 3인터내셔널’(코민테른, Comintern, 1919~1943)을 통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유일한 사상이론 체계와 행동 지침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에 의하면 볼셰비키 당은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혁명이 성숙된다는 확신 하에 그의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봉기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국제적 세계혁명 역량의 지원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의 도움 없이 일국 사회주의에로의 전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레닌은 한 나라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궁극적 승리는 국제적 혁명 역량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커다란 국제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국제공산주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더욱 특이한 사실은 그가 소련혁명을 다른 나라의 혁명모델로도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레닌이 앞으로 등장할 사회주의 국가들은 러시아를 능가할 수 있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동격으로 결부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되어 서구 공산당(유로코뮤니즘의 당)을 제외한 세계 모든 공산당의 강령에서 보편적 진리로 천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레닌의 주장은 그의 사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Djugashvili, 별명 Stalin, 1879~1953)의 폭력적 • 독재적 스탈린주의와 결합하여 볼셰비즘으로 되었고, 오늘날의 팽창주의적 • 국제공산주의로 되었다. 이러한 레닌주의의 개념에 대해 스탈린은 1924년4월 이것을 ‘국제적 발전 전체에 근거한 국제적 현상’이라고 하여 레닌주의를 러시아 혁명의 이론으로부터 세계혁명의 이론으로 격상시켰다. 레닌주의를 러시아 정세의 독특한 조건에 적용한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순수히 러시아적이며, 러시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현상’ 이라는 규정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거세해버린 혁명적 내용을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일보 전진하여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점”에 이것의 전면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시대의 마르크스주의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이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라고 「레닌주의의 제 문제」(Fragen des Leninismus, 1924)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