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6/100회_혁명의 끝.

 

 

3. 스탈린시대 이후 ~

 

스탈린은 반정부 유물론 가운데 망명지에서 보내오는 이스크라(Iskra, 불꽃)신문을 통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고취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반정부 파업을 시도했고 이로 인하여 체포되어 1904년 1월까지 감옥생활을 하였다. 한편 해외 망명지인 벨기에서 1903년 제 2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레닌파가 승리하여 이스크라지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볼셰비키 멘셰비키파로 갈라졌고, 1904년 스탈린이 출옥하였을 당시 양파가 치열하게 다툴 때이었다. 스탈린은 코카서스 지방에서의 레닌파인 볼셰비키파로 가담하여 1905년 혁명시 자기 지방에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핀란드에서 열린 볼셰비키 전당 대회에 자기 지방 대표로 참석하여, 이때 레닌(Lenin)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코카서스 지방으로 돌아와 혁명 활동을 하고, 항상 레닌을 옹호하며 레닌의 편에 섰다.

 

1913년에는 비엔나를 방문하여 그 곳에 체류하면서 레닌의 지시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들」이라는 소책자를 집필하였다. 그는 동시베리아에 유배되었던 1917년 3월에 제정러시아가 붕괴되자 페테스부르크(현 레닌그라드)로 귀환하였다. 그 뒤 그는 레닌그라드에서「프라우다지」(그 당시 볼셰비키 당 기관지)의 편집업무에 참여했다.

 

스탈린은 혁명 동지들 사이에 뚜렷한 존재는 아니었으나 레닌이 임시정부의 체포령에 따라 지하에 숨어 있고, 트로츠키가 체포되어 있던 1917년 초 그가 먼저 출옥하여 동년 말에 공산당의 거물급들이 풀려 나올 때까지 잠시나마 당을 지키고 있었다. 1917년4월3일 전(全)러시아 당 대회가 개최되었을 당시 레닌은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여 당 대회에 참여했을 때 레닌의 대독 평화협정에 조인은 다른 동료들과의 많은 이견 이 노출되었다. 그 결과 이 협정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혁명당원의 소요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태에서 러시아주재 독일대사인 미르바하(Von Mirbach)가 암살되기도 하였다. 대독 협상은 사회혁명당원 뿐만 아니라 레닌(Lenin)이 이끄는 대다수의 볼셰비키지도자 들도 절대로 독일 카이자와는 평화협상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멀지 않아 선진 독일에서 혁명적인 마르크스 사상이 출현하여 그 혁명정부와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조되어 평화협상의 대표인 트로츠키(Trotsky)까지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조약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휴전이 급하다는 생각 하에 강화조약을 적극 찬성했다. 따라서 레닌이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사면초가가 되었다. 바로 이 때 스탈린은 레닌의 입장을 지지하고 레닌 편에 서서 하루속히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할 것에 대하여 찬성하였다.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강화조약은 체결되고, 스탈린은 레닌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강화조약으로 인하여 스탈린은 현실정치결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트르츠키 와는 대결상태로 나가게 되었다. 더욱이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하고 난 다음에 마르크스의 이론을 놓고 많은 혼란이 있었다. 즉,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이론과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다.

 

원래 마르크스(Marx)는 자본주의 고도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폭력혁명으로 국가가 소멸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진다고 했으나, 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의 사이에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음은 물론 한 나라에서만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었을 경우, 그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국가들과는 사회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문제 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이론을 전개함에 앞서 그 대상이 영국의 사회적, 경제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구라파 국가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적 배경에는 제 1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서구(West)에 비하여 전 분야가 낙후상태(backward)에 있다고 마르크스주의자(Marxists)와 자유진보 주의자들은 생각했고, 특히 지식층들이 공업화형태(industrial model)를 동경할 때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의미했고, 뒤이어 영국의 표본을 따라 공업화를 시작하여 영국을 앞지른 독일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가 서구라파보다도 산업화가 뒤떨어진 이유를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러시아 산업화의 후진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러시아의 역사에서 찾았다. 즉 몽고의 침략(Mongol Khans), 영 • 불의 자본주의자(Anglo-French Capitalist)들 때문에 군사 • 산업 등에서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다고 1931년 소련 경영자 회의에서 언급한 바 있다.

 

구라파를 따라잡고 사회주의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공업화정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탈린(Stalin)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이다. 군사, 정치, 농업부문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대변혁을 시도한 스탈린은 특히, 농업의 집단화로 인한 농민의 가축 도살 등으로 집단화의 차질을 우려하여 무엇보다도 트랙터 생산이 긴급과제였고, 이것은 군수산업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농업혁명(The Enclosures)과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의 결과 재산 없는 프롤레타리아(Propertyless Proletarians)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양태가 모든 서구라파에서 일어날 것을 예측했고, 마르크스가 소련을 이러한 상황에서 제외시킨 것은 지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였다.

 

제정러시아는 산업구조가 주로 농업이었고, 이것을 뒷받침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농노제도(Serfdom)였으며, 노예를 해방시키고 난 다음에도 러시아에는 산업 자본의 축적이라든가 서구에서는 이미 발전을 본 은행조차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정러시아의 지도자들은 구라파를 동경할 때는 주로 서구의 기술과 자본이었지 문화는 아니다.

 

이처럼 마르크스가 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소극적으로 보고 혁명 후에 막연한 콤뮨을 연상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주장하여 혁명 후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후에 볼셰비키 자도자인 레닌(Lenin) 역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가 제국주의라고 부르던 독일과의 브레스트-리토보스크 조약을 체결했듯이 당시 국제정세가 전쟁으로 치닫자, 스탈린은 이에 대하여 러시아의 현실적인 여건 하에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소련 국력의 낭비이며,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소련을 강화하는 것만이 오히려 세계혁명에 착실한 준비 작업이라고 그럴듯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즉 각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므로, 혁명은 몇 개의 국가 또는 한 나라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제시하기 위해 1915년 레닌이 언급한 주장까지 끌어 들이면서,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의 간섭과 포위되어 있는 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안전할 수 없다고 보고 세계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 세계혁명이 발생하여 소련 주변에 있는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로 변화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함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포위에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소련 자체만이라도 국가건설에 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트로츠키의 혁명이론에 의하면 1905년「피의 일요일」로부터 시작하여 1917년의「2월 혁명」과 동년 11월의 쿠데타에 의한 볼셰비키의 정권장악, 그리고 그 후 계속하여 일어난 정치 • 사회 • 경제상의 일련의 제 변혁을 통칭하는 「소련혁명」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혁명인가? 특히 이 「소련혁명」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며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소련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의 「소련혁명」의 성격형성의 과정과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사회주의자의 할 일은 부르주아 혁명이 완성된 후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가 기술적 및 경제적으로 너무나 뒤떨어져 있음으로 러시아 단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진 공업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단계의 혁명이 성공하면 무산계급을 지원한 부르주아 뿐만 아니라, 농민대중과 충돌을 갖게 되는데, 이때 선진공업국에 산재한 국제적 규모에 지원 없이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세계적인 혁명만이 러시아혁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서구제국의 동시 혁명론을 주장하게 되고 러시아에서의 국내 경제정책이 더욱 더 많은 자본주의 요소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 것은 꼭 일어난다는 투철한 신념에서 주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는 그 당시 구라파가 혁명조건이 점차 무르익어 러시아혁명이 구라파혁명의 서곡으로 보았으나, 독일에서 일어날듯 하다가 일어나지 않고 폴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확신했으나, 이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도 일국 사회주의론을 트로츠키를 배격하는 권력투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기의 독재체제를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이론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스탈린은 1917년7월26일 볼셰비키 당 대회에서 정치국(Political Bureau)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임시 조치로 발족시켰을 때, 정치 거물인 지노비에프(Zinoviev), 트로츠키(Trotsky)등과 함께 정치국요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9년부터는 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시민전투 기간 중에는 여러 지역의 전방에서 정치담당 코미사르(Commissar, 소련 인민위원회의 장관, 1946년 이후에는 Minister라 칭함)로 활약하였다.

 

제 11차 소련 전당대회(레닌은 와병으로 불참)에서 그는 당 서기장이 되었다.(1921년4월3일) 그러나 그 후 러시아가 분열 될 조짐이 보이자, 그의 코카서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민족주의적 정책은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만 해당된다고 재빠른 수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1922년 12월에 레닌으로부터 신랄한 비평을 받았으며, 레닌(Lenin)은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에 당이 분열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1923년1월4일 그의 마지막 논문(유서로 알려져 있음)에서 스탈린의 서기장직 해임을 요구하였다. 즉 레닌은 스탈린의 행동을 비판했고 스탈린을 제거하려고 했다. 사실 레닌(Lenin)은 그 유서를 1923년 봄 제 12차 당 대회에서 공개하려고 했으나, 1922년12월 두 번째 뇌출혈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1923년3월 다시 마비를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어 그 유서는 그가 죽는 1924년 1월까지 공포되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레닌의 와병 중 모든 일처리를 사실상 스탈린, 지노비에프, 및 카메네프에 의하여 처리되는 삼두체제(Troika)였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레닌의 명령에 따라 당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한결 같이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3두 체제나 트로츠키 간의 대결은 치열했다.

 

이 유서는 후에 공개되었지만 레닌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관계를 경고하고, 스탈린은 거대한 권력을 손에 넣고 언제나 조심성 없이 행사하고, 트로츠키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신감에 젖어 있어 순전히 행정적인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평가했다. 그러나 레닌은 결국 당의 신참이자 혁명전까지도 자신에게 비판과 반대해 오던 트로츠키를 택한 것 같다.

 

트로츠키는 대중폭동 명수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로써 스탈린의 무명성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원래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또는 볼셰비키도 아니었다가 1917년 볼셰비키에 가담하고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레닌과 비슷한 정도의 공을 세웠으며 내란을 진압하여 승리로 이끌고 적군(Red Army)을 창건했기 때문에 군부와 청년 공산당원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트로이카 체제와 트로츠키 간의 불화가 점점 더 커지자 트로츠키는 그의 오랜 적대자 구셰프(Gusev)를 제거하고, 자신의 측근인 오보셍코(Antonov-Ovsenko)를 군 요직에 앉히는 등 자기세력을 강화 정비하였다.

 

반면에, 공산당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나선 스탈린은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과 손을 맞잡고, 서기국의 서기장, 조직국, 정보국 등 당의 중요 직을 장악함으로써, 러시아를 장악할 정도의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스탈린은 점점 더 지방까지 자파세력을 부식시키고 지노비에프(Zinoviev), 카메네프(Kamenev)의 지지를 확보해 가면서 너무나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레닌조차도 초기에는 이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의 관료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어 당을 장악하고 있던 조직국과 비서국은 어떠한 타 집단의 권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지방 당 기구들의 통제, 당 대회 대의원의 직접위임 및 그의 탁월한 조직력을 동원하여 신 레닌파를 중요보직에서 제거, 또는 탈당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스탈린은 레닌의 사망 후 당의 주요 간부였던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공모하여 레닌의 유언서를 공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카메네프 등과 협력하여 우선 트로츠키를 몰아내고 삼두체제가 확립되자, 스탈린은 다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를 몰아내기 위하여 부하린(Bukharin), 톰스키(Tomsky) 등에 협력을 얻어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등을 몰아내고, 이것으로도 만족 못하여 스탈린은 지금까지 협력해 온 부하린, 톰스키 등을 중공업 우선정책에 반대한다고 하여 이들 부하린, 톰스키 등을 중앙당에서 몰아낸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y, 1879~1940), 지노비에프(Grigori Evseenvich Zinoviev, 1893~1936),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 1888~1938), 류코프(Alexander Rykov)등은 스탈린에 해서 숙청당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처럼 그는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즘을 최대한도로 사용했다. 지금부터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몰아내기 위해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등과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이루었던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마저 몰아내고, 다시 이들을 몰아내는데 협력한 우파 지도자를 다시 몰아내게 되어, 명실상부한 1인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스탈린의 권력 탈취과정을 살펴보자.

 

트로츠키는 1923년12월8일 신 노선에 관한 서간(Ltter on the new course)에서 당내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당 내부의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을 맹렬히 공격하고 1924년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과 지노비에프 및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제각기 폭발점에 이르고 있었다.

 

동년 가을 볼셰비키집건 7주년에 즈음하여 트로츠키가 1917년이라는 수필집을 간행했는데 책의 제목이 10월의 교훈(Lesson of October)이었으며, 여기서 트로츠키는 1923년의 독일에서의 봉기실패와 1917년 10월의 레닌의 혁명계획에 대한 일부 볼셰비키들은 특히 지노비에프(Zinoviev)와 카메네프(Kamenev)가 볼셰비키 집권을 반대했다고 풍자적으로 신속하게 비판해 나갔다. 이에 대해 트로이카 체제의 스탈린은 당의 모든 선전 기관들을 동원하여 트로츠키는 10월 혁명과 무관한 자라고 한다. 즉, 10월 교훈(Lesson of October)으로 트로츠키가 스탈린, 지노비에프 및 카메네프를 싸잡아 공격하기 때문에 이들 트로이카 체제는 트로츠키(Trotsky)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구심점을 찾게 되었다.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10월 혁명 직전의 행동에 대해서 볍게 넘어갔고 이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맞수 트로츠키를 때려 부수는 것이 급선무였다.

 

트로치키의 세계혁명론과 일국 사회주의론에서 트로츠키(Trotsky)를 패배시키고,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기반인 국방장관직을 박탈당하자, 일단 스탈린의 강력한 상대자는 제거하여 자연히 트로이카 체제의 공동의 전선은 와해하게 된다. 따라서 스탈린의 관심은 자연 지노비에프의 위치를 약화시키려는 태도였다. 지노비에프는 강력한 레닌그라드(Leninqrad, 레닌 사후 Petersburg를 Leningrad로 개칭) 지구당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레닌그라드 지구당은 페테스브르그(Petersburg)시절 못지않게 강력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레닌그라드의 당원들은 외형상 무산계급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극단적인 반농민의 견해(Anti-Peasant View)를 추종하게 되었다.

 

볼세비키 당내에는 우파(right wing : Bukharin, Tomsky)와 좌파(Left wing : Zinoviev, Kamenev) 등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문제는 농민정책에서 우파가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하자 이것은 마르크스 개념에 수반된 딜레마였다. 즉 부하린(Bukharin) 등의 정책은 러시아가 아직 태반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오직 토지에 집착되어 있어 토지를 몰수한다는 것은 이들 농민들에게 하나의 반항의 구심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은 전통적인 볼셰비키 농민정책으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좌파 지노비에프는 진짜 레닌주의에 따르면 신경제정책(NEP)은 하나의 발전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라고 주장하면서 경제정책의 의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가난한 농민에게 우선시하여 중앙집권 하에 급속한 공업화와 농지를 몰수하여 기계에 의한 집단 농장을 실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스탈린은 자기 권력에만 관심을 가진 야심에 찬 마키아벨리(cynical Machiavellian)이었다. 우선 우파가 자기의 생각과는 달라도 트로이카 체제를 깨는 것만이 그의 의도였으므로 우파와 연합하여 자기의 생각과 같은 좌파를 깨는데 경주하여 일단 트로이카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지노비에프의 튼튼한 기반이고 아직 스탈린의 영향을 덜 받는 레닌그라도 조직의 붕괴에 힘을 기울였다.

 

스탈린은 우파의 정책을 택하고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노비에프가 무리한 발언을 했다고 하여 지노비에프를 지지한 잘루츠키(Zalutski)를 우선 제거하자 여기서부터 볼셰비키의 권력다툼은 본격화되었다.(후에 리코프와 부하린은 스탈린에 의해서 총살당하였다.)

 

스탈린에 의하여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등 좌파세력이 약화되자 트로츠키와 좌파 간의 협력으로 스탈린에게 최후의 도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트로이카 체제의 한 사람이었던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간의 위협은 많은 문제가 있었다. 과거에는 서로 적이었지만 오늘의 공동의 적인 스탈린과 대결하는 데는 과거에 있었던 양자 간의 서로 공격하고 비난한 문제들을 제거해야만 타합이 가능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Lessons of October)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 대한 공격을 철회하고, 대신 지노비에프는 1923년 스탈린의 정당 구조에 대한 관료주의(bureaucratism)라고 비난한 트로츠키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5년12월 제 14차 당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 중앙위원회에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은 우파의 마르크시즘 궤도 이탈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할 것을 주장하여 그들의 일부 주장이 받아들여져 농업정책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와 아울러 농민 부유층인 클라크의 위험성 문제도 경고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좌 • 우파가 만족한 듯 했으나 스탈린이 그때부터 지노비에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있던 중 전당대회 전날 밤 모스크바 당에 호의적인 인물들을 레닌그라드 좌파들에 의해 배제시키고 자기들 좌파들만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자, 모스크바 중앙당은 레닌그라드 당을 공격하였으며 레닌그라드 당도 이에 맞서 양측은 각자가 지배하는 보도기관을 통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 대회 직후 스탈린은 카메네프만 제거하고 지노비에프는 당분간 정치국원으로 남겨 놓았다가 그 다음 해인 1926년1월 스탈린은 무력해진 이들 세 사람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지노비에프는 코민테른(comintern), 트로치키는 정치국(polit-buro)에서 추방시키고, 카메네프는 후보국원(candidate member)에서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3인은 새로운 비밀조직을 구축하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하던 중 1927년 상해에서 장개석에 한 중국공산주의자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이들 3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당 지도층에 대한 반격운동을 시도하여 1927년5월25일 코민테른(comintern)의 실패와 국내정치 전 과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와 더불어 예기치 않은 사건이 또한 발생하였다. 즉 런던 주재 러시아 무역대표단 사무실을 영국 경찰이 습격하여, 영국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계획과 상황이 발견되자, 러시아내 당권파와 비당권파 모두가 전쟁의 위험이 도래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 15차 당 대회가 12월 2일로 확정되자 이것이 스탈린에 대한 최후의 공격기회로 삼고 새로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즉 당 대회에 의해 선출되는 중앙위원회가 대중과 밀접히 연관되어야 하며, 중앙위원회를 당 기구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특히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을 프랑스혁명과 비교하여, 로비스피에르(Robespierre)의 공포(Treeor) 즉 테르미도르(Thermidor)에 도달했다고 스탈린을 비판하게 되었다.

 

이때 스탈린은 심복 모로토프(Molotov)를 레닌그라드로 급파시켜 반항적인 당 관리들을 다른 부서로 이동시키고 스탈린을 찬송하는 요원으로 충원시켜 지노비에프를 고립시킨 다음 지노비에프를 레닌그리드 소비에트 의장직(Chairman of the Leningrad Soviet)에서 제거하자, 트로이카 체제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스탈린 지지자인 모로토프(Molotov), 칼리닌(Kalinin), 보로실로프(Voroshilov) 등 3인이 정치국원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트로츠키와 연합한 좌파 세력들은 전쟁이 발생할 경우 성공적으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현 지도층을 바꾸고, 현재 수정주의로 낙인찍힌 외국 공산당의 혁명투사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7년11월7일 볼셰비키 집권 1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자 이들 비당권파를 지지하는 데모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시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은 무반응이었고, 강력한 경찰과 깡패를 동원하여 데모대를 진압하였다. 스탈린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어 동년 11월14일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및 그들 추종세력 75명도 함께 당에서 쫓겨냈다.

 

또한 스탈린은 1929년2월 우파 지도자들이 반동분자 카메네프와 접촉한 사실을 들어 이들에게 당기 위반행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면서 부하린의 가장 중요한 과오는 카메네프와 접촉한 행위와 당 지도부가 농민을 착취한다는 언급은 반혁명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 우파집단에게 그들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 집단이 거부하자 1929년6월2일 톰스키(Tomsky)는 노동조합장(head of the trade union)에서 쫓겨나고, 동년 7월3일 부하린(Bukharin)은 자본주의자들과 결탁했다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축출하였으며, 리코프(Rykov)의 마지막 직책인 중앙인민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에서도 축출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회개(repentance)하고 재입당을 탄원하여 복권이 허용 되었지만 그 기간은 잠시였으며, 트로츠키는 회개를 거부하고 그가 이끄는 30명의 추종자와 함께 중앙아시아 알마아타(Alma Ata)로 추방되었고, 그 후 멕시코로 영구히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멕시코로 떠난 12년 후 스탈린은 그의 하수인을 시켜 멕시코 현지에서 등산용 지팡이로 트로츠키를 살해함으로써 좌파 연합세력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40년6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이른바 전격전(Britzkrieg)으로 의외로 신속하게 승리를 거두자 이에 당황한 스탈린은 발칸에 진출하여 루마니아로부터 벳사라비아와 부코비나(Bucovina)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은 독일 발칸진출에 길목으로 히틀러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한편 이번 전쟁을 히틀러(Hitler)의 입장에서 볼 때,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것은 영 • 불과 소련을 동시에 적으로 하여 싸운 결과, 독일이 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번 전쟁에서는 강대국을 동시에 적으로 하는 양면전쟁을 피하는 것이 히틀러의 과제였다. 즉 후방을 일시적으로 묶어놓고, 서방을 공격하고, 서방을 평정한 다음 소련을 점령하려는 생각에서 당장은 소련에 중립이 필요했다. 그래서 양국의 관계는 긴장의 관계로 변하자, 우선 히틀러는 소련 국민에 대하여 소비에트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1940년11월13일 소련의 모로토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독일 외상과 베를린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협상에서 모로토프는 히틀러로부터 대영제국이 지니고 있던 많은 영토를 양도해 주겠다는 약속만을 할 뿐, 소련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핀란드, 불가리아, 터키 해변지역 등과 같은 소련국경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히틀러는 독 • 소 불가침 조약을 이용하여 발칸으로 팽창하여 가는 소련세력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좌시할 수가 없었다.

 

모로토프는 다시 베를린을 방문하여 루마니아, 핀란드, 불가리아 등의 문제를 토의했으나, 양국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Osperation Barbarossa)이라는 명령을 내려, 독일군은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이라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소련을 초토화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독일은 남쪽으로부터 영국에 의한 위협을 느끼게 되어 지중해의 영국기지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가하고 그리스를 침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독일이 그리스의 육로로 침략할 경우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를 통과해야 했다. 1941년2월 말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의 압력에 의하여 굴복하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독일에 굴복한 것에 대하여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친소 정권이 수립되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틀러는 전격 작전을 펴 벨그라이드를 잿더미로 만들고, 유고슬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영국을 제외한 전(全) 구라파를 석권하고, 1941년6월22일 갑자기 소련을 침략하여 독 • 소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당황한 스탈린은 자기가 주장하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당의 이념을 뒤로 숨기고, 형제자매, 또는 조국의 이름으로 침략자를 무찌르자고 호소하는 등 민족과 계급이 없다는 소련에서 민족주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전쟁기간 중 공산당의 성격규명과 본래의 개념과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마르크스가 특히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이었고, 이것이 레닌(Lenin)시대에 와서는 전위당이었다.

 

즉 스탈린은 노동적 계급의 독재를 달성 • 유지하는데 필요한 도구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멸한다면 당도 역시 사멸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와 레닌의 전위당 개념을 원용하였다. 이처럼 당은 소련에 있어서 불가피한 요소라고 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이 강해져야 되고, 만일 당의 행동 통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을 돕는 결과로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한다고 스탈린은 강조하였다.

 

1943년11월 전쟁이 소련 쪽으로 유리해지자 스탈린은 그의 태도를 돌변시켜, 전쟁의 어려운 시기 중, 농민을 회유하여 집단농장으로 폐지니, 형제자매니, 민족이니 하는 표현은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다시 강조하여 당이 무장 투쟁을 하는 주체이자 눈앞에 보이는 승리를 촉진시키는 선봉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전후 스탈린은 다시 숙당작업을 실시하고 전시 중 러시아인이 소비에트 연방에 속하는 모든 민족 중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민족을 지도하는 세력(leading power)이라고 정의하였다.

 

스탈린은 1952년 공산주의에로의 전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전제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첫째, 중공업을 기간으로 하여 조속한 경제성장을 기하며 둘째, 중앙집권 혹은 기타 사회경제적 중심 기관들이 사회생활의 모든 생산품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집단경영에서 일반적 인민소유제(국가통제 경영)로의 전환과 생산품의 유통을 교환제로 대체해야 하며(이는 상품거래의 폐지와 경영의 보다 강한 중앙집권화를 의미한다) 셋째, 주당 노동일을 6일로 단축하되 후일 가능하다면 5일제도 도입하며,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배가시키고, 대중 소비상품의 가격을 인하시키며, 일반당원들에게 보다 나은 직업선택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면 누구나 그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그의 필요에 따라 충족되는 공산주의 원칙들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스탈린은 공산주의사회에서의 특징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가운데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공산주의사회에서도 대도시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며, 또한 새로운 도시들도 생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시와 농촌 간의 완전한 격차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적 및 정신적 노동의 차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격차는 없어지지만, 어느 공장의 지도적 인사의 노동조건들과 단순한 노동자의 노동조건들이 상이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격차는 존속될 것이라고 그는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스탈린은 장차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해도 도시와 농촌의 격차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차이의 완전 해소는 불가능하다고 예견하였다.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스탈린의 지배말기(1945~1953)에는 소련학자들이 외국의 이론과 업적들을 과대평가 했다는 소련공산당의 비난과 함께 소위 반세계주의 운동이 일어났었다.

 

또한 이 기간에 소련공산주의가 제정러시아의 제국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역사는 오히려 18~19세기동안 제정러시아가 비 러시아인과 그 지역을 정복했던 것을 진보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즉, 1812년 나폴레옹 전쟁시 출정했던 러시아 군대는 승리를 가져왔으나 그들이 점령지역에서 본 문화는 러시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그 후에 러시아에 돌아와 젊은 장교들이 제정러시아에 반기를 드는 혁명에 앞장을 섰고, 또한 자유주의 사상이 러시아에 싹트게 된 것처럼 이번 전쟁 역시 많은 불리한 점이 생겼다. 즉, 자기들이 그렇게도 주장했던 마르크스-레닌 이름의 정통성의 문제다. 지금까지는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던 이들과 공동전선을 폈다는 점과 전후 지식인들이 과거처럼 스탈린이 획일 체제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경향들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지식인에 대한 공격은 주로 1946년과 1950년 사이에 가해져 모든 창조활동과 학술활동에 박해를 가하여 서구적인 영향과 영향의 뿌리를 뽑고 당의 통제력 재확립의 목적을 우선정책으로 삼았으며, 19차 전당대회에서는 정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제국주의를 다시 들추어내서 마샬플랜(Marshall Plan), 한국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의 최후의 발악이라고 주장하면서 앞으로의 전쟁은 소련과의 전쟁보다는 제국주의자들끼리 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소련과의 전쟁은 곧 자본주의의 생존자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즉, 스탈린은 말하기를 현재 서독, 영국, 프랑스, 이태리, 일본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으나, 이들은 곧 독자적인 발전을 취하려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는 마샬플랜 또는 원조라는 위장아래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에 놓이게 되며, 이 경제적 식민지는 다시 미국과 충돌하게 된다.

 

둘째, 서독과 일본은 미국 점령 정권에 속박되어 있다. 독일은 1차 대전이후 결정적으로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패망한 지 불과 15년 혹은 20년 후에 대국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독일과 일본은 다시금 자립하여 미국의 속박을 벗어나려고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필연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를 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탈린은 이렇게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을 자기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스탈린이 전후에 당면한 새로운 문제 중에 하나는 유태인 추방과 학살이다. 초기의 볼셰비키당의 유태인들은 벌써 추방되었으나 전쟁기간 중 유태민족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 고무도 하고 자유로운 활동도 허락하였다. 이것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수단이었다. 즉, 서방세계에 널리 흩어져 사는 유태인들에게 반 히틀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전후 카가노비치(L.M. Kaganovich)를 제외하고는 당내 고위직에 유태인들의 이름은 없어졌고 1949년에는 모든 유태어 간행물은 폐간시키고 유태인 주장이 폐쇄되었으며 1952년에는 모든 유태지도자들이 총살되었으며 많은 유태인이 체포되어 거주지를 시베리아로 이전했다. 이러 당내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준비하던 스탈린은 1953년3월5일 뇌출혈(haemorrhage of the brain)로 사망함에 따라 새로운 숙청은 없었고, 사망 후 약간의 변동은 있었으나, 곧 흐루시쵸프(khruschev)가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가 소련을 지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