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7/100회_혁명의 끝.

 

 

4. 흐루시쵸프시대 이후 ~

 

1953년3월7일 즉, 스탈린이 죽은 지 이틀 후 말렌코프(Malenkov)는 각료회의 의장에, 베리아(Beria), 모로토프(Molotov), 불가닌(Bulganin), 카가노비치(Kaganovich) 등은 상임간부회의(Presidum)에 자리에 앉고, 베리아(Beria)가 내무업무를 통괄하고, 모로토프(Molotov)가 외무상, 불가닌(Bulganin)이 국방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렌코프, 베리아, 흐루시쵸프(Khruschev)의 트로이카(Troika)에 의하여 인도 되는 집단체제(collective leadership)를 형성하였다.

 

1953년7월10일 베리아의 구속사실이 공개되어, 베리아 대신 모로토프로 대체되었는데, 베리아의 구속사실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의 실각은 과거의 부정에 대한 책임을 그 한사람에게 씌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추측뿐이다.

 

동년 9월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Socialism)을 달성하고, 정통적인 견해(Orthodox formula)를 지지하는 대신에 소련은 아직 사회주의의 사회기초(The foundation of socialist society)를 건설하는데 놓여 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과오(ideological error)를 범했다고 비판을 받고, 말렌코프, 흐루시쵸프, 모로토프 등으로 새로우 구성된 집단체제는 곧 권력투쟁의 시초인 의견의 상위성이 드러났다.

 

1955년 흐루시쵸프(Khruschev)는 오스트리아(Austria)와 평화조약체결, 유고(Yugosluvia)와 화해, 제네바(Geneva)에서의 아이젠하워(Eisenhower)와 정상회담을 갖는 등 대외관계의 개선에 의하여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래서 흐루시쵸프는 마르크스(K. Marx)의 기본적 주장, 즉 자본주의 국가와 불가피한 대결, 또한 스탈린(Stalin)이 말하는 자본주의 포위론으로 인한 중공업 우선정책을 실시하여, 전쟁을 꼭 해야 한다고 하는 스탈린의 주장을 비난하여 이미 소련은 그 힘이 막강하여 자본주의 국가와의 분쟁을 반드시 전쟁으로만 해결될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현재와 같은 핵시대 하에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지금까지 투쟁하여 이룩한 사회주의가 무너질 염려가 있고, 또한 그 당시의 핵 경쟁으로 보아서 미국이 우위에 있음이 주지의 사실일진대,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당장 핵무기로 대결하는 것보다, 장차 있을지도 모를 핵전쟁에 대비하여, 소련의 핵 우위가 확보될 때까지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는 속셈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볼 때 흐루시쵸프의 평화공존의 개념 속에 숨은 계략(trick)이 바로 오늘날 핵무기가 발달한 상황에서 핵전쟁을 치르는 대신에 이데올로기 투쟁(ideological struggle)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에 강력한 경제적인 경쟁을 토대로 하여 세계를 정복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1955년2월 말렌코프를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고, 그 대신 국방상 불가닌(Nikoloa Bulganin)이 들어서게 되어, 제 3차 새로운 트로이카 체제(흐루시쵸프, 모로토프, 불가닌)가 형성되었고, 불가닌 후임에는 전쟁영웅 주코프(Zhukov)가 국방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새로운 트로이카 체제에서 결정적인 대결은 흐루시쵸프와 모로토프의 대외문제였는데,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놓고 일어났다.

 

1955년5월 흐루시쵸프를 대표로 하는 소련대표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들러 스탈린에 의해 국제공산주의에서 파문당했던 티토(Tito)와의 관계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고 그 불화의 원인을 베리아에게 돌렸다. 물론 이때 대표단에는 모로토프가 빠져있었고, 모로토프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반대했다. 그는 1955년7월 중앙위원회에서 흐루시쵸프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는 앞으로 동구지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반대했으나 아무도 그에게 지지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흐루시초프는 소련정치의 정당성의 결여를 불식시키기 위해 1956년 2월 14일에서 25일까지 계속된 소련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자, 이것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처음 열리는 당 대회였고 어느 정도 소련 내의 과도기가 지나 흐루시쵸프의 기반이 확고하다고 판단될 때 열렸다.

 

당 대회에서 미코얀(Mikoyan)의 연설은 최초로 스탈린을 공공연히 비판함으로써, 당 대회의 분위기를 술렁이게 하였다. 그의 언급을 볼 것 같으면 마르크스 자신도 비난한 바 있는 개인숭배에 대하여 지난 20년 간 소련은 개인숭배 하에 살아왔다고 솔직히 시인하는 장면이었다. 흐루시쵸프의 비공개 야간회의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라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연설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발전의 기초노선을 포괄적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 요지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주창해 왔던 자본주의 포위론과 전쟁불가피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획기적인 평화공존론을 제창하였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상이한 양 체제의 역사적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고도의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를 능가하는 것만이 그들의 경제적인 최대 임무라고 선언하였다.

 

흐루시쵸프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매력이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보다 안정된 생활수준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10월 혁명 이래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스탈린의 독재로 인민들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으며, 미국을 비롯한 기타 선진 국가와의 격차는 여전하므로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 인민들에게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생활수준을 보장해 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흐루시쵸프는 동구권 내에서 이미 사회주의국가 체제가 확립되고, 제 3세계에서의 비 식민지화 내지는 비동맹운동이 결성됨으로써 세계구조의 점진적 변화를 인지했기 때문에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에서 논의된 전쟁 불가피론의 원칙을 수정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전쟁 가피론을 제시하였다. 이론과 체제를 달리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전쟁 가피론의 사고방식은 더 나아가 두 개의 상이한 체제에서 평화공존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발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흐루시쵸프는 그의 평화 공존론의 이론적 근거를 한편으로는 레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1955년 4월에 개최된 ‘반둥 비동맹론’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반둥회의는 민족의 독립과 평화적 공존을 장기적으로 지속케 할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를 만들려고 했던 반면, 레닌은 세계 혁명의 승리는 그가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는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국의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달성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탈린의 이론과는 상반되었지만, 레닌의 이론과는 거의 일치하는 사회주의에로의 전이의 상이한 형태들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소련의 몇몇 지도자들은 흐루시쵸프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였으나, 국방상 주코프(Zhukov)원수가 흐루시쵸프와 밀착되어 주코프가 중앙위원들에게 군사력을 과시(Show of military force)함으로써,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 후 스탈린을 비난 한다는 것은 흐루시쵸프를 포함한 당시의 지도자들이 스탈린 비행에 연관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더욱이 개인숭배에 대한 비난은 창작문학, 회고록 등을 통해 과거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솔제니친(Alexander Solzenitsyn)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솔제니친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직접수용소에서 체험한 것을 소설 형식으로 지은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작품 활동을 하여 암 병동(Cancer Ward)등이 나왔다. 이러한 문학 활동을 비롯하여 전 분야에서 비판의 홍수를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여하튼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평화공존론은 대내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야기 시켰으며, 대외적으로 중 • 소 이론 분쟁과 더 나아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분열을 유발시켰다. 그 결과 흐루시쵸프와 그 지지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스탈린식의 교조적 해석을 수정 •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소위 무류성의 신화는 여지없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1956년10월 헝가리(Hungary)에서는 노동자,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데모가 발생하고 계속하여 소요가 일자 드디어 소련의 무력 개입이 있었고 폴란드(Poland)에서도 노동자들이 궐기하여 소련 원수출신인 로코소프스키(Rokosovsky)를 포함하여 평판이 심하게 나쁜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물러나고 1948년 스탈린에 의하여 숙청 되었던 고물카(Waladyslaw Gomulka)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등 동구라파 일대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문제가 최대로 표면화된 것은 1961년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22차 당 대회였다. 당 대회는 방부 처리된 레닌의 묘 옆에 자 리 잡은 스탈린의 시체를 꺼내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국내에서는 스탈린 동상이 파괴되고 레닌의 무덤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스탈린의 시체를 파헤쳐 붉은 광장의 공산당 일반간부의 묘지로 옮겨 묻는 등 여러 곳에서 탈당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련정치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새로이 조명한 당 강령은 변증법 및 역사적 유물론이 자연 • 사회 및 인간사고의 가장 보편적인 발전 법칙들의 과학으로써 계속해서 방어되고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지만, 내용 역시 당 강령 초안이 발표된 후에야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조건의 실질적 향상보다 훨씬 소홀히 취급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본 당 강령은 앞으로 20년이 걸리는 2단계 경제계획(1961~1980)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 계획이 끝날 때에는 당과 소비에트 인민의 경제적 주 임무는 공산주의의 물질적 • 기술적 토대를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정치지도자들은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심사숙고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새로운 경제 • 사회정책을 인민에게 제시하여 인민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고 둘째, 대외정책의 새로운 대안으로 평화공존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변화된 국제정세에 부응하여 국제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셋째, 이러한 국내외정책들과 함께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확보 •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인 활성화의 기초 작업으로써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을 종합해 볼 때 흐루시쵸프 시대의 소련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주 기능은 스탈린 시대의 무조건적인 사회동원보다는 오히려 흐루시쵸프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고도로 발달된 서구산업 국가들의 생활수준을 능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며, 나아가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모델을 모방하고자 한다는 오해의 소지를 사전에 예방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흐루시쵸프의 정치적 신념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기술 진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소련의 실질적인 경제발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소련농업의 저조한 생산성, 개별산업 분야의 불균형적인 발전, 즉 중공업 분야와 경공업분야간의 불균형과 계획경제 체제의 약점들은 소련의 경제가 서구 선진국에 비해 낙후성을 면치 못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흐루시쵸프(Khrushehev)의 수상직 및 서기장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5년 만에 모든 면에서 몇 차례의 삼두체제를 거쳐 스탈린 이후 비교적 안정된 정권을 쟁취하였지만 동시에 너무나 폐쇄된 사회에서의 개방정책이 몰고 온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정책은 동시에 권력 이탈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세웠던 정책적 목표와 그 현실적 수단 간의 괴리가 너무 커서 그 경제 정책의 실패는 오히려 그 자신의 몰락과 상충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 외에도 흐루시쵸프가 권좌에서 몰려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의 실각의 이유는 1962년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을 배치하려다가 발각되어 케네디(Kennedy) 대통령의 핵전 불사의 단호한 대처 앞에 굴복하여 강대국으로서의 소련의 위신이 하락하자 여기에 대한 흐루시쵸프의 무모한 정책에 대해 비난이 뒤를 따랐다. 더욱이 월남 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을 중지시키고, 핵시대에 있어서 재래식 무기의 감축을 주장하여 이것 역시 군부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두 번째의 실각의 이유는 흐루시쵸프가 스탈린의 1인 독재를 신속하게 비난하여 집단체제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일이 지나가면서부터 집단지도체제는 말로만 강조했으면 점점 더 1인 독재가 되어갔다. 이것은 스탈린시대에 간신히 숙청을 면한 많은 당원들에게는 흐루시쵸프가 집단화를 버리고, 1인 독재체제로 나갈 경우, 다시 스탈린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나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더욱이 흐루시쵸프 단독으로 계획하고 실천한 농업문제가 정체상태에 빠지고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양곡을 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실각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흐루시쵸프 자신도 몰랐다. 즉 그는 흑해 연안 소치(The Black Sea resort of Sochi)에서 휴양 중이던 1964년10월14일 모든 직위에서 해임 되었다고 10월 16일자 프라우다(Pravda)지가 발표했다.

 

동년 10월15일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가 중앙위원회 제 1서기로 임명되었다고 발표되었고 16일에는 코시긴(A.N. Kosygin)이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표되었으며, 흐루시쵸프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발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특히 신기한 것은 흐루시쵸프는 자기를 떠받치고 있던 심복들, 즉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르니(N.V. Podgorny) 등의 음모에 의해서 실각되었다는 점이다. 흐루시쵸프 실각이후 소련은 1인 체제가 아닌 집단체제를 변호하게 되어 10월14일 흐루시쵸프가 실각되었다는 발표와 함께 앞으로는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각료회의 의장직을 1인이 차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상과 같이 흐루시쵸프의 실각은 조용한 가운데서 정권이 교체되었고, 흐루시쵸프는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7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