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9/100회_혁명의 끝.

 

 

제 3 절. 중국공산화 이념의 역사적 배경

 

1. 손문 시대 이후

 

근대화된 서양의 제국주의는 아편전쟁(1839~1842)을 계기로 하여 1세기 동안 중국대륙을 유린하였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황제국 이었던 중국은 근대화과정 속에서 찬란한 문화 전통과 낙후된 경제구조와의 모순을 드러내었다. 이에 따라 청조는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서세 동점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차츰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은 광동의 영국 무역상을 보호하던 소규모의 영국군 함대의 공격에서 비롯되었으나 청은 대결할 능력이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이에 1842년 영 • 청간에는 남경조약이 체결되었고, 그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영국의 중국침략을 보아 온 다른 서구 열국들은 다투어 중국에 진출하여 약 80년간이나 중국에 대한 정치 •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영 • 불군에 의한 전쟁(1857~1860), 청 • 불 전쟁(1884), 청 • 일 전쟁(1894), 의화단 사건으로 인한 8개국 연합군에 의한 전쟁(1900), 일본의 산동반도의 침략 등 열국과의 전쟁에서 연패한 중국은 많은 배상금과 영토 및 주권의 양보(치외법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열국들은 중국을 분할 점령하고 있었으나 국토가 방대하고 열국들의 이해가 대립되어 완전한 식민지화는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에 대해 무력하게 굴종하는 청조를 중국인들은 불신하게 되었고, 나아가 구국을 위한 봉기까지 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중국남부에서 발생된 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1851년 1865년 사이에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은 아편전쟁 후 열강의 침입 앞에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여 농민의 생활 곤란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1853년 당시 무릇 민주혁명 시기에 반공분자 진백달의 패거리는 공자를 우주의 위인이라고 추켜세우고, 공자 • 맹자의 귀중한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여야 한다고 떠들어 대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보급을 저지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반도 류소기는 한 때 공자묘에 배알하고 공자 • 맹자를 찬양하였다. 나아가 매국노 임표 또한 공자를 추켜세우고, 진시황제의 금서향유를 크게 욕하였다. 이들 소련 수정주의 반도집단은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여, 존유 사상을 고취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진시황제를 공격하였다.

 

소련 수정주의 제국주의가 고대 반동분자인 공자를 열심히 추켜세운 목적은, 류소기, 임표와 같은 현대 중국의 공자를 지지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반론을 제기한 홍수전은 공자와 임표를 한데 묶어 비판하는 비임비공 운동을 전개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함으로써, 노예매매를 금지시키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민족주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수전이 난을 일으킨 것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주가 되어서 일으킨 것이라며, 공산주의 이론과는 대치되는 것이다. 라고 볼 수 있으며 자기들에게 이 난을 혁명이라 보고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삭제하고, 난의 과정만을 확대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홍수전의 난의 반공과 존공의 치열한 투쟁으로서, 이는 곧 혁명농민과 지주계급간의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의 반영인 것이다.

 

이렇듯 19세기 말기의 중국현실은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특히 의화단(Boxers)사건은 중국인들의 열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던 개혁운동이 좌절됨에 따라 야기된 척양운동이었다. 따라서 의화단사건은 배외 • 배청적인 일면을 띄게 되었고, 민족주의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그 대표적인 지도자가 손문(Sun Yat-Sen)이다. 손문의 혁명운동도 반 왕조 또는 배청적 성격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외국에서 많은 격려와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손문은 1911년 그들이 청조를 전보시킬 때까지 무려 10회의 혁명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를 거듭했고, 1911년10월10일 군벌들의 동조를 얻어 신해혁명이 성공되었고, 이듬해 1월1일 광동에서 중화민국이라는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손문은 일 국민당 정강의 기초가 되고 있는 소위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발표하고 중국의 전통문화와 경제적 근대화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삼민주의를 오권 분립주의 헌법을 통해서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입법 • 행정과 사법 이외에도 두 개의 감독기구(감독국과 시험국)를 두고, 행정과 입법기관을 선정 • 감독하는 기능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청나라의 군부 실력자 원세개가 출현하여 중화민국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청나라의 내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은 1914년 제 1차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산동성에 있는 독일 조차지를 강점하여 중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 제 1차대전시 연합국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나, 일본은 베르사유조약을 근거로 하여 독일이 청나라 때 강점했던 점령지를 일본의 점령지로 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1919년5월4일 북경대학생을 중심으로 배일을 외치면서 항의에 들어간 사건을 5 • 4 운동이라고 한다. 이 5 • 4 운동은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여기서 개혁을 바라는 지식인들이 하나의 방향과 지표를 제시함으로써 중국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 속에 중국이 볼셰비키 당을 모방했다는 것은 중국에서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시즘(Marxism) 이라기보다는 레닌-스탈린이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찾는다면 마르크스는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고도의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였으나, 1917년 당시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들은 모두 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그때까지도 중국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재빠르게 중국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과 소련 방식의 혁명모델을 희망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초기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전적으로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21년 공산당의 성립도 소련에 의해서, 즉 소련의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괴뢰당이었다. 이미 1919년 레닌은 코민테른을 통하여 진독수와 이대조에게 창당준비에 대한 간접적인 압력을 가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 2차 대회에서 공산당의 정치노선까지 명시하였다. 동년 코민테른 극동부장 오이틴스키(V. Oitinsky)가 ‘잘힌’이라는 가명으로 북경에 와서 북경대학의 사학교수 이대조를 만났고, 다시 이대조의 소개로 상해에 있는 진독수를 방문하여, 중국공산당의 창당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9월 오이틴스키의 지도하에 진독수를 위시한 9명이 상해 불조계에 모여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 창립 발기대회를 가졌는데, 그 대표자 중에는 모택동이 끼어있었다.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기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