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40/100회_혁명의 끝.

 

 

중국공산당은 창당 후 10여 년간은 국민당의 강세로 말미암아 부침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때에 모택동은 자신의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으며, 외부세력인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서서히 중국공산당 내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모택동은 이와 같이 계속적인 혁명을 지도해 오면서 중혁명이 다른 혁명과 다른 점으로 혁명을 지도하는 계급과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두 가지 점을 중요시하였다. 즉 서구의 「부르주아」 민혁명은 (「부르조아」계급이) 주도 했지만, 중국에서의 「부르주아」 민혁명은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농민이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문은 신해혁명이 좌절과, 열강의 대 중국 침략정책에 실망하였고, 이에 덧붙여 광동군벌 진경명의 반란에 몰려 상해에 피신해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래 손문은 제정 러시아의 혁명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사유재산 제도의 몰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소위 마르크스 정통이론에 따라 중국을 공산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레닌의 주장, 즉 후진국에서는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민족 부르주아와 일시적으로 합작하여 이들의 힘을 빌려 제국주의를 우선 타도하고, 이 합작 기간 동안에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적인 세력을 성장시켜 제 2단계로써 민족 부르주아 세력을 몰아내는 레닌식 전략을 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문은 열강의 침략 앞에 소련의 무기와 자금으로 중국통일을 위해 군대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소련정부 대표 요폐(A. Joffe)와 회담하여 국 • 공 합작을 시도했다. 당시 모택동, 주은래 등이 국민당에 가입하고, 그 대신 손문의 심복 장개석은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군대의 군사조직을 연구케 하였다. 손문의 삼민주의를 위반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국민당을 중앙 집권적으로 고치고, 소련 정치고문 보르딘(M. Bordin)이 광동으로 와서 국민당과 군을 재편성하여 군벌을 소탕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군벌에게 쫓기어 제대로 활동을 못하던 어려운 처지의 손문과 볼셰비키의 공산화 정책이 맞아 떨어져 국 • 공 합작은 쉽게 이루어졌다.

 

그 후 손문의 국민당은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이념을 가진 중산계급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중국의 정치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급격한 구 황제 체제의 몰락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가치의 혼돈, 군벌의 성행 및 일본의 영향력 증대 등은 국민당의 실질적인 정당 역할을 축소시켰던 요소라 할 수 있다. 마침내 1925년3월12일 손문이 사망하자 공산 진영과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손문이 죽은 후 후계자로 등장한 사람은 광동의 국민정부와 당 정치위원회주석이었고 볼셰비키당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왕정위와 황보 군관학교 교장인 장개석이었다. 장개석은 처음부터 국 • 공 합작을 반대했으나, 손문의 강력한 통일의지에 따라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었다.

 

그러나 손문이 없는 처지에 소련 고문들이 국민당을 장악하고 조속한 북벌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장개석은 소련과 중국공산당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내에서 공산주의자 활동에 제한을 가하는데 동의하고 장개석은 북벌을 단행하여 성공했으나, 그 북벌 점령지역에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농민협회를 만들어 국민을 무장시키고 급진적인 계급성을 조성하였으며, 이때 모택동은 소련식 공산주의 혁명 전략에 회의를 품고 호남지방에 돌아가 농민운동과 농민조직에 몰두하였다.

 

모택동은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기 위해서는 정치 •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혁명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당시의 중국사회의 설정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호소하는 소련식 혁명방법 보다는 공산당이 생존할 수 있다. 당시 상황에 맞는 농촌 확보정책에 따라 지구적인 농촌세력의 지지 획득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필요한 경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리도 무시해야 하며, 중농 • 부농은 물론 봉건지주와도 연합할 수 있도록 유연성 있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국민당의 대 공산군 소탕전을 막고 공산군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유격게릴라전을 공산군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이러한 혁명의 주체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처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농촌의 농민이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대 국민당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자 장개석은 국민당 내의 공산주의자를 탄압하고 국 • 공 합작은 실패로 끝나 공산당은 장개석 군대에게 연전연패하였다.

 

따라서 공산조직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소련은 당황은 나머지 로이(M.N. Roy)를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 스스로 군대를 조직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래서 중이 형식상의 군대를 처음 조직하여 사용한 것이 1927년8월1일 남창폭동이었고, 정군대 즉 홍군을 갖게 된 것은 1928년5월 정강산에서 주덕을 사령관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치국원으로 하는 소위 노동홍군 제 4군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남창폭동 실패를 계기로 1927년8월7일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9월 추수폭동을 일으키도록 결정하였다. 즉, 모택동은 호남지방에서 농민을 조직하여 추수기에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고 토지를 몰수해 빈농에게 분배하면 좋은 반응을 얻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공산당의 기반을 삼으려는 이른바 추수 폭동을 일으켰다. 이 추수폭동은 농촌에 의한 도시포위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략 전술을 정립한 것으로 이것은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도시중심의 노동자에 의한 폭동과는 다른 새로운 전술이다. 이것은 먼저 농촌을 휩쓸고, 거기에 세워진 혁명거점을 이용하여 발전시킴으로써, 도시를 포위하고 마침내는 도시를 점령하는 중국식 전략이었다.

 

그러나 9월 추수폭동 역시 장개석 군대에게 밀려 1천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깊고 험한 정강산으로 패주하였다. 이때부터 모택동의 지도하에 정강산 전쟁이 시작된다. 1929년1월 모택동은 이 무장농민을 이끌고 정강산을 빠져 나와 강서성 일대에서 농민 홍군을 조직하여 자기의 인민전쟁 전술 • 전략에 따라 농촌을 점령하고 도시를 포위한다는 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중국 북부지역에서 군벌을 토벌한 장개석은 공산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껴 1930년에는 4차례나 소공정을 전개하였다. 이때 국민 소탕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모의 게릴라전으로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단금을 수도로 하는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였고, 그 판도는 「레닌」주의 정당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당시 「코민테른」에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농민을 지도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적인 방식에 따라 농민은 오로지 보조적인 행동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모택동은 중국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위대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빈농이라는 이단적인 주장을 폈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모택동은 자신의 혁명 전략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택동의 전략이 확대되자, 장개석은 이들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장개석 군대에 의한 1 • 2차 토벌은 유격전술로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이에 분개한 장개석은 1931년7월 직접 토벌작전에 나서 3만의 병력으로 대항하는 홍군을 거의 완파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완전히 패하는 듯 했으나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하였다. 즉, 동년 9월에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은 홍군 소탕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모택동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금에서 제 1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를 열고 모택동이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이 세력이 점차 번져 나가자 장개석은 1932년6월 50만의 대병력으로 제 4차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이번 토벌에도 3차 토벌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건을 일으켜 장개석의 4차 토벌과 때를 맞추어, 일본군이 장성을 넘어 하북성 북방을 침략해 왔다. 장개석은 하는 수 없이 토벌작전을 중단하고, 일본군을 저지하는데 병력을 돌렸다.

 

장개석은 모택동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불리하다는 생각에서 우선 일본과 휴전을 하고 새로운 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래서 장개석은 일본군의 점령을 현 전선에서 묵인하고 휴전을 제의하였다. 휴전이 성립되자 1933년10월 1백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독일 군사고문 제에크르(Von Seeckr)장군이 만든 작전계획에 따라 강서성의 중앙소비에트 지역을 봉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중앙소비에트 전투에서 모택동은 수십만의 병력의 손실을 보고 대패하였다.

 

장개석은 백만의 대군과 200대의 비행기를 제5차 소탕전에 투입하여 주 • 모군을 1934년 9월부터 1년간 6천마일이나 도주 행군 하도록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키앙시에서 에난까지의 이러한 도주 행군을 죽음의 대장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은 국민군 및 군벌들의 가혹한 추격을 받으면서 11개성을 종 • 횡단하고, 만년설로 뒤덮인 5대 산맥을 넘으며 수많은 강과 사막을 거쳐 1935년10월 협서성 연안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장정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민간인들 2만여 명에도 못 미쳤다 한다.

 

모택동은 이러한 도주에 굴하지 않고, 후일의 대권장악의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 우선 대장정으로 인한 모택동의 당면과제는 장개석 군대의 공격을 저지하고 홍군을 다시 재건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얻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모택동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허탈한 상태에 빠져있는 군과 당원들의 재기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바로 모택동의 ‘항일민족 통일전선’이었다.

 

그 당시 일본의 중국대륙침략이 본격화되어 중국국민들은 항일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모택동이 제시한 ‘항일민족 통일전선’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게 되었고, 공산당원에게도 정신적인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정부에도 휴전을 제의할 명분을 주었다.

 

모택동이 제창한 ‘항일민족 통일전선’은 봉건지주와 일제주구를 제외한 모든 노동자 • 농민 • 소시민 및 민족 자본가를 포함한 제 세력의 규합을 요구하였고, 통일전선이 주창하는 정부형태는 노 • 농 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이었다. 또한 인민공화국의 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에 있지 않고, 민족해방 혁명을 추구한다고 했으며,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노 • 농의 계급투쟁은 민족해방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중단하며, 중국혁명의 현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반제 • 반봉건 •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이며, 통치방식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노 • 농 독재가 아닌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공산당 소탕에 맥을 못추게 만들었다. 즉 일본이 중국공산당을 살려주는 셈이 되었다. 그러한 사건이 바로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건립했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개석과 모택동을 잘 이용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계속 침략을 감행하자, 중국국민의 감정은 항일로 고조되어 있었고 이것을 간파한 모택동은 1935년 협서성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호소하여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지내면서 항일을 위한 제2차 국 • 공 합작을 제의했다.

 

이러한 모택동의 항일투쟁을 위한 국 • 공 합작 제의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모택동의 저의가 진정한 항일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멸직전에 있는 공산당을 소생 • 발전시키려는 데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6년에 제 6차 소공전을 개시하였다. 독려차 서안에 비래했으나, 소공부 사령관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고, “내전휴지, 무장항일, 남경정부 개편, 정치적 자유보장” 등의 요구를 제시한 서안사건이 발생하였다.

 

장학량이 이러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일본군의 음모로 자기 아버지 장작림이 철도 연변에서 폭사했다. 이렇게 되자, 장학량은 홍군보다는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사건을 벌인 것이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장개석이 감금되자, 모택동은 황보 군관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바 있는 주은래를 서안에 급파, 장개석의 구출을 알선토록 하였다. 모택동이 적대세력인 국민당의 장개석을 구출하게 한 이유는 장개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세력과 통일전선을 구축한 후, 그들을 항일 최전선에 서게 하고 공산당세력을 소생시켜 확장을 꾀해 보자는 데 있었다.

 

이로써 1937년에는 제 2차 국 • 공 합작(1937~1945)이 이루어졌는데, 공산당도 삼민주의를 따르며 국민당 정부의 행정적 • 군사적 지휘 감독을 받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개별의 조직을 유지하고 행동통일을 하는 당외 합작(block without)이 성립되었다.

 

이 합작에 따라 홍군은 팔로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명목상 장개석 지휘 하에 들어갔으며 이 국 • 공 합작을 계기로 하여 중국은 전면 항일전쟁에 돌입한 셈인데 당시의 중국사회는 그 내부적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 가치와 신념 형태 및 행동 양식에 의하여 반봉건적 • 반 식민지적 사회이다. 그 대외적 관계에 있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고 있는 명목상의 독립국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층은 생각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내부적으로는 반봉건적 지배계급의 타도를 부르짖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 중국으로부터의 축출을 혁명수행의 기본적인 과업으로 인식하였다.

 

반봉건적 지배계급의 중심적인 세력으로서 그들이 규정한 것은 이른바 지주들이었다. 지주계급은 당시의 중국사회에 있어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계급이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지주계급의 타도를 위하서는 지주들의 경제적 기반을 탈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토지개혁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기본원칙으로 한 중국의 토지개혁은 중국혁명의 제 1단계로 보았다.

 

그러나 강력한 민족 부르주아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중국에서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주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정치체제론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토지개혁은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기 위한 혁명적 투입(revolutionary input)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투입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신민주주의혁명에 의해서 이룩된 사회의 정치적 성격은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다를 뿐만 아니라 소련의 사회주의와도 다른 반제 • 반봉건 세력을 규합한 연합독재 민주공화국,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민주주의 혁명은 노동자 • 농민 •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의 연합전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민주주의 혁명단계에 있어서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손문의 삼민주의와 유사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적 당면목표일 뿐이며, 최종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말함으로써, 국제공산주의의 대열에서 머물고 그들의 지원을 받을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공산당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하여 물질적 효과(material incentive)도 활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민들에게 계급적 자각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들을 조직화하고, 그러한 조직을 통하여 농민들이 공산당의 권위체제(authority system)에 복종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농촌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요청되었음은 물론이다. 공산당은 유교에서 강조하였던 “예”에 의한 사회적 조화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반면 계급적 투쟁을 강조하였다.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공산당에 대한 충성과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중국에 대한 국민적 충성을 요구하였다. 또한 유교적 전통의 핵심 중의 하나인 사회적 • 윤리적 가치로서의 효도를 배척하고, 전통사회에서 그 안정과 지속을 위한 사회적 지주 중의 하나였던 여성을 가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전통적 사회의 기초를 파괴하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