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8/100회_혁명의 끝.

 

 

5. 브레즈네프시대 이후 ~

 

1963년 흐루시쵸프의 실각 후 1964년 10월에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은 다 같이 흐루시쵸프를 보좌하던 브레즈네프(L.I. Brezhnev), 코시긴(A.N. Kosygin), 포드고르니(N.V. Podgorny), 수술로프(M.A. Susiov) 은 모두 정치국원(Politobuto members)이었고, 여기에 키릴렝코(A.P. Kirilenko)도 정식 정치국원이었다. 이들 핵심 5인의 지도자 중 브레즈네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서기에 취임하고, 코시긴과 더불어 포드고르니, 수슬로프에 의한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들 5인이 주축이 되어 흐루시쵸프를 실각시켰고, 실각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앞에서 설명한 1인 독재의 경향으로 간다는 이유였기 때문에 소련의 통치방법은 집단체제가 당분간 불가피하였다.

 

당시 후임자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처음부터 기대를 적게 갖고 출발함으로써, 소련사회를 공산주의사회로 만들겠다는 흐루시초프의 공상적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소련의 실정에 맞는 발전단계로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사회주의사회’(really existing siocialist society)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브레즈네프의 의도는 제한되었으며, 오히려 행정의 수반인 코시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자본주의의 장점을 도입하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통일시키는 국가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부각되는 듯 하였다.

 

이후 브레즈네프는 1인 체제를 결심하고, 조용한 가운데 하나씩 하나씩 점진적으로 부상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브레즈네프에게 있어서 권력대결의 대상자는 포드고르니(Podgorny)였다. 포드고르니는 실각한 흐루시쵸프(Khruschev)의 경공업 우선정책에 동조할 뿐 아니라 그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흐루시쵸프와 친근했다. 당시 흐루시쵸프는 비록 실각했으나 아직 생존해 있었고, 포드고르니와 절친한 중앙당서기티토프(V.N. Titov)등 쟁쟁한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1964년 말 경에는 브레즈네프에게 도전할 위치에 있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포드고르니가 상당한 불안 요인이 되어, 우선 1965년4월 티토프를 중앙위원회 서기에서 제거하여 카자카스탄(Kazakhastan)부서기로 좌천시켰고, 1965년12월 포드고르니를 중앙위원회 서기직에서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Presidum of the Supreme Soviet)으로 바꾸었다.

 

브레즈네프의 마음에 걸리는 다음 경쟁자는 쉐레핀(Shelepin)이었다. 쉐레핀은 언론계통에 강력한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국 • 내외 문제에 관여하듯, 소련 국가안보협의회(K.G.B. 비밀경찰)의장이었기 때문에 소련 국 • 내외 문제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6년 브레즈네프는 우선 쉐레핀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공산당 청년동맹(Komsomol)과 비밀경찰(K.G.B)의 지도급 인물들을 브레즈네프 측근으로 대치시킴으로서 쉐레핀의 정치적 역량을 약화시켰다.

 

이처럼 포드고르니와 쉐레핀의 약화는 상대적으로 브레즈네프의 강화를 의미했으며, 그는 직접 숙청을 하던가 또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 경쟁자 휘하의 인물들을 소리 없이 좌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스탈린(Stalin)과 같은 통치방법이 아니고, 또한 흐루시쵸프와도 다르게 타협과 조정을 통하여 1인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소련의 정치는 경제문제의 해결과 국제적 긴장완화 정책의 국내정치적 파급 효과로써 특징지어진다.

 

긴장완화에 대한 소련의 관심은 한편으로 구주에서 권력 정치적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해 조약을 체결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점증하는 국방 예산을 절약하고 서구제국과의 경제관계의 강화를 통한(특히 현대기술의 도입을 통해) 산업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생산성을 효과적으로 향상 시킬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인 판단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미국은 쿠바위기 이후 긴완화 정책의 과정을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 1917~1963)의 평화전략의 의미에서 새로운 국제적 위기관리의 형태로써 뿐만 아니라, 국제적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이해하여 왔다.

 

긴장완화 과정은 동 • 서양 체제간의 원칙적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한 채, 동 • 서 간의 보다 많은 경제협력과 보다 많은 접촉 및 교류의 가능성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목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입장에서 시작된 동 • 서 교류의 확대, 즉 ‘적의의 협력’(antagonistic cooperation)은 소련의 국내정치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매우 중대한 충격을 주었다. 즉, 동 • 서 교류의 확대는 소련의 국내 정치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부수적 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

 

첫째, 다원적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 소비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사회상을 소련 인민들의 일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며, 둘째, 소련 지도층은 이러한 현상을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기술로 삼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도전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헬싱키의 ‘구주안보 및 협력회의’에서 체결된(1975년8월1일)합의문서에 의하면 동 • 서 양 진영 33개국 지도자들이 구주평화 정착을 위한 원칙들을 규정한 것은 물론 동 • 서 관계의 긍정적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제 구상과 대안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동 조약의 제 7원칙인 ‘인권과 사상 • 양심 • 종교 혹은 신념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 자유의 존중’은 상기한 소련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국가들에 있어서 인권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법 이론가들은 소련의 인권개념에 대해 보편타당하고 자연 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며, 초시간적 인권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법률은 정치권력의 특별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하게 계급적 성격을 지닌다. 서구의회 민주주의가 개인의 기본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써, 사회주의에서도 사회기본권의 실현(노동권과 교육을 받을 권리)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적 기본권(사유재산의 보장 등)은 단순한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보장했을 뿐이며, 동시에 사회구성원이 정치적 폭력이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제국이 헌법들과는 대조적으로 소련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사회경제적 • 정치적 및 개인적 권리들과 자유들을 구별하고 있는데, 소련헌법은 특히 사회경제적 권리들(노동권, 주택권, 교육권, 문화권, 휴가권, 위생, 보건, 의료 및 노후혜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기본권(의사 ․ 언론, 시위 및 결사의 자유)들을 소련헌법은 단지 소련정치의 목표에 일치되는 행위들에 기여할 때에만 보장 된다는 단서를 붙여 이를 제한하고 있다. 그 이후 10월 혁명이 있은 지 60년이 되기 몇 주 전인 1977년10월7일 소련의 신헌법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신헌법의 제정으로 1936년 이래 스탈린에 의해서 작성되었고 소련에서 적용되어 왔던 구 헌법은 폐기되었다.

 

이와 같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문제 이외에도 헌법제정의 초안 작성을 위임받은 브레즈네프는 과거의 스탈린을 비판한 흐루시쵸프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고, 소련내부가 커다란 혼란기를 맞음이 없이 소련 사회를 안정화시키는데 노력하여 스탈린 비판의 한계를 정함으로써, 스탈린 비판의 종결을 짓고 또한 과거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흐루시쵸프가 전 인민의 사회주의 국가로 표현한데 대하여 흐루시쵸프의 개념에 따라 전 인민의 국가로 신헌법 제 38조 2항과 제 62조에다 집어넣었다. 따라서 1977년 신헌법은 계획적인 반 기본권적 진술들을(서구적 의미)포함하며,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은 기본적인 국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예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스탈린이 혁명적 개혁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국가의 권력기능을 강조했었던 반면, 현 집권층은 신헌법을 1961년의 당 강령과 연결시키고, 소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로서가 아니라 전 인민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신헌법은 당의 지도적 역할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

 

신헌법의 총칙에서 현재 소련사회를 공산주의로 가는 객관적 법칙의 원칙과 헌법을 준수케 하고 있는 사회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헌법을 제정한 현재의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특징을 정의하고, 소련정치의 일련의 기본목표들을 열거하며, 기본권의 조항에서 소련이 기본권을 보는 입장을 설명해 주고 있다.

 

소련은 그들이 반복해서 범하고 있는 법적 침해에 대해 서구 및 구주 공산주의의 비난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법적 장치를 통해 소련의 정치를 법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뿐만 아니다. 신헌법이 제정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당 강령이 채택(1961년)된 이래 변화된 정치적 상황과 긴장완화 정책 속에서 생성된 보편적인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 내의 서구식 인권 옹호자들에게 동구와 서구간의 인권 해석상의 한계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과 정치의 일치화 노력의 과정에서도 신헌법은 인간의 기본권과 기본가치들을 남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구민주주의에 있어서의 법치국가의 원칙을 이른바 ‘계급 이데올로기’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묵살하고 있다.

 

유추해볼 때 이것은 헌법상의 문제이고 실제문제에 있어서는 당의 계급성을 강조하며 관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모든 것을 당의 명령에 따라 행하여지는 브레즈네프 총서기장 중심의 당 권력체제의 우월성 내지는 절대성으로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초기집단체제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실질적으로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