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41/100회_혁명의 끝.

 

 

중국공산당에 의한 이른바 여성의 해방은 그러나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적 중국의 사회적 지주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사회주의적 새로운 중국의 건설을 위하여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가치로서 “노동”을 제시하였고, 새로운 충성을 요구하였다. 계급적 자각을 강조하고 계급적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을 창출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은 중국의 전통적 사회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러한 혁명과정에 있어서, 첫째는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해야 하는데, 이는 반봉건적 • 반 식민지적 사회를 우선 자주독립시키고, 부르주아 민주사회로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를 폐기하고 봉건사회를 타파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혁명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주장은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노동자계급 투쟁론과 대립된다. 「공산당 선언」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고, 레닌(Lenin)은 제국주의론을 전개하여 비록 선진 자본국가가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로 돌입할 수 있다하여 전위당 개념을 가지고 혁명을 전개한데 반해, 모택동은 인민전쟁, 즉 유격 전술의 개념을 도입하여 공산혁명을 이루었다.

 

유격전술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느 한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기 보다는 전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상징이 중요했다. 따라서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신에, 양심적인 민족자본가, 농민 등을 한데 묶어 통일전선 전략을 폈던 것이다. 이 통일전선에 따라 먼저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완수하고, 곧 이어 제 2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행하려는 모택동의 의도를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한다.

 

신민주주의 이론과 아울러 중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의 전통을 더욱 개발하였다고 강조하는 모택동 사상(TMTT)은 바로 모택동의 모순론(Mao's theories of contradictions)과 모든 사회에 있어서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1935년 이래 단편적으로 발표한 항일민족 통일전선 • 인민공화국 • 인민민주주의 등을 종합 • 정리하여 1937년에 「모순론」이라는 장문의 글에서 레닌의 ‘변증법에 관한 문제’ 중 상당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사물내부의 모순성은 사건발전의 기본원인이며, 사물간의 상호연계 및 상호작용을 사건발전의 제 2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택동에 의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처럼 자연계의 변화는 주로 자연계에 내재해 잇는 내부모순의 발전 때문에 일어나고, 사회적 변화는 사회계에 내재해 있는 내부모순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모택동에 의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처럼 자연계의 변화는 주로 자연계에 내재해 있는 내부모순의 발전 때문에 일어나고, 사회적 변화는 사회계에 내재해 있는 내부모순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론」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되는데, 즉 사회적 변화는 주로 사회의 내부모순의 발전 때문에 일어나므로 사회전체는 발전하고 신 • 구 사회의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계급 상호간의 모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모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모순, 사회주의 자체 내의 모순과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 그리고 제국주의 자체 내의 모순 등 인류사회 자체가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사회변화가 오는 것이며,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이처럼 자연계나 인간사회계에서 모든 사물에서 모순이 공통적으로 나타날 때 이를 ‘모순의 보편성’이라고 하였고, 모든 사물에 존재하는 고유한 모순을 ‘모순의 특수성’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기본 원리는 ‘모순의 특수성’때문이며, 한 사물의 모순해결 방식이 다른 사물의 그것과 상이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순론」에서 생산관계가 변혁되지 않으면 생산력이 발달할 수 없으므로, 생산관계가 결정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을 때, 상부구조(즉, 정치 • 문화 등)의 혁신이 주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사이에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 인민대중과 봉건제도 사이에 모순은 민주혁명, 식민지와 제국주의 사이에 모순은 민족해방 전쟁의 방법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하여 자기의 인민 전쟁론을 정당화시킨다.

 

앞서 지적한바 있듯이 제국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최종적인 생사의 투쟁으로 보는 모택동의 모순론은 중간 계급이 없두 계급으로 단순화한 생각이며,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모순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자체가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모택동은 스탈린과 같은 과격한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지 않고 온건한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함으로써, 중국의 많은 계층, 즉 반공적인 사람들로부터 민족자본가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신민주주의가 점점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되어 간다고 말함으로써 중국의 사회주의 세력에게도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당시 사정이 서구나 또는 제정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라는 나라의 맞는 전법을 찾는데서 나온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은 2차 대전에 의해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국 • 공 합작을 잠정적으로 유지해 오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알력은 급속하게 표면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항복 직전 공산당 소련군과 함께 만주를 제압하였으며, 전당대회를 열어 국민당에 대하여 일당독재의 해소와 연합정부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물론 이에 앞서 모택동은 또 한 차례의 고비를 당하여 1945년8월27일 중경으로 장개석을 찾아가 40여 일간이나 회담했으나 제 3차 국 • 공 합작의 실패를 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장개석과 몇몇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리가 부패해 있었고 이에 더하여 인플레까지 발생하여 국민은 불안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개석 군대는 오랜 내란과 전쟁에 시달려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국민당의 약점을 이용해 모택동은 농촌을 거점으로 내전 반대의 구호를 내걸고 선심작전을 펴나가면서 국부군 점령지에 대해 포위작전을 시도했다. 이에 사기를 잃은 장개석 군은 속속 투항하는 사태가 일어나, 미국 원조에 대한 새로운 무기는 점차 모택동 군대로 넘어가 결국 미국의 군사원조는 모택동에 대한 원조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무기를 가진 모택동 군대는 계속 남진하여 서주 전투에서 55만의 장개석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장개석은 광동으로 후퇴하였고, 물밀듯이 몰려드는 공산군을 피해 1949년12월 대만으로 쫓겨가고, 모택동은 내전이 거의 끝난 1949년 10월 1일을 기해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중국정권 수립 이후 중공의 정치행태를 살펴볼 때 중국공산주의 혁명의 주요한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운 권위체제의 확립, 새로운 기구, 새로운 역할, 사회 ․ 정치적 재통합을 촉진하는 새로운 위계질서가 확립된 중국사회를 건설하는 것, 둘재 끊임없는 개조운동, 사상학습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의 가치관과 행위 양식을 수립하는 것, 셋째 인민민주 전정체제로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작업 방식에 따라 군중을 동원하는 것, 넷째 전통적으로 1차 사회가 중심이 되어 온 가족 중심의 충효사상을 개조하여 국가와 당, 그리고 작업 집단에 승화시킬 수 있도록 전향하는 것, 다섯째 「프롤레타리아」정신으로 무장된 국가와 개인간의 일체감을 형성시키는 것, 여섯째 재래기술과 현대기술을 조화시킨 기술 교육을 강화하는 것, 일곱째 집단의 소유에 따라 급진적인 발전을 유도할 수 있는 경제 제도를 사회주의화시키는 것, 여덟째 외세의 지배나 의존을 배제한 강력한 현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 당시 8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모택동 사상이라는 유일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그의 희망을 걸어 보았던 큰 변화였다.

 

모택동은 정권을 장악한 이래 사회주의의 각 단계에서 경제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그 목표를 경제 재건과 3년 이내에 일본과의 전전(戰前)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두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조상숭배 ․ 문결속 ․ 효도 등의 전통적인 유산을 타파하였다.

 

더 나아가서 사상 개조운동을 전개하였고, 상공업자, 즉 부르주아 계급을 공격하기 위해서 ‘5반 운동’을 제창하였다. 5반이란 재물, 탈세, 국가자산의 착복, 노동 임금의 착복, 국가 기밀의 누설 등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중국정권은 반혁명 분자의 진압, 5반운동,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정당으로서의 체질개선, 토지개혁, 경제부흥, 국영 경제의 우위성 확보 등의 통치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기초적 준비작업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그 후 1953년부터는 사회주의 혁명단계에 들어가는 정책을 수립하고자 했으며, 1954년에 공표된 중화인민 공화국 헌법은 사회주의적 개선을 강조하고, 이 시기를 신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되는 과도기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과도기형성의 배경은 선진공업사회를 배경으로 근대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고 있는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는 달리 후진적 농업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중국의 실정에 맞추어 신 민주의론을 약간 수정한 사회주의적 개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통제와 관료주의적 통합을 벗어날 수 없었고, 통치방식도 중국적인 체험 속에서 맴돌았다. 결과적으로 표면상으로는 연합 정부론과 인민민주주의 전정을 내걸고 인민민주 독재를 부르짖었지만, 실제로는 모택동과 그의 심복의 1인 독재와 같은 것이었다.

 

다음의 몇 가지 사건을 들어 그의 독재성를 살펴보기로 한다.

 

1951년8월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직원의 오직, 낭비, 관료주의 소위 삼반운동을 내걸고 상해시위원회 려옥을 비롯하여 수많은 당 간부를 숙청하고, 증수, 탈세, 국가 자재의 절취, 공짜와 재료의 낭비, 국가경제 정보의 절취 소위 5반이라는 명목아래 지금까지 모택동이 권력을 잡는데 일익을 담당하여 모택동이 양심적인 부르주아라고 불렀던 민족 자본가들을 숙청해버렸다.

 

두 번째 사건은 1953년12월 고강, 요수석의 반당 사건이다. 즉 고와 요는 류소기와 주은래를 내몰고 국무원 총리의 지위를 강점하려는 행위를 했다하여 숙청해 버렸다.

 

세 번째 사건은 1959년에 팽덕회의 우익 수정주의 사건이다. 즉 대진운동의 실패로 정세가 시끄러워지자 당시 당 정치국원이며 국방장관이었던 팽덕회가 모택동은 경제 법칙을 무시하고, 농민의 생활수준만 떨어뜨렸다는 항의각서를 발표하자 동년 9월 그를 숙청해 버렸다.

 

끝으로 1959년4월 류소기를 국가 주석의 지위에 올려놓고, 1966년~69년 사이에 반혁명 수정주의 사건과 1970년 임표, 진백달의 반혁명 수정주의 사건 등이 바로 모택동이 연출해 낸 권력 유지를 구축해 온 숙청의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통일방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아니고 공산당의 일당 독재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통일전선으로써 노동자 • 농민 외에도 소시민 • 민족 자본가를 포함하는 계급들이 통일전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을 근거로 설정된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안으로 표현된 것이_

 

첫째, 사회주의 건설 총 노선이다.

 

1921년부터 1927년 혁명 초창기의 중국 당국은 소련으로부터 혁명과 정책을 받아들였다. 1950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기간 중에 중국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배우자(Learn)라는 정책을 받아들여 소련이 시도했던 중공업발전의 모형을 그대로 모방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 때 중공업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서구의 사상보다도 기술도입에 힘써 중공보다는 좋은 조건하에서 스탈린은 중공업정책을 시행할 수가 있었다. 이에 반해 중공은 농업의 후진성도 면치 못하고 또한 통일전선 전략으로써 중국경제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소련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져왔다. 따라서 제 1차 계획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모택동은 더욱 많이, 더욱 빨리, 더욱 훌륭히, 더욱 절약해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을 제기했다. 이 총 노선은 중공업을 우선으로 하여 중앙공업과 지방공업을 발전시키며, 중공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소위 두 다리 걸치기 정책(the policy of walking on two legs)이었다.

 

둘째, 대약진 운동이다.

 

중국공산당은 농업 집단화와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1955년 제 1차 5개년계획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소련의 원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새로이 중국식의 경제발전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약진 운동’인데 이는 대중의 자발적인 창의를 유도한다는 대중노선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이 운동의 핵심사업은 인민공사로써, 소규모의 농업생산 합작사를 해체하고 대규모의 ‘농 • 공 • 상 • 학 • 병 합일’의 종합적인 사회주의 생산단위로서의 농업조직체를 수립하여 ‘대규모의 협력’, ‘조직의 군사화’, ‘행동의 전투화’, ‘생활의 자단화’를 통해 사회주의건설을 촉진하고, 공산주의 단계로 전환하는 준비를 한다는 목적 하에 1958년부터 중공은 제 2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침체에 빠진 산업부문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의 의지를 조직화하고, 동원 화하여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을 동시에 효과를 노리기 위한 정치슬로우건(Solgan)이었다.

 

셋째, 인민공사화 운동이다.

 

대약진운동을 필두로 하여 1958년8월 중앙정치국 결정 이후 전면적으로 확산되어, 동년 11월1일 중국은 농촌에서 2만3천397개의 인민공사를 건설하였다. 이 수는 중국 전 농가의 90.4%가 가입한 것이다. 그해 연말에 이르러 서민을 제외한 전 농가가 인민공사로 조직되었다. 이것은 생산의 집중화, 조직의 군사화, 행동의 전투화를 통한 중국 농촌의 봉건적 요소를 청산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으로 소련의 집단농장의 범위를 넘는 거대한 병영이었다. 이 인민공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그나마 조그마한 농토와 재산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고, 가정은 파괴되고 생산과 생활의 자유는 박탈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회주의 총 건설노선,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화 운동을 삼면 홍족 운동이라고 불렀는데, 몇 천 년의 전통을 지난 중국국민에게 급작스러운 대중동원과 집단화는 불만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러한 도전에 부딪친 모택동은 당초 1959년4월15일 국민경제 집행결과와 발전상황 공보를 공포할 때 삼면 홍족 정책이 성공했다는 식으로 발표했으나, 동년 8월 노산에서 열린 제 8차 8전회에서 그 발표는 잘못된 것이라고 시인함으로써, 중공의 삼면 홍족 운동은 무수한 인력과 물력의 낭비를 초래하였다.

 

이 운동 실패에 근본원인은 모택동의 유격전술, 즉 대중동원을 통하여 공산혁명에 성공한 것은 자본, 기술 조직된 경영이 없이 막연하게 인해전술로서 중공업과 농업 및 문화를 도시에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환상적인 인종의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모택동은 무계획적으로 착수한데서 찾을 수가 있다. 모택동은 빗발치는 항의에 당황하여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류소기, 팽진, 등소평, 육정일 등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팽덕회 등을 우익사회주의 노선과 반당행위를 하였다하여 팽덕회 대신에 임표가 들어서고, 군 총참모장에는 나서향이 들어앉게 되었다. 모택동 일선 후퇴와 류소기, 등소평 체제의 등장은 언론, 학술분야에 까지도 영향을 미쳐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 심지어는 북경대학 교수들까지도 모택동 사상을 비꼬고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풍조가 일어났으며, 모택동은 국방상 임표로 하여금 강제로 수습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류소기와 등소평은 모택동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교육운동(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을 통해 기강이 해이해진, 즉 모택동 사상의 공격과 풍자를 없애고 일대 정화운동을 전개하려는 실리정책을 더 우선 정책에 두었다. 즉 지금까지 중공업 우선정책을 폐기하고 농업우선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또한 중공업보다는 경공업 우선정책으로 시행하고 인민공사의 규모도 축소하였다. 또한 모택동이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실리적인 기술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모택동은 1964년8월11일 모택동의 사회로 개최된 당 제 8기 11차 중앙위원회는 모택동 사상으로 뭉쳐 1인 체제의 기반을 다시 구축하기 위하여 문화 대혁명에 관한 16개항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가을부터 전개된 문화대혁명은 삼면 홍운동 특히 대약진운동을 비롯한 중국경제의 실패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실패는 노동자, 농민, 해방군(PLA)뿐만 아니라 류소기-등소평 체제 하인 1965년에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시아, 아프리카 정상회담의 실패, 카스트로 정부와의 악화, 북한, 월맹, 일본공산당이 모택동의 영향으로부터 멀리하고 친모 지역이던 인도네시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모택동에게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특히 군부 쪽에서 불만과 불평이 컸다. 이러한 군부의 불만은 드디어 당 정치국원이며 국방장관인 팽덕회가 앞장서서 3면기 정책이 잘못 됐다는 항의각서를 모택동에게 보내고 모택동 정책에 정면도전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 총참모장 황극성까지도 팽덕회의 의견과 일치했다. 그래서 1965년11월 모택동의 처 강청과 요문원, 장춘교 등의 상해파가 주축이 되어, 팽진, 나서향, 육정일 등 대약진운동 실패후 등장한 당시의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고 하는 당내 실권파를 숙청하고, 강청, 장춘교, 요문원은 일약 중앙정치국원으로 되고, 이론가 왕홍문도 정치국의 일원이 된다.

 

그 당시 류소기, 등소평을 몰아내는 데는 막강한 힘이 필요함으로 젊은 소년들을 길거리로 몰아내는 소위 홍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홍위병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볼 것 같으면, 삼면 홍족 정책 실패에 따른 권력구조의 변화로 소위 반당 우익집단의 출현, 지식분자 등의 자본주의화 경향 등에 의하여 모택동 자신의 영도 지위확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문예정풍 운동을 주창했으나, 당내 반 모택동 실권파의 힘이 강함으로 모택동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근로자, 빈농, 혁명군인 등의 자제들을 모아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걸고 북경에서 1966년8월18일 천안문에 홍위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 세력은 점차로 지방 도시로 확산하여 사유재산을 파괴하고,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고, 외국사절과 외국기자들을 구타하고, 드디어 당과 정부기관원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동년 8월22일 인민일보는 공 • 농 • 병은 혁명학생을 지지하라는 사설을 통하여 홍위병의 활동이 합법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힘입은 젊은 홍위병들은 가는 곳마다 파괴활동을 자행하는 등 파괴 활동이 고조되자 모택동은 확대발전을 염려하여 동년 8월 28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혁명 청소년은 해방군에서 학습하라”는 내용을 발표해 홍위병이 중국군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16개 항목을 실행하는데 힘쓸 것이며, 더 이상의 폭동 활동을 금지했다.

 

모택동은 주로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당권파 색출과 우파분자 타도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임표와 주은래는 모택동의 견해에 따라 홍위병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고 북경에서의 활동은 지방에서 확산시키되 모 사상을 선전하고, 지방 홍위병을 조직하고 자본주의 집권파를 몰아내는데 앞장서라고 모택동은 옹호했다.

 

그러나 류소기-등소평 등은 각 지방 조직을 이용 1966년 12월말 전국적으로 소위 경제폭풍을 일으켜 반모 투쟁을 시도했다.

 

이렇게 되자 각 곳에서는 서로 싸우고 파괴하는 운동이 벌어져 홍위병 자체 내에서도 소위 무투가 발생, 1968년6월 북경의 각 고등학교에서 계속적인 무투가 발생하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무투는 청화대학이었다고 한다.

 

이에 임표를 중심으로 한 군부 개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와 같은 끝없는 싸움에서 드디어 등소평-류소기 체제는 무너지고, 군부를 장악한 임표, 국무원을 장악한 주은래, 진백달 등이 부각되었다. 이 문화대혁명 기를 통해 모택동-임표 체제가 굳어졌고, 1969년4월 제 9기 전당대회에서는 임표가 당내 제2인자로 등장했다.

 

여기에 더하여 중앙위원회의 279명의 구성요원 중 군인이 125명(44.8%)이었다. 이 군인들 가운데 임표 추종자가 58명(46.4%)이었다. 또한 29개 지방지도 간부 158명 중 군인이 94명인데 이들 모두가 임표 추종자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임표는 모택동의 입장에서 볼 때 특히 당 • 군 관계에서 당 우위정책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경제건설보다는 국방력 강화와 자기위치를 굳히는데 더 힘썼다.

 

그래서 모택동은 고심한 나머지 우선 극좌파인 진백달 정치국원에 대한 비수 정풍운동을 전개하면서 임표를 정점으로 한 군 수뇌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군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임표파는 “571정기요”라는 반모 쿠테타를 작성하여, 임표, 임표의 처 엽군, 공산군 총참모장 황영승, 공군사령관 오법헌, 중국군 부총참모장 겸 해군 제 1정치위원 이작붕, 중국군 부총참모장 겸 총후방부장 구회작, 공군작전부장 임립과, 성도군구 사령관 양흥초 등이 모의하여 상해와 북경 등지의 보병과 공군 제 4군과 5군 및 민간항공 34사단 등으로 편성되어 거사를 1971년9월 13일로 정했다. 거사 전날 거사음모가 탄로됨으로써, 임표는 처 엽군과 아들 임입과 함께 영제 트리덴트 비행기를 타고 몽고를 거쳐 소련으로 탈출하려다 추락했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진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으나 어떻든 이 사건으로 황영승, 오법헌 등 40여명의 군 중진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또한 이와 관련된지는 몰라도 문화혁명의 기수 진백달도 함께 숙청되었다.

 

이 쿠테타 음모사건을 계기로 모택동-임표 체제는 모택동-주은래 체제로 바뀌고, 1973년8월 10전 대회에서 임표와 진백달은 당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30대의 왕홍문이 하루아침에 당 부주석에 올라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잃었고, 서방학자들도 놀랐다. 이어 또 한 차례의 쇼크는 문화혁명 때 숙청되었던 등소평이 복권되어, 당 부주석과 군 총참모장, 부총리에 오르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끝으로 문화혁명은 중국에 있어서, 새 문화, 새 역사 창조를 하기 위한 의식혁명이라고 모택동 1인 체제의 위축을 다시 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방학자들은 모택동이 실권을 쥐고 모든 것은 모택동에 의하여 행하여진다고 믿었으나 실은 그렇지 못했다. 1976년1월8일 주은래가 사망하자 당 제 1부주석 총리대행은 등소평이 아니고 뜻밖에 정치국 상무위원도 아니 화국봉이 차지했다. 온건주의자 등소평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비임비공을 주장하던 소위 오늘날 4인방라고 하는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등의 시대가 잠시 도래 했었다.

 

1979년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모택동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유소기일파와 강청을 중심으로 한 4인방 간의 권력투쟁에서 등이 승리함으로써, 이들 4인방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화국봉-등소평으로 이어지더니 커다란 숙청 없이 조용한 가운데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호요방, 조자양 등의 집단체제로 넘어갔다.

 

한편 그들은 모택동 사상의 재평가와 함께 중국내에 잔존하는 문화파 세력의 제거 등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국교정상화는 물론 정치, 경제, 군사 부문에서의 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소련과의 관계개선도 모색하기 위한 책략으로써 그들은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그 결과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이 화국봉의 축출과 친 등소평 체제의 구축으로 어느 정도 정치가 안정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1979년 제 5기 전인대회 제 2차 회의는 중국 정치사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겠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보아 문화혁명 때 등장했던 모든 정책과 정치 행태를 부정하고, 조정과 법제에 의해서 새로운 정책과 정치행태를 제도화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중국은 다른 공산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조주의적인 그들의 이념만을 내세우지 않고 제도화 한 일당 통치제도의 양상을 따르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사회제도와 인간성을 변혁하고 그들의 공산주의 이념 요구에 의해서 자연환경까지도 개조 하려는 변혁기를 종결짓고, 호요방 • 등소평 체제가 농업 • 공업 • 국방 • 과학기술의 건설이라는 4개 현대화를 위한 공고기에 접어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이후 등소평이 후진으로 물러나고 조자양(당 총서기)과 이붕(수상)체제가 구축되자,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은 모택동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하면서, 부분적 • 단계적으로 중국사회를 개방하여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중국이란 특정한 환경, 즉 기술 • 제도 • 사상 등 혁신이 추진되던 과도기사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혁명과 정치저변에 깔려있는 지배적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위에 중국혁명이 부가 되어 이루어진 중국화 된 모택동 방식의 공산주의로서, 소련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상적으로 다른 점은, 첫째 농민을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여 중국혁명은 농민의 지지 내지는 솔선하는 참여가 뒤따라야 된다는 것과, 둘째 공산주의 이론에서의 혁명은 고도산업사회화 한 도시를 중심으로 한 혁명을 의미하는데 반하여, 모택동은 농촌을 혁명기지화 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이른바 「이(以)농촌포위 도시전략」이 혁명의 기본전략이라는 것, 셋째 계급투쟁에 관한 견해 차이로서 소련은 사회주의 계급에서는 계급투쟁이 소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하여 모택동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넷째 군중 동원에 관한 독특한 견해로서 밝은 내일과 영광된 미래를 위해서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본 • 기술 등의 부족을 대중 동원을 통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메꾸고자 하는 방식을 쓰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