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14/100회_지하경제권력.

 

 

19세기 말엽 당시의 미국의 철도는 중국인들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말썽 많은 유럽 이주민들보다는 불평이 적고 부지런한 중국인들이 훨씬 유리했다.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써던 퍼시픽, 노던 퍼시픽, 카나디안 퍼시픽 등 모든 철도 회사의 기술자와 노무자의 80%가 중국인이었고, 백인의 노동 임금의 3분의1로 미국의 철도는 끝없이 뻗어나간 것이었다.

 

1865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미국 대통령 앤드류 존슨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그들이 없으면 이 위대한 미국의 국가적 대공사가 의회가 요구하는 기간 안에 완공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태평양을 향한 프론티어 스피릿은 중국을 자국 이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하여 상해에 정착한 최초의 선교사들을 거점으로 어떠한 미래의 중국 정치 지도력 을 구성해 나가느냐에 있었다.

 

마침내 미국 기독교계는 자국의 이익에 맞는 근대중국을 만드는 계획과 미국의 서부 개척 계획을 위해서 중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화를 만들 엄청난 음모를 꾸며낸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살고 있는 중국은 가장 많은 구원의 수확을 거 둘 수 있는 나라라는 동양에 대한 큰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무명의 중국 고아 촬리 송이라는 15세 소년이 이곳 미국 동남부에 흘러 왔던 것이다. 촬리 송은 월밍턴 감리교회 목사에게 소개되었다. 1880년11월7일. 월밍턴스터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오늘 아침 제5번가 메도디스트 에피스코팔 교회에서 세례식이 열린다. 이 자리에 한 명의 중국인이 세례를 받게 된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세례를 받는 최초의 중국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한 사건이 역사적 사건으로 근대 중국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커다란 물줄기의 근원이 될 것을 짐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근대 중국 혁명의 기수였던 손문의 장인이 되는 동시에 장개석의 장인이 되고, 그 아들 송자문은 중국 국민당의 재정부장과 국무총리, 중국 중앙은행 총재가 된다. 촬리 송의 첫 딸 애령은 중국의 최대 재벌 공상회의 처가 되고, 둘째 경령은 손문의 아내가 되며, 미령은 장재석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둘째 아들 자량과 셋째 아들 자안은 모두 중국의 주요 은행들을 그 손에 넣게 된다.

 

오늘날 중국의 문제는 이 촬리 송이 감리교 총회가 파견한 중국인 선교사가 되어 종국 상해에 도착한 1886년 이후, 그가 엄청난 딴 사람으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79) 미국의 중국 선교는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자국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다가 촬리 송을 아편과 폭력과 정치음모의 두목을 만들고, 손문도 장개석도 중국도 놓친 후 모택동에게 중국을 내어 주는(중국에서의 미국의 패배를 만드는) 돌이킬 수 없는 우행을 남기고 만 것이다. 스텔링 씨이 그레이브가 쓴 책에서 “몰핀은 1800년대 후반에 서방 선교사들이 중국인 이편 중독자를 치료하는 데 많이 사용했으며, 따라서 중국인들은 이를 ‘예수 아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아편과의 관계가 뿌리 깊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 중 정치적 세력과 유착된 내용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다. 손문이 촬리 송의 딸 경령을 처로 삼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사건이나, 장개석이 본 처를 버리고 미령을 맞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사건, 홍방의 아편 두목이자 살인 폭력단의 두목인 투 에셍이 세례를 받는 등 남 감리교회의 상해에서의 선교는 종잡을 수 없는 음모의 연속극과도 같았다. 유럽의 기독교와 중동의 이슬람의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종교 전쟁이었다. 제 2차 대전에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자국의 수호신 신도주의를 근간으로 성전임을 애써 강조했다.

 

어쨌든 인간은 전쟁을 통하여 역사를 바꾸어 나갔고 위기를 극복해 왔다. 종교는 전쟁에 신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은 역사상 가장 저주스러운 기록들이다. 종교는 이 저주스러운 전쟁 역사의 책임을 져야한다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이나 똑같이 ‘민족(Nation)’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들은 ‘종족집단(Ethnic Group)’이라는 용어로 민족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회 공동체를 다르게 정의하려고 노력한다.

 

왜 그럴까? 심지어 미국의 기독교 학자들은 민족주의를 이방 사상이라고 단죄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근대 서구 문화의 옷을 벗기면 무엇이 드러날까?

 

탈 서구!―기독교가 헬라와 비잔틴과 라틴 문화의 옷을 번갈아 입는 동안 그것이 서구 문화의 옷을 두텁게 껴입은 서구 종교로 뿌리를 내렸다면, 그 문화의 옷들을 벗지 않고는 그들의 선교가 서구 팽창주의의 하나로 비서구 세계에 그릇 전달될 우려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크게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인류학이나 사회학을 대충만 연구해 보아도 인간은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사회에서 민속사회로, 민속사회에서 민족사회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학자 중 유명한 독일의 막스 베버도 “민족은 국가 형성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할 만큼 민족은 국가 형성의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

 

근대 서구 제국주의 식민정책은 피지배 민족들의 국가 형성의 위험성을 막기 위하여 민족의식 말살 정책으로 민족 내부의 소수 종족 집단 상호간의 대결을 부추겨 왔다.

 

현대를 거닐면서 고대를 보고 돌아서서 미래의 문을 두드리는 자세로……현대 종말기에 서서, 다가오는 21C의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오늘 이 나라, 이 민족, 이 정권, 이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위치는 어떠한가?

 

문화와 종교는 한 그릇 속의 물과 같이 보이면서도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있어 보이고, 국가 권력과 종교는 서로가 인간과 민족과 사회의 이익을 추구하여야 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면서 자기 이익을 양보하지 않는 고집덩어리처럼 보인다.

 

힘과 제약의 연속선상에 선 정권과 종교는 서로가 함께 만나서는 안 되는 영원한 평행선이어야 하는가?

 

이렇듯 정권과 종교 역사의 기록만큼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것도 드물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귀속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또는 역사가의 성장 배경에 따라 그리고 이념과 배경에 따라 그 기록된 역사의 얼굴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제 3세계의 역사, 곧 비서구 세계의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이다. 세계 문화의 주도권이 서구 식민주의 세력 쪽으로 넘어가고 과학화한 서구 문명의 힘을 배경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역사는 전혀 사실을 달리한 왜곡된 기록으로 남겨지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서구인들은 인종적 우월감으로 인한 비뚤어진 시각에 기독교라는 종교적 시야를 통하여 자만에 찬 거짓 정의감과 천박한 자비심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바라보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자원이 풍부하고 신비에 가득 찬 낙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들의 호기심은 이 대륙들을 쉽게 삼켜질 수 있는 가난과 무지의 땅이라는 데로 기울어졌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부(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그 활력의 분출구로써 제국주의적 침략의 불길이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베풀기 위하여’ 지배되어야만 한다는 이론이 식민주의적 침략 세력과 서구 선교 세력의 만남과 유착을 이루게 하였다. 이른바 신제국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이 정치책략은 국내외의 추종 세력들을 교묘히 격려하고 부추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종족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운동들을 저지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같은 추종 세력이며 서구 식민지 통치권의 비호 아래서 육성된 서구 선교 세력에도 이 모델에 상응하는 면모로의 변형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중심 세력은 주변 국가에서 군사원조, 기술원조, 개발차관 또는 무상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주변 국가의 중심 세력의 종속적 지위를 보존시키면서 서구 자본 지배하의 주변 국가의 핵심 권력은 이 관계에서 혜택을 누리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서구 자본주의의 중심 국가의 통치 세력은 이렇게 함으로써 주변의 약소 종족 국가의 원료와 시장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이와 같은 관계를 전 세계로 확대시킴으로써 세계의 모든 자원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서구 선교 세력이 이와 같은 자국의 이익 확대를 위한 발판과 전초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서구 식민 정치세력과 잘못된 개척 정신과 교세 확장주의의 오도된 욕망에 자리 잡힌 서구 선교 세력은 두 날을 가진 흉기에 비유될 수 있다. 하나는 미화된 개척 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탐욕스런 교세 확장주의인 것이다.

 

서구 식민 정치 세력과 서구 선교 세력은 서로가 서로를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절히 이용하거나 교묘히 이용당해졌다. 그 둘의 관계는 마치 악어와 악어새의 그것과 같은 공생의 관계였던 것이다.

 

영국은 인도를 강점한 후 제일 먼저 기독교 세력을 통하여 식민지 지식인층의 흡수 정책을 수립했다. 네루의 유명한 저서「인도의 발견(The Discovery of India)」에 나타난 인도인의 기독교관은 ‘영국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물론 최고의 자질을 가진 자들이지만, 교회가 영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전락하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다 하나의 도덕적인 또는 기독교적인 베일을 뒤집어 씌워준 세력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네루의 주장을 우리는 뜻 깊게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적 식민주의」의 저자 마틴 카노이는 “동인도 주식회사의 무력 보호를 받고 있던 선교사들은 인도의 자리에 대하여 더 정통하게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구조 • 문화 • 경제 • 주민들의 무역 관행에 대해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외국인이 인도인들의 사회에 거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것은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절차였다”고「인도의 교육역사(A History of Education inIndia)」를 쓴 시도 누를라(Syed Nufnffk)는 말하고 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 전반을 통하여 외국 선교 사업의 제1차적 중요성은 영국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동기를 정당화시켜 주는 일에 있었다. 새로운 영토를 탈취하고 해외에서 거대한 무역활동을 확립하는데 자원, 인력, 에너지를 전력투구하는 일은 백인의 의무(White men’s Burden)라는 이데올로기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뒷받침 해주었던 것이 선교사들이고, 이들의 개혁주의적 정열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써, 인도가 당한 착취와 종족 분영의 실상은 뱅갈에서 볼 수 있다. 인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뱅갈에서는 영국 세금 징수관들이 비인도적 방법을 이용한 매판 상인들과의 결탁으로 공장을 하루아침에 영국 재산으로 바꾸어 놓고 모든 생활필수품을 비싼 가격으로 사도록 강요하였다. 풍요했던 뱅갈인들은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씩 굶어 죽어갔다. 동인도 주식회사는 투자 한 재산의 10배 이상을 해마다 거두어 갔다. 이러한 판국에도 인도의 영국 선교사들은 식민지 관료들의 보호 아래 저들의 불법성을 정당화시켜 주면서 안일을 탐닉하였다.

 

2차 대전 후 통일된 독립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분리된 것은 단순히 종족과 종교의 이질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다.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할된 것도 자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음흉한 영국 제국주의가 200년을 꾸며온 음모에 의한 결과이다.

 

독립된 인도 정부가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가 선교사의 입국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도의 상품을 약탈하여 유럽에 팔아 넘겨 독점 이윤을 추구하던 악덕 상인들의 앞잡이가 된 선교사들, 인도의 어마어마한 자원 유출의 매개체가 된 선교 기관들에 대한 독립 인도의 선교사 입국 불허 조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라틴아메리카의 중심국가인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식민주의와 예수회와 선교회의 유착에 관한 인과적 실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에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 서구 문화를 전파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808년 포르투갈이 몰락하여 브라질의 리오데자이네로에 그 왕궁을 옮길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 예수회파 선교회는 사실상 브라질에 있어서 서구 제국주의의 대부였다. 브라질의 자연 자원의 탐색과 확보를 위하여 탐험대와 이민을 인솔한 것은 예수회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직접 포르투갈 ‘중상주의 팽창정책 ’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토착민인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자신들의 땅이 수탈당하는 것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인디안 중 어떤 부족들은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노예 제도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의 저항은 식민 지배계급인 백색 브라질인 들을 통하여 무자비하게 살육당하면서 정글 오지로 물러가게 되었다. 마침내 본토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 예수회 선교사들이 더 많이 투입되고 저항하는 인디안들을 개화시키고, 기독교화 시키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내륙 지역의 탐험을 구실로 저항하는 인디안들을 체포하는 일에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브라질의 정치사를 쓴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회파 선교사들은 토착 인디안들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멸종되지 않도록 보호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교회와 국가 정부 간의 구체적인 관계를 다룬 경제사를 쓴 사람들은 반대로 인디안의 유목 생활과 식민주의 농장 농업은 상층 되며 오히려 예수회파 선교사들은 인디안의 생활수단으로 하여금 식민지 경제 계획에 통합시키는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무역 상인들이 그곳에서 안전한 권리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하여 선교사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면서 자기들이 요구하는 사업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나이제리이아 있어서의 기독교 선교의 저자인(Ade Ajayi)는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때부터 곧 무역 상인과 자본가들에게 그 활동의 성과를 의존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선교 단체들의 노력은 노예무역을 대신하는 새로운 무역을 개발하는 일에 좌우되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회를 서구 종속사회로 만드는 일은 아프리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 못지않게 선교사들에게는 중요한 과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내륙 지방으로 옮겨가 직업 교육을 실시했고, 영국의 보호를 받고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영국 상인들의 자본으로 일하는 아프리카인들은 내륙 지방으로 들어가 모든 전략적 지점에 공장을 세우는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 아무튼 영국 무역 회사들과 선교 단체들과는 서로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왜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흑인 노예를 교육시키거나 개종 시키지 않았는가? 그것은 이 흑인 노예들은 이미 식민지 농장에 속한 기득 재산에 불과하였고 이미 취득된 재산을 위하여 더 선한 것을 베풀 필요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처럼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서구 제국주의의 경제 착취와 서구선교 단체의 기생적 유착 관계는 17세기에서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아프리카인들의 의식 발달로 저항을 받을 때에는 즉시 종족간의 대결, 또는 정부 등을 통하여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도구 역할을 해 왔다. 나이지리아 주재 선교사들은 라고스를 영국에 합병시키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회가 대부분의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을 때 선교사들은 무역 상인들과 합세하여 이 정책을 저지하는 운동을 벌였다.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아프리카를 개척하는 데 영국의 군사적 개입이 계속되도록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