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15/100회_지하경제권력.

 

 

1880년대의 아프리카 쟁탈 시대에 와서는 선교사가 남의 나라에 온 손님이 아니라 정복자이자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정치적 합병이 성취되자 선교사들은 식민 정권의 정치 장교의 뜻을 추종하게 되고 폭력으로 정복한 아프리카 땅에 천사 같은 영국의 이미지를 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의 정권과 종교의 유착 과정을 통한 합리적 경제 추구의 역사적 고증 가치를 통해 대표적 실례인 중국을 비롯하여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오늘이 있기까지 한반도 정세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변천사와 더불어 공존공생 관계로 고착되어진 정치적 ․ 종교적 행태론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종교적 발상지인 가톨릭교회의 지배 ― 「이단을 벌하고 죄인에게는 온화하게」이는 현재보다는 그 당시에 더욱 그러했다는.― 현재 철저하게 근대적인 경제적 특성을 가진 국민들도 감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15세기 말경에 출현한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에서는 감당하는 것이 더욱 쉬웠다.

 

16세기에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에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네덜란드의 대부분에서 그리고 17세기에 뉴잉글랜드에서, 또 한때는 영국 본토에서 세력을 얻은 캘빈주의의 지배는 우리가 보기에 개인에 대해 존재할 수 있는 교회의 통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형태였던 것 같다. 실제로 제네바,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그 당시의 구 도시 귀족의 광범한 계층 역시 캘빈주의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꼈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에서 일어선 종교 개혁가들이 비난한 것은 삶에 대한 교회적, 종교적 지배가 과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바로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들 안에서 경제적으로 상승하던「부르주아적」중산 계급이 천대미문의 청교도적 전제 (專制)를 받아들인 것에 그치지 않고 칼라일이 정당하게「우리들 최후의 영웅주의」라 부른 전무후무한 영웅주의를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변호,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어찌된 것일까?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자연적」사태를 이처럼 있는 그대로 감각적으로도 무의미할 정도로 전도시키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추진 동기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입김을 쐬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도는 동시에 일정한 종교적 표상과 밀접히 닿아있는 일련의 감각을 포함한다. 즉, 도대체「인간에게서 돈을 짜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성경 구절로 대답 한다. 즉,「그의 직업에 충실한 자를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서리라」가 그것이다.

 

화폐취득은 ―그것이 합법적 방법으로 얻어진 것인 한 - 근대적 제 질서 안에서 직업상의 유능함의 표현이며 이 유능함은 쉽게 알 수 있듯이 프링클린 도덕의 실질적인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따라서 경제생활을 지배하게 된 현재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자연 도태 과정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경제 주체 -바로 이 점에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수단으로의 「자연도태」개념의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적 특성에 적응된 생활영위 방식과 직업관이「자연도태」를 통해 잔존할 수 있으려면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고립된 개인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집단적 으로 유지될 일종의 세계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는 개인들이 태어나는 방대한 우주이며 이 우주는 적어도 개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의 불변적인 구축물로 나타난다. 그 우주는 시장의 연관에 얽혀 있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거래의 규범을 강제한다. 이 규범에 적응할 수 없거나 적응하려 하지 않는 정치가는 권력을 상실하여 권좌에서 쫓겨났듯이 이 규범에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교회는 경제적으로 예외 없이 제거 된다.

 

무인(武人)집권 이후 고려 불교에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선종(禪宗)에 있어서의 조계종(曹溪宗)의 확립이었다. 의천이 비록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교종을 주(主)로 하는 것이었다. 그가 천태종을 열 때에는 선종구산(禪宗九山)의 신진 승려를 많이 흡수할 뿐더러,「신편제종교총록(新編諸宗敎總錄)」에는 선적을 한 책도 넣지 않았다. 그러나 무인정권 시대를 전후해서 선종의 구산의 종명을 새로 조계종이라 하고 그 진흥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계종의 종풍을 크게 떨친 승려는 지눌(普照國師)이었다. 무인정권 시대에 송광사를 근거지로 하고 활약한 지눌이 그의 종지(宗旨)로 한 바는 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불심(佛心)임을 깨달은 것이지만, 깨달은 뒤에도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점수(漸修)였다. 이 지눌의 종지는 의천과는 달리 선(禪)을 주로 하여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이 지눌의 종지를 받드는 해동조계종은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이다. 이리하여 조계종은 무인 정권의 일정한 옹호를 받으면서 산간 불교로서의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은 심성의 도치(陶治)를 강조함으로써 장차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을 닦아 주는 구실도 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신흥 사대부들에 의하여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이 수용되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 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원(元)을 통하여 들어온 성리학은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은 송(宋)의 주자(朱子)가 완성한 것으로 종래의 한당류(漢唐流)의 훈고학적 유학(備學)에 대하여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新需學)이었다. 이 성리학은 송이 멸망한 후 원에서 성행하였는데, 이것이 다시 고려에 전래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미 무신난(武臣亂) 후 심성화 된 선종의 흥륭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용이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1274~1308) 때 안향(安珦)이 처음으로 소개하였고, 그 후 백이정(白頤 正)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 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이교 • 이종인 • 정몽주 • 길재 • 권근 • 정도전 등이 이를 발전시켰다.

 

고려의 성리학도 점차 그의 철학적인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심도가 더해갔다. 처음 이교는 불교「적」(寂)을 가지고 성리학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으로부터의 생성론과 대학(大學) • 중용(中庸)에서의 경(敬)까지를 포괄하려 함으로써 불교철학으로 성리학계를 이해하려는 한계를 보이고 있고, 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고 불리는 정몽주의 저술 중에도 이론적인 배불론이나 이학(理學)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던 것이 고려 말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는 본격적인 이기(理氣)철학을 전개하고 있어 이러한 발전을 나타내고 있다.

 

성리학의 수용은 사상계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에서 철학적인 유학으로 변화함으로써 새로운 사상 체계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이는 유불(儒彿)교체의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의 유교는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종교로서의 불교와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이제 신유학(新需學)이 형이학적인 철학으로 변화함에 따라 양자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도전(鄭道傳)등 성리학자는 불교를 인륜에 어긋나는 도(道)라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함으로써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후기에는 성리학이 받아 들여져 기존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사상이 쇠퇴하고 새로운 사상 체계인 유교가 흥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고려후기에 수용된 주자학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이기론을 통하여 하나의 통일적 원리로 파악하는 철학적인 유학이었다. 이기론(理氣論)의 요체는 우주만물이 모두 형이상의 이와 형이하의 기(氣) 양자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이(理)는 물(物)의 성 (性)윤, 기(氣)는 물(物)의 형(刑)을 각각 결정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의 근원은 이이며 그의 형체가 기(氣)가 근원이 되는 것이니. 전자는 본연의 성이고 후자는 기질의 성인 것이다. 인성은 본래 순진 무구 하나 인간이 타고 나는 기의 작용에 따라 그것이 청명 또는 혼탁하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수양에 의해 기질의 성에서 연유하는 혼탁을 버리고 본연의 성을 되찾을 수 있으며,이 노력이 인간의 최대의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이 조선조의 정치 이념으로 정착 하면서 고려 말에 강조되었던 명분론이나 도리론이 현실정치에서 그 실용성이 감소하고 대신 종전에는 배격되었던 사장(詞章)이 다시 중시되었다. 사장은 왕정에 관계되는 문서의 작성이나 각종 편찬사업, 그리고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작성 등에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전기의 양반 사회는 같은 주자학을 소양으로 하면서도 도리론(道理論) • 명분론(名分論)을 중시하여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그보다는 사장(詞章)을 주로 하여 현실의 정치 • 경제에 좀더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 은연중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의 소지는 이미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있어 합리적 명분을 제공한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역성(易姓)혁명론 이었다. 역성혁명론은 천명이상(天命理想)과 춘추정신이 묘하게 결합된 유학의 기본적인 혁명이론이다. 여기서 조선조의 건국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고려말 제왕의 무도(無道)와 여기에 따라 천덕(天德)이 다 쇠진하였음을 역설하고 다 음으로 신흥 왕조의 권력 성립을 민심귀복에 의한 천명(天命)의 발동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억불숭유 사상을 토대로 고려 말의 포악무도를 감불(感佛)에서 오는 불교의 폐단과 관련시키고 그 무도불치를 유교적 춘추정신으로 철저하게 고발하고 국정하려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조의 건국에 대한 대의명분을 역성혁명론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밝히는 한편 그와 같이 새로이 성립된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그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확인시키는 제도화 작업이 중요한 과제 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근거를 바로 대륙의 정통적인 천자인 명 제왕의 책봉을 받는 데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공양왕(1392년) 4년7월 17일에 등극한 이 태조는 그 해 8월 29일에 전밀직사(前密直司) 조림을 명도(明都)에 보내어 명제(明帝)의 승인을 받았고 12월에는 예문관학사 한상질을 보내어 국호를 청한 결과 조선이란 칭호를 명(明)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왕의 책봉과 그 국호의 제정을 통하여 명 (明)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부여 받은 조선왕조는 그 건국 초부터 자주성을 상실한 일면을 보였고그 결과로 대륙에 대하여은혜와 예(禮)로 얽혀진 사대 질서를 가져오게 하였고, 사대지예(事太之禮)를 갖추고 조공을 하는 대가로써 정치적 지지와 정통성을 얻는 주종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중원문화와 삼대 하은주(夏殷周) 질서를 존중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 ) 요순공맹(堯舜孔孟)을 정치나 인간의 이상형으로 동경한 데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교에서는 그러한 복고적인 이상형을 내세워서 현상 타파나 관료제도 개편에 의한 민생의 안정이 강조되기도 했으며 여기서 유교에는 민본사상 내지는 애민사상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유교가 본래 정치의 혼란과 인륜의 패덕(悖德)을 극복하여 정치적 도의와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려는 현실적 요구에서 출발 했던 만큼 유교의 윤리성은 그 기본적인 속성이라 하겠다. 특히 치자(治者)의 피치자(被治者)에 대한 윤리는 물론, 개인 상호간의 사회적 윤리를 존중하는 유교적 도덕율은 군주의 선정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현실적 목적과 직결되고 있다.

 

따라서 유학사상의 기조는 공맹 (孔孟)의 성선설을 기반으로 하고 사회적 기강의 기초는 부자(父子)간의「효도J(孝道)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사회질서 및 국가질서에까지 확대하여 부자, 형제, 부부, 군신 등의 상하 순종 관계에서 인륜의 대망을 이끌어 댄 것이다.

 

그리고 이 예절이 지켜지고 천리에 부합되는 윤리 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의한 덕치(德治)가 이루어져야 하는 바, 즉 수기라 하면 개인이 윤리적으로 자기완성을 지향하고 덕을 쌓는 수덕을 의미하며 그것이 제대로 되면 사람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즉 정치도 그대로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논리가 근본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덕은 군자 또는 치자(治者) 신분에게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자질로써 그 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목(四德目)이다. 이와 같이 유교정치에 있어서는 치자(治者)는 수덕하는 자(者)라야 하며 그 구체적인 덕목으로 인의예지의 사덕을 치자는 스스로 학습하고 체득할 것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수덕의 구체적 방법으로는 유교의 경전(4書 5經)을 연구하고 중국의 고제(古制)를 공부하며 성현의 정신을 몸소 체득하는 것이었다.

 

한편 유교정치의 덕치사상에 있어서는 군덕(君德)과 천덕(天德)이 합치되어야 하고, 그것은 다시 민본사상과 직결되어 백성의 현실 생활에 있어서 민생의 안정이 강조된다. 이리하여 천재지변도 인군(人君)의「부덕의 소치」로 생각되었으며 그 신료치자(臣僚治者)에 있어서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천재지변을 덕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유교문화의 한계가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각종의 종교와 신앙이 관민간(官民間)에 혼재된 것이다.

 

무릇 조선조에서 유교의 덕치사상은 형식적이고 관례적이며 통치의 명분에 그쳤다. 그것만으로는 현실과의 괴리를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화재나 대홍수 등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인군(人君)「부덕의 소치」로서만 생각하여 이른바 미재칠사(弭災七事)의 고식적인 사후처방 같은 것이 근원적 대처 방법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당시 명분상으로 이단시하여 배척하던 다른 전통적인 종교나 신앙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즉, 불교 • 도교 • 무속을 비롯한 각종 신앙들이 널려 행하여진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조의 주민의 신앙은 유교, 불교, 도교, 점복, 식위 설, 정감록, 그리고 샤마니즘 등으로써 유교는 전술한 바와 같이 국교로써 지배적 특권 계급인 양반 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사용 상인계급 등에 까지도 파급된 기간적 교의가 되었다. 이러한 유교정치가 정치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가운데에서도 가령 수조새(水早災)에 대한 기도(祈禱)나 기우(祈雨)는 질병에 대한기양(祈禳), 사후명복의 기원(祈願)같은 행사는 국가적으로 또는 왕실중심으로 전승되게 된 것이다. 태조 때 아래로 세종, 세조, 성종 등 역대의 국왕이 일면에서 불교 행사를 계속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공식으로 배척을 받아왔지만 때로는 호국불교로써 그 기세를 만회할 기회도 있었고 민간 신앙으로서 무시못할 세력을 유지한 것이며 대체로 염불을 주요 수양으로 삼는 기도 축원의 세속 신앙으로써 대중화되었다.

 

다음 도교(道敎)는 조선조 초기부터 무욕(無慾)과 청정(淸淨)을지표로 삼는 신앙으로써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 왔으며, 주로 성진(星辰)선앙의 초제(醮祭)을 행하여 질병기도(疾病祈禱)의 지능을 하는 한편 성진(星辰)이 군사(軍事)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가령 장사(將師)가 지방의 지휘관으로 나가게 되면 이른바 태일초제(太一醮祭)를 지내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으며, 태조(太祖)는 소격서(昭格暑)를 국가기관으로 존치하여 국사(國事)에 관계되는 도교의 기도행사(祈禱行事)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후기에 들어와서 도교(道敎)는 민간신앙으로써 그 자취를 그치지 않았다. 이 밖에 점복은 민간에 뿌리를 박고 관혼상제 등을 비롯한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되었고 특히 오행간지설(五行干支說) 등과 관련된 역점(易占)이 성행하여 국가에서도 관상감(觀象藍)의 일분과(-分科)로 명과학(命課學)으로 하여 이를 보호하였다. 점복의 일종인 풍수설은 더욱 성행하여 개인의 주거묘지의 선정으로부터 궁궐 국도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조연과 민간에 널리 극성 하는 경향이었다.

 

복지점(卜地古)이라고 할 풍수설과 밀접한 것으로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기초를 두고 천인(天人)의 관계를 논하는 직위설(職緯說)은 민간에 미묘한 정치적 시사력 (示唆力)을 가졌던 것으로 가령 풍수와 도참(圖讖)이 결합되어 신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비종의 비기류의 은둔사상, 말세사상 및 낙관적인 운명론과 역성 혁명관(易姓革命觀)등이 민간에 뿌리를 박고 민중 봉기를 일으키는 일원이 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또 이상의 신앙들이 대개 중국계의 문화와 연결되고 비교적 상층급의 주민의식을 형성하는 데 대하여 샤머니즘 계통의 각종 원시 선앙은 고대 이래 전승되어 온 명산대천에 대한 신앙(信仰), 성황신(城隍神), 해신(海神), 도신(島神) 등 귀신신앙(鬼神信仰)과 무속으로써 널리 행하여 졌으며 이러한 원시신앙(原始信仰)은 주로 귀녀 층에 깊이 침투되어 궁중에서조차 답습되는 일이 적지 않았으며 기우제(祈雨祭)를 비롯하여 국가행사로써 소위 국무당(國巫堂)이라는 제례(察禮)가 행하여지기도 했으며, 국가재난 시에 국무당이 승려, 도사(道師)와 더불어 기양행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전국 각 처의 무당에게는 무세(巫稅)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무속 중에서도 가정주부가 섬기는 귀신(鬼神)놀이인 가신제(家神祭)는 무격(巫覡)의 전업으로 점복과 기도가무(祈禱歌舞)와 강령(降靈)으로「귀(鬼)」의 재(災)를 쫓고「신(神)」의 복(福)을 빌었던 것이며, 여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일부까지 습합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조에서 형성된 전통적 정치의식은 건국 이래 유교가 국교로 대치됨에 따라 점차 유교적 정치문화가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사서(史胥) 상인 계급에까지 파급하여 토착화되었으며 이로써 유교적 가치관이 전통적 정치의식 구조의 근간은 이루었다. 한편 유교적 교의(敎義)가 현실 정치를 다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념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기 위하여 불교, 도교, 무속을 비롯한 각종 신앙이 사회 계층 간에서 널리 행하여졌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상 조선조의 유교는 순수한 문화 가치로써 국민 사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되지 못하고 조선왕조 사회의 지배적 정치 세력에 의하여 정치적 목적에서 이용되고 이행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치와 응결하여 이데올로기적 교의(敎義)로 빠진 조선조의 유교는 밖으로 은혜와 의리를 중심으로 하는 명(明)과의 종주조공(宗主朝貢)의 사대 질서를 정립시키고 안으로는 예론과 상고주의에 의한 사회 안정과 민풍의 정화를 꾀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의 질서를 숭상하고 요순(堯舜)과 삼대의 문화에 대한 지나친 추모에서 모화사상을 더욱 깊게 하였으며 유교에 대한 편협한 맹종은 쇄국주의와 척사(斥邪) 같은 사상적 폐쇄를 가져왔고 유교와 정치와의 응결은 경학(經學)과 정치 충원을 연결시킴으로써 당파 투쟁과 사화(史禍)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나았으며, 오륜 오상에의 지나친 집착은 사상의 창조적 발전을 저해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갖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개혁 사상이 곧 실학(實學)이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나 개혁의 논리는 종래의 주자학과 같을 수 없었고, 유교사상의 자기반성과 그의 극복 과정에서 나타나는 발전적 국면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에 의한 실학은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와 이용 후생학파를 종합하여 집대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의 주사학에 기초하여 한국 실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