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2/100회

 

 

제 1 절 혁명의 본질

 

1. 개혁의 정의

 

스탈린은 개혁을 혁명의 부산물이며 혁명을 강화하는 요구라고 하여 혁명과 개혁의 근본적 차이보다도 그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러시아에 있어서 혁명 후 필연적으로 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야 했다는 것, 즉 혁명의 성과를 혁명으로써 법제화했다는 사설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그것은 역사상의 모든 정치적 개혁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보댕은 국체 변혁 중 급격한 것은 혁명이며 점진적인 것은 개혁이라 하고 혁명은 주권 소재의 이전을 말하나 개혁은 최고 권력을 포함하지 않은 법률 또는 제도의 변화를 말한다.

 

블룬츨리(Bluntschli)는 ‘개혁은 변동이 헌법과 일치해서 제기되어야하며…… 형태에 있어서 합헌적인 것이어야 한다. 변동은 헌법의 정신과 부합되어야 한다. ……만일 헌법의 형태와 정신 그 어느 하나가 침해되는 경우 그 변동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라고 하여 개혁과 혁명의 차이를 합헌성 여부에서구하였고, 라스웰은 ‘정치개혁은 온건한 방법으로 수행되는 한 쇄신이다.’라고 하여 그것이 주로 권력을 기진 사람에 관계되는 경우 그것을 계승(succession)이라 하고, 권력 실지에 관계되는 경우 그것은 계획적인 개혁(programmatic reform)이라 하여 개혁의 온건성을 지적 하였으며, 엘우드는 ‘혁명은 돌연한 폭력적 변화며 개혁은 점진적 변화다.’라 하여 개혁의 특정을 그 점진성에 두었다.

 

라살레 (F.Lassalle)는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개혁은 아무리 장점이 있다 하더라도 장시일에 걸치는 것이 단점이며, 반면 혁명은 아무리 부인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급속하고 강력하게 목적을 달성한다는 장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는 개혁과 혁명을 시간적인 차이에서 구별한 것이 특색이다.

또 카우츠키는 ‘양자의 차이는 새로운 단계에 의한 정권의 탈취냐 아니냐에 있다. 기존 지배 계급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은 개혁이며 새로운 계급에 의해서 행해지는 변화는 혁명이다.’라고 하여 계급의 변동 여하로 구별하였다.

 

영목안장(鈴木安藏)는 ‘아무리 법률 규정이나 법제일반의 개혁이 근본적으로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국가 권력의 성격에 있어서 계급적 변혁이 없고 근로 인민대중에 대한 동일 본질의 착취자가등장하여 새로운 법제 하에서 여전히 종래의 재산관계가 보존되는 경우는 혁명이 아니다.’라고 하여 카우츠키의 이론과 동일하게 계급성에 치중한 견해를 나타냈다.

위에서 말한 개혁의 본질을 요약해 보면_

 

첫째, 개혁은 사회 조직이나 정치제도의 근본적 변혁은 아니며 부분적 변혁이고

둘째, 폭력적이 아니고 합법적 절차(의회의 결의나 통치자의 합헌적 조치)에 의한 변혁이며

셋째, 계급관계의 기본적 변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2. 진화의 정의

 

스탈린은 ‘변증법적 방법은 운동에 진화적 형태와 혁명적 형태의 두 가지가 있다. 진보적인 요소가 자연 발생적으로 하루하루의 활동을 하면서 낡은 질서 속에 작은 양적 변화를 가져올 때 이 운동은 진화적이다. 또 진보적 요소가 결합하여 단일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낡은 질서를 근절하고 생활 속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적의 진영에 덤벼들 때 이 운동은 혁명적이다. 진화는 혁명을 준비하고 혁명을 위한 지반을 만들어내나 혁명은 진화를 완성하고 계속 그 활동을 촉진한다.’라고 하였다.

 

쿠노오(H. Cunow)는 마르크스의 진화주의와 혁명주의 사이의 근본적 대립을 부인하면서‘마르크스의 발전 이론에 의하면 정치적 • 사회적 혁명도 진화에 속한다. 실제 그러한 혁명도 또 진화적인 행동이다. 다만 고무되고 강제적으로 설행된 행동이다. 즉, 본질적으로 급속한 속도로 행해진 전방에의 다름 질이다.’라고 하여 혁명과 진화를 거의 동일시하고 다만 혁명은 강제적 인위적으로 강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진화와 혁명과의 차이에 대해 그는 혁명은 질적 변화이며 진화는 양적 변화라고 구별하고 진화를 혁명의 준비 단계로 보았다.

 

가이거(T. Geiger) 논리로써 요약하면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은 존재하는 상태의 모든 근본적 변혁을 의미하며 그것이 어떠한 영역에서 일어나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진화는 주어진 동일 적으로 지속하는 범위 내에 있어서의 발달 혹은 형성이다.’ 라고 하여 양자의 구별을 그 영역의 차이로 보았으며, 혁명은 이질적 변화인데 반해 진화는 동질적 일치선상의 변화로 규정하였다.

 

3. 혁신의 정의

 

변혁의 내용에 있어서 개혁과 같을 수 있으나 그것이 의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통치자의 행정권의 발동으로 위로부터 정치제도 및 정책의 변동을 가져온 것이 혁신인데 이것은 미국에서 혁신주의( Progressivism)로 불려지고 있다.

 

혁신주의 사상은 1901년 T. 루즈벨트에 의해 신국민주의(New Nationalism)의 제창으로 국가의 공익 보호의 필요를 강조하며 “현 제도하의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을 국가의 종복으로 만들며 주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재산과 인간 두 복지에 관한 새로운 관념에 직면하고 우리나라에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정도로 사회적 • 경제적 사태에 대한 적극적 간섭 정책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창하여 보다 민주적 경제 조직과 보다 광범한 사회적 계획 차원에서 트러스트의 규제, 공중위생의 보호, 철도 회사에 대한 감독 등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또 1913년 윌슨 대통령에 의해 관세 인하, 은행 및 화폐 제도의 개혁 및 산업 조직의 폐해 제거를 단행케 했으며, 1928년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의 뉴우딜(New Deal)에 의해서 재현되었는데 산업에 대한 통제, 유년 노동의 금지, 노동시간의 제한, 최저 임금의 규정 및 물가의 조절로 인한 국내 제 계급간의 구매력의 조절 균형의 시도 등은 그 대표적 시책이라 할 것이다.

 

뉴우딜은 그 혁명적 비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와 집합주의를 양립시켰으며, 일면에서는 개인주의의 수정과 경제 질서의 공동체적 조절을 주장하고 타면에서 사회주의의 계급투쟁과 노동가치설을 배격 하였다.

 

미국의 혁신주의를 중심으로 혁신을 혁명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분석 하여 볼 때_

 

첫째, 혁신은 혁명과 같이 폭력적이 아니며 개혁과 같이 합법적인 변혁이다. 많은 혁신적 정책이 미국의 최고 재판소에 의해서 위헌 판결을 받는 일도 있으나 그것은 헌법 해석의 문제와도 관련되며 만일 위헌이 판결되었을 때에는 다른 합법적 방법에 의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둘째, 혁신은 사회조직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고 기존 질서의 수정이다. 혁신이 150년간의 미국의 개인주의적 전통에 대한 수정이고 도전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개인주의의 전면적 부정은 아니었고 개인주의와 집합 주의의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셋째, 혁신은 위로부터의 변혁이라는 점이 혁명이나 영국 정치사상의 개혁과 다르다. 혁신은 미국 대통령들의 정부 시책이었지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아래로부터 위로 강요된 것이 아니었으며, 의회가 중심이 되어 성취한 변혁도 아니었다. 물론 혁신주의가 미국의 혁명운동, 즉 혁신당(Progressive Pary)의 출현과 관계 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혁신당은 공산당의 하나의 분파였으며, 혁신 정책은 어느 특정 세력이나 정당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넷째, 혁신주의는 정부 권한의 확대, 행정권의 강화 등을 초래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온 점도 있으나 그것은 독재 권력의 수립이나 정권 연장을 위한 인기 전술이 아니고 도리어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받으면서도 사회적 폐해를 제거한 것으로 보아 전진적이고 민주적인 의미가 있으며 결코 보수적인 성격의 시책이나 사상도 아니었다.

 

4. 쿠데타의 정의

 

쿠데타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이 혁명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 가에 대하여 브리태니카 백과사전(the Encyclopaedia Britannica)에서는 ‘프랑스어에서 쿠데타는 국가에 대한 일격의 뜻으로 개인 또는 집단이 보통은 제한된 폭력을 사용하여 정부 당국의 지위를 탈취하는 기습적 행동을 말한다. 그 행동은 관사 경질에 대해서 법률이나 헌법에서 규정되고 있는 정식의 요건에는 합치되지 않는다. ……혁명과는 달리 경제적 • 사회적 기본 정책의 변경은 없으며, 경합하고 있는 정치 집단 사이에 권력의 뚜렷한 배분도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쿠데타의 특징을_

 

첫째, 제한된 폭력 행사며 둘째, 기습적으로 정부 권력을 탈취하며 셋째, 비합법적 • 위헌적 행위이며 넷째, 불안정 사회에서 빈번히 발생하여 악순환 함으로써 정치위기의 영속화를 초래하기 쉬우며 다섯째, 무기와 조직에서 유리한 군인에 의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 가장 쉬우며 여섯째, 역사적으로 쿠데타는 그 성공 후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인민 투표를 실시하는 경향이 많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쿠데타를 ‘정립된 정치 조직의 특수 지배층에 대하여 일반 지배 단체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감행하는 폭력 행사 이지만, 그 정부 조직 자체의 변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쿠데타는 동요하고 불안정한 정부 조직, 특히 독재나 폭군 하에서 자주 생긴다.’고 하였다.

 

프리드리히의 견해는_

 

첫째, 기존 정부조직에 대한 폭력 행사이며 둘째, 그 주동은 일반 지배 단체의 구성원이며 셋째, 정부 조직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고 넷째,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지주 일어난다. 라고 규정하여 혁명과 쿠데타를 구별하였다.

 

헨리 스펜서(Henry R. Spencer)는 ‘쿠데타는 국가의 합법적 헌법에 의하지 않고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정부의 변혁이다.’라 하여 정권을 장악 하고 있거나 상당한 권력을 가진 자가 기존 헌법에 불편을 느낄 때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쿠데타는 불가피하게 급속히 실행되며 비밀리에 준비되고 구 지배 세력의 체포, 계엄령의 선포, 국회의 해산 또는 정권을 무자비하게 단행한다.’고 하여 그 비합법성과 폭력성을 지적하였다. 또 ‘쿠데타는 야심가 집단의 소행이며 계급투쟁, 경제적 • 사회적 혼란 및 대외적 위기를 틈타서 일어나는 것이 상례라 하였다. 그는 또 쿠데타의 주동 인물들은 실패해도 잃을 것도 별로 없고, 성공하였을 때에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일어나는 것, 즉 노름꾼의 심리를 가진 자의 소행이라 고 하고 일반적으로 입헌 제도가 극도로 약할 때, 그리고 그것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치적 • 경제적인 불만을 해결하지 못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미과휘언(尾鍋輝彦)은 ‘혁명은 피지배 계급인 민중의 아래로 부터의 반역이나 쿠데타는 기본적으로는 기존 지배 세력 사이에 있어서의 권력 탈취 투쟁이다.’라고 규정하였다.

 

할가텐(G.W.f. Hallgarten)은 나찌(Nazis)와 파쇼(Fascio)의 정권 정악과정을 의사혁명(Pseudo Revolution)으로 보고 ‘의사혁명은 사회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계급에게 지지된 실력자의 권력 장악’이며‘, 의사혁명가는 그 혁명적 특징을 강조하여 자기 정부의 본성을 은폐하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쿠데타를 의사혁명으로 본 점에서 전체주의 독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였다.

 

상기한바 쿠데타는 1653년 오리버 크롬웰의 의회 해산, 1799년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 1851년 루이 나폴레옹(Lauis Napoléon)의 쿠데타,1888년 불랑제(Boulanger)의 쿠데타, 1918년1월 레닌의 쿠데타 및 히틀러 • 무솔리니의 쿠데타를 비롯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는데, 그 성격은 반드시 같지는 않으나 그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쿠데타의 본질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에 의한 쿠데타와 실패한 예로써 불량제의 쿠데타를 고찰하기로 한다.

 

1795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총재 정치는 대혁명의 후퇴로 안정을 얻은 반면 경제적 위기와 그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정당파의 반란, 바훼프(Babeuf) 중심의 평등주의자의 음모 및 총재 정부의 무능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실의에 빠지게 하였다. 이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총재 정부는 당시 이탈리아에 위정 중이던 나폴레옹을 파리로 소환하였다. 그 후 그는 영국 정복군 사령관으로 인도를 거쳐 이집트에 있었으나, 1799년8월 아무 지시도 없이 이집트를 떠나 11월16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파리에 도착하자 정세를 분석하면서 모든 행동에 신중을 기하였다. 처음에는 총재가 되려고 하였으나 연령 미달(40세이하)로 단념하고 당시 총재였던 아베 시에스(Abbé Sieyés)와 접선하여 1799년11월9일 그에 반대한 의회를 해산하고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위기의식을 조성시켰다.

 

나폴레옹의 쿠데타에서 특정되는 것은 쿠데타가 정치적 • 사회적 불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쿠데타의 주인공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현실을 가혹하게 표현하고 자기는 애국의 기수며 자유와 평화의 투사라는 것, 결코 권력욕이 없다는 것을 공언하고 순수성을 강조하며 처음에는 가급적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나(그 이유는 합헌성을 부여받기 위해서) 그 와는 별도로 쿠데타의 음모를 치밀하게 계획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1875년에 성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사실상 정파 간의 일시적 타협으로 공화제를 채택한 것으로 정치의 비능률, 오직 사건의 속출, 공화파의 분열로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현상 타파론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불랑제는 1886년 육군 대신이 되었는데, 그가 독일 • 프랑스 국경에서 프랑스 경관이 독일군에 피체된 사건을 비스마르크(Bismark)를 굴복시켜 프랑스에 유리하게 해결함으로써 복경(復警)장군으로 불리고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1888년 예비역으로 된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며 두 번이나 대승하자 불랑제 지지자는 쿠데타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생각하고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불랑제는 우유부단하여 거사 직전에 주저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불랑제의 경우에서 입증되는 것은 쿠데타의 성공은 주모자의 인기보다도 실력을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