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3/100회

 

 

제 2 절 혁명의 원인

 

1. 정치적 • 심리적 요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을 바라는 자가 보다 많은 것을 가진 자 와 평등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 내란이 일어나며, 불평등과 우월을 바라는 자는 동등하지도 않은 자가 보다 적은 것을 가지지 않고 도리어 같은 것 혹은 보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내란을 일으킨다. 바꾸어 말하면 보다 적은 것을 가진 자는 동등하기 위해서, 동등한 자는 보다 많은 자가 되기 위해서 내란을 일으킨다. 그 밖의 원인으로 교만 • 공포 • 우월 • 경멸과 국가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의 불균형한 세력의 성장 및 선거에 있어서의 책동 • 경시 • 세사에 관한 부주의, 국가의 구성 부분 사이의 불유사 등이 있다.

 

또 공포에 의해서 즉, 부정을 한 자들이 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또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자는 처벌을 받기 전에 선수를 치려고 내란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국가의 어느 부분에 있어서 비례에 어긋난 성장에 의해서도 국체의 변혁은 일어난다.’고 하였고, 국체는 어떤 경우에는 폭력에 의해, 어떤 경우에는 기만에 의해 바뀌는데‘, 민주제에서는 특히 민중 지도자의 전제로 인해서 변혁되며 과두제에서는 주권자가 대중에 부정할 때, 사치스러운 생활로 사적 재산을 탕진할 때, 귀족제에서는 어떤 소수자만이 영예 있는 관직에 있을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한편 뮤젤은 ‘혁명의 원인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지도층이 무능력해지고 현상 유지를 불원하는 민중의 감정이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하여 역시 지도층의 무능력과 그에 따른 민중의 불신을 중시하였으며, 메리엄도 ‘대부분의 혁명은 권력에 굶주린 집단에 의해서 촉진된다.’고 하고 ‘혁명을 내포하는 요소로써 첫째, 권위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깊은 지식의 결여 둘째, 정치적 상벌의 정확한 배분의 실패 셋째, 회유 즉 중용의 결여 넷째,권력 폭주의 회피의 실패 다섯째, 계획과 지도의 불완전 여섯째, 정의와 질서의 균형미의 상실 등을 들었는데 이것도 지배층의 무능을 강조한 것 이다.

 

헤이스(C.H. Hayes)가 영국 혁명의 네 가지 원인 중에 통치자 또는 지배 계급이 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 • 폐쇄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혁명을 야기 시키고 격화시킨 바 있듯이 국왕의 무능을 지적한 많은 사례 가있다.

 

먼저 제임스 1세는 종교문제에서 청교도 목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1604년에 ‘햄프던 코트’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태도는 급변하여 퓨리타니즘(puritamism)은 도저히 국왕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주교 없이 국왕 없다’(No Bishops, No King)라고 말하고 도리어 3백 명이 넘는 청교도 목사를 그 직에서 추방하여 가톨릭에 호의를 표시하기에 이르러 청교도들은 심중으로 혁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1625년에 즉위한 차알스 1세는 1628년 의회에서통과한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에의 회답을 주저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6월7일 이것을 승인하고 의회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의 의사는 아니었다. “의회의 청원은 법이 아니다.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은 국왕의 명예이며 위엄에 맞는 일이기는 하나 국왕의 말이나 의사를 저버리면서까지 그것을 확대하지 않는 것이 신민의 의무다. …… 따라서 사태는 청원 이전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여 영국 국민을 격분시켰다.

 

또 로오드(Loud)는 주교제도는 신이 정한 것이라는, 즉 국교회신권설의 입장을 취하고 청교도가 중시한 설교를 금지하고 교사들은 기도서를 낭독만 할 수 있게 하여 이를 비판한 자를 때리거나 귀를 자르거나 코를 쑤시는 극형으로 처벌하였다. 또 제도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행함으로써 장로파의 반감을 샀으며, 그것은 전쟁을 유발하여 그 전비의 조달 때문에 의회를 소집케 되었는데 이것이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차알스 1세는 의회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대항의문’이 통과되자 하원 지도자 펌(Pim) • 함프덴(Hampden) • 스트라우드(Wiliam Straud) 등 5명과 상원의원 맨빌(Mandvil)자작 • 에드워드 몬태그(Edward Montague)를 대역죄로 고발키로 결심하고 상원에 제안하였다.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의회를 무시하고 이들을 체포코자 보위병을 이끌고 직접 하원을 습격하였다. 이때 이를 의장이 거절하자 다시 런던시 삼사회로 가서 그들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기서도 거절되고 말았다. 그 는 의회를 해산하고 엘리어트(Elliot) 이하 9명의 의원을 투옥하였으며, 그동안 청교도 박해와 기사강제 헌금(Beneνolence) • 선박세(Ship money)의 징수를 자행하였다. 결과적으로 국왕이 직접 반대파를 체포하기 위해서 행동하였다는 것은 의회파나 런던 시민에게는 혁명의 결심을 부동의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만일 국왕이 그것을 받아들였더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이 시작된 후에도 의회파는 국왕에게 여러 가지의 타협적 제안을 하였다. 1642년6월 의회는 국왕에게 ‘19개조의 제안’(Nineteen Proposal)을 제출하였다.

 

그 골자는 ①의회의 동의에 의한 주요 관직의 임면, ②의회가 주장 하는 방식에 의한 교회 개혁의 단행,③현재 국왕이 소유하고 있는 군대를 해산하고 앞으로는 의회가 주장하는 방식에 의해 군대를 편성할 것,④재판관은 권리 청원의 여려 조항을 존중할 것 등이었는데 국왕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1644년1월24일 허원은 ‘익스브리지제안’(The Propositon of Uxbridge)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①국왕 및 전 국민의 엄숙 동맹에의 참가를 법률로써 정하고, ②감독 제도를 폐지하고,③교회의 개혁은 양원 일치로 법률로써 정하고,④국왕 • 지주간의 봉건적 권리를 해소하고,⑤군대통사권 • 군비징수권을 의회가 가지며,⑥런던 및 런던 시민의 제특권 • 제자유를 확인하는 법률을 제정할 것 등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국왕에 의해 거절 되었으며,결국 왕당파와 의회파는 극한적인 투쟁 이외에 타협의 길이 없게 되었다.

 

차알스 2세는 청교도혁명에서 사형당한 부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청교도혁명 중에 일어난 여러 변화를 기정사실로 승인하고 보복적 행동을 취하지 않으며 신앙의 자유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브레다’(Breda) 선언을 승인한 뒤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당파가 중심이 된 기사의회에서 제정한 ‘클라렌든법’(Claredon Code)을 승인함으로써 비국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더우기 말년에는 차알스 1세의 사형에 관여한 사람들을 처형 하였으며, 심지어는1658년에 사망한 크롬웰의 시체를 파헤쳐 다시 교살형에 처하는 심한 반동 정치와 우거를 저질렀다. 미국 독립혁명에 있어서 조오지(George) 3세와 수상 그렌빌(Grenville)의 식민지 정책도 혁명 원인 중 국왕이나 통치자의 폐쇄성이 크게 작용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식민지인의 자유와 자치의 요구가 점고해지자 조오지 3세와 수상 그렌빌은 식민지 억압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제국 국방비의 일부를 식민지에 부과시키기 위해서 1764년사탕법(Sugar Act)을 제정하였으며, 1773년12월 식민지인이 인디언으로 변장하여 보스턴에 정박 중인 영국 상선을 습격하여 차를 모두 해중으로 던진‘보스턴 차회사건(Tea Party)’이 일어나자 본국 정부는 1774년 정별과 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4개의 강제적 제법 (Coercive Acts), 즉 ①보스턴 시민이 보상 개준할 때까지 그 항구를 봉쇄한다(Boston Port Act),②매사추세츠(Masachusets Hαncock)를 체포하고 콩코드(Concord)라는 식민지인의 무기와 탄약을 압수하려고 영군의 소부대를 파견한 것이 혁명전쟁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전에 인민을 탄압한 사례는 ‘백지 체포상’(Lettre de Cachet)이다. 이것은 죄명을 표시하지 않고도 누구든지 체포 • 감금하고 나아가서는 국외로 추방할 수 있는 것으로 1775년부터 1789년 사이에 65종의 서적에까지 유죄를 판결하여 혁명운동과 혁명사상을 억압하였다. 이외에도 특히 국왕이나 군주 또는 지배 계층(특권계급)은 민중의 궁핍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치부 • 사치 • 낭비를 일삼음으로써 인민은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새로운 혁명의 큰 원인이 된 가장 대표적인 예는 프랑스 혁명 전의 루이 16세의 치세와 7월 왕정이다‘ 루이 15세는 재상 모푸(Maupou)의 진언에 의해 치세말기에 파리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그 대신 사법권만을 갖는 최고회의(추밀원)를 두었다. 그러나 의지가 박약한 루이 16세는 세론을 두려워하여 즉위와 더불어 고등법원을 부활하여 자기의 왕위 상실을 준비하였다. 상기한 바, 구제도(ancien régime) 말기의 프랑스는 미라보(Mirabeau)가 말한 ‘통일없는 제 주민의 집합체’ 였다. 국왕은 신에 의해서 절대적 권한을 부여받으며 3부회는 단순한 자문기관으로 국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의 궁여지책 이었다. 프랑스의 국경은 극히 애매하여 프랑스는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사법 제도도 왕권이 모든 재판의 원천이기 때문에 국왕의 간섭을 받았다. 즉,‘왕체의 이론상의 전능과 현실적 무능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었다. ’구제도에서 루이 16세의 무능과 무기력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은 내정개혁의 실패다. 그는 온순하고 결단력은 없었으나 국왕으로서의 의무감은 강하였기 때문에 특권 계급의 낭비와 사치를 내심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국내 유일의 대영주로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제 1계급인 성직자와 제 2계급인 귀족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세되어 있었으며, 이들 특권 계급은 오직사치와 낭비에전념하여 베르사이유(Versailles) 궁전에서 환락으로 지새우고 재원이 떨어지면 영내의농민을착취 하였으며,제 3계급의 곤경에는 무관심 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생활은 어떠한 막대한 재산이라도 삼켜버리는 심연이었다. 그리하여 1774년부터 수차의 내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특권 계급의 반대에 부딪쳐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은 군대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루이 16세 치하의 군대는 내각과 그들이 주장하는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

 

프랑스 7월 혁명의 경우 1824년에 즉위한 샤를르 10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귀족 중심의 반동정치를 하였다. 1826년 독성죄 처벌법을 제정하여 종교의 창독에 대해서는 극형을 내렸으며, 1827년의 선거 후 그는 하는 수 없이 과적왕당파 내각을 사퇴시켰으나 1829년8월 다시 그들에게 조각을 명하였으며, 1830년3월 하원이 내각을 불신임하자 국왕은 의회를 휴회하고 5월 중순에는 완전히 의회를 해산시켰다. 샤를르 10세는 7월 25일에 ‘폴리닥(Polignac)의 칙령’에 서명하게 되었다.

 

‘폴리낙(Polignac)의 칙령’은 새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할 것, 의원의 수를 반감할 것, 상업 특허상 및 공업 특허상의 소유자들을 모두 선거인명부에서 제외하고 대토지 소유자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할 것, 신문 ․ 잡지는 사전 검토할 것 등이었다.

 

그 당시 정치적 • 심리적 상황은 그가 “영국과 같은 국왕이 되는 것보다 나무꾼이 낫다"고 말한 것은 그의 폐쇄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이거니와 그의 이와 같은 아집에 대해서 러시아의 니콜라이(Nicholas) 1세와 메테르니히(Metternich)까지도 자유주의자에게 양보할 것을 권고할 정도였다. 7월26일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헌장 제 14조에 의해 긴급칙령을 발포하고 출판의 자유를 금하며 아직 소집되지도 않은 신 의회를 해산하는 등 선거법을 개악하여 약 2만 5천명의 부르주아지 유권자를 제외시켰다. 상기한 바 7월 왕정에 있어서 기조 정부는 국민의 감정과 이익을 무시하고 무규율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돌이켜보면 1845년부터 46년까지의 흉작과 그에 이은 경제공황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 때 기조는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못하였으며, 그저 다가올 공포에 의해서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고 노동자의 저항조차 탄압할 기력이 없었다. 마침내 1848년2월22일 반정부파의 향연을 폐지시켰을 때 국민군의 대부분이 시위 군중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왕의 무능과 그 측근자의 무기력이 혁명을 유발시킨 사례는 1917년 러시아의 3월 혁명과 임시정부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7년3월 황제 니콜라이가 일선 사령관으로 나가 있을 때 괴승 라스푸틴(Rasputin)이 황비를 조종하여 정치를 좌우하였고, 황비는 황제에게 보다 잔인할 것을 권고 하였으며, 그에 따라 황제는 오직 탄압만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황제의 무능은 3월 16일에 퇴위한 황제가 3월 17일의 열기에 ‘잘 잤다. 햇빛으로 서리가 희게 보인다. 시저의 책을 읽음.’ 이라고 쓴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그는 군대의 동요를 막지 못하여 3월 1일까지에는 약 17만의 병사가 혁명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은 지휘관을 그들 자신이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3윌 13일에는 황제와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17만의 근위연대까지 혁명과 폭도에 가담하였으며, 경찰은 침묵하고 순경 • 재판관 • 장교 • 고급관사 • 대신 • 귀족들은 병사와 노동자에 의해서 체포됨으로써 노동자 평의회는 국회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정치 중심이 되었다. 황제는 밀루코프(Milukov)로 부터 황제 퇴위 결의를 보고받자 바로 퇴위 서류에 서명하였다.

 

반면 최초로 설립된 임시정부는 농민 폭동에 참가하는 농민에게 형사 책임을 지웠으며, 지방에서 일어나는 농민 폭동에는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라고 지령하였고,7월28일 프라우다(Prauda)지의 발행을 금하고 트로츠키 • 루나차르스키(Lunacharski) • 카매네프(Kamenev) 등을 투옥하였으며, 레닌의 체포에는 20만 루우불의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소비에트 압력에 의해 재판에 회부하지도 못하고 이들을 석방하였다. 8월12일 모스크바 극장에서 국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거기서 케렌스키는 자기에게 반역한 자를 ‘철과 혈’로써 제재한다고 협박하였으며, 코르널로프 (Kornilov) 장군은 ‘전선에서의 규율의 진흥’과 ‘후방에서의 질서의 도입’을 위해 강력한 정책을 쓸 것을 호소하였고, 칼레친(Kalechin)은 공공연하게 소비에트를 금지할 것, 후방에서도 사형을 실시할 것, 철도와 산업을 군사화 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소심한 케렌스키가 이와 같은 요구의 승낙을 주저하자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를 협박하여 자기의 정책에 추종토록 하였는데, 이것이 ‘코르닐로프의 반란’ (The Revellion of Kornilow)이다.

 

11월 혁명에서도 케렌스키(Kerensky)의 무능으로 대부분의 병사가 혁명에 가담하였는데,11월7일 최후의 순간에도 궁정을 수비하고 있던 것은 사관학교의 수개 중대와 부인결사대 및 미카엘(Michael) 포병 학교의 포 4문과 수대의 무장 자동차 뿐 이었으며, 이들은 혁명군이 진격하자 아무런 저항도 못하였다.

 

이러한 혁명 형태는 사대적 상황을 수반한 역사 발전 추이에서 돌발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제기하게 된다. 따라서 권력 지배 계급의 창출 수단과 유지 과정을 통해 볼 때, 그 당시 불안전한 사회 환경이 몰고 온 정치적 • 심리적 측면에서 제기된 혁명론들을 대별 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라스웰은 혁명의 위기를 권력 균형의 상실에서 구하고, ‘첫째 엘리트를 뒷받침하는 전망의 강도가 약하면 그 지배 체제는 불안정해지고 둘째, 생산 정책을 작성하는 자가 분배 정책을 작성 하는데 실패하고 셋째, 지배 세력이 대중을 위해서 가치를 실현하고 현실화하는 데 무능하며 넷째, 엘리트가 폭력 수단을 지배할 능력이 결여되고 다섯째, 반엘리트(Counterélite)의 조직이 강할 때 혁명의 전도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파레토(V. Pareto)는 ‘일정한 정치 사회에 있어서 지배층 또는 정책 작성 층이 폐쇄적으로 카스트(Caste)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부조직으로부터 흡수하여 권력과 사회 사이에 인적 순환이 행해지는 것이 정치적 안정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엘리트 조류의 정지가 정치변혁의 원인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배층의 폐쇄성이 혁명의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미헬즈는 ‘국가 • 법체계 • 제도 그리고 사회계급은 그 자체나 그것을 대표하는 자들이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신념을 잃는 바로 그때부터 필연적으로 파멸될 운명에 있다는 것은 기정된 한 역사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여 지배층의 신념 상실을 혁명의 원인으로 보았고, 모스카 (Mosca)는‘지배계급이 권력을 장악 하는 데 있어서 토대가 된 여러 가지 능력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제공하였던 사회적 공헌을 더 이상 제공할 수 없을 때, 혹은 그들의 자질과 그들이 제공하는 봉사가 그들이 사는 사회 환경에 있어서 중요성을 잃게 되는 때,그 지배 계급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기 마련이다.’ 라고 하였으며, 윌로우비(Willoughby)는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고 계몽되어 있 며 온순한 국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한계를 넘는 압박을 받을 때 국민들은 지배자에게 공공연한 반항의 악을 범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압박이 국민 전체, 또는 그들 대부분의 반대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나치게 심한 경우 지배 권력은 붕괴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지배자들이 반드시 인정하는 사실이다.’라 하여 압박의 한계점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하였다.

 

번햄(J. Burnham)은 첫째, 제도적 체제와 지배 계급이 기술적 발전과 새로운 사회 세력의 생성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를 해결 못하고 둘째, 지배 계급의 다수가 지배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문화 • 예술 • 철학 • 음악에 관심을 집중하며 셋째, 신흥의 인재를 동화하는 능력과 의사가 없고 넷째, 지배 계급의 다수가 그들 자신 및 그 지배에 자신을 상설하거나 그들의 정치적 방식이나 신화를 의심하고 다섯째, 지배 계급이 단호하게 실력을 행사할 의사와 능력이 결여하여 조종 • 타협 • 기만 • 간지에 빠질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배 계급의 무능 • 부패 • 무기력을 강조한 견해라 할 것이다.

 

로크는 정부 또는 국가가 붕괴되는 원인으로써 ‘군주가 전제적으로 법률을 제정할 때, 군주가 의회에 간섭하고 의사를 방해 하였을 때, 군주가 자의로 선거법을 변경하였을 때, 군주가 인민을 외국의 권력 하에 인도하였을 때, 군주가 그 임무를 포기하거나 태만하였을 경우 등을 열거 하였는데, 이는 군주의 위법과 폭정이 혁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그것이 비록 차알스 1세나 제임스 2세의 행위를 암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혁명의 정치적 원인을 강조한 것임에 틀림없다.

 

카멘카는 ‘혁명은 경제적 원인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인간의 힘과 거대한 물질적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 요구되며 또 분노와 성공의 전망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혁명은 보통 전체적인 반항이 아니고 국민의 일부의 지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이 두 가지의 조건이 성립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혁명은재정적 실패, 행정적 무능, 자신의 결여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에 있어서 패전에 의해서 뚜렷하게 약화된 국가에서 열어 났다.’고 하였다. 카멘카의 이론은 혁명의 구체적 원인으로써 재정적 • 행정적 요소 및 패전 등을 들고 심리적 요인까지 지적하였으나, 역시 정치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주권자에 대한 모반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주권자가 인민대중으로부터 증오를 받는데 있다. 군주가 인민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준수하며 만족하게 잘해온 법과 오랜 관습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그의 국가를 잃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 하여 군주의 위법에 대한 인민의 증오감을 지적하였고,

 

흡즈(Hobbes)는 ‘혁명 위기를 조장하고 소요를 일으키도록 인간을 충동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현상이 상관해서 발생해야 한다.

 

첫째는 물질과 용역에 있어서의 불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는 잘 산다고 생각하고 또한 정부가 그의 생활 향상을 방해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과 관련시켜서 그가 어떤 변동이 일어날 것을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는 정의의 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불만을 느낀다 할지라도 그의 의견으로는 기존 정부에 반항해서 소란을 일으킬 아무런 정당한 이유가 없다거나 또는 그의 반향을 정당화할 아무런 구실이 없거나 혹은 도움을 얻을 구실이 없으면 그는 결코 불만을 표시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성공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이, 즉 실패하여 반역자로서 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광기이다.

이 세 가지, 즉 불만 • 구실 • 희망이 없을 때 반란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라 하여 인간의 불만 • 정의감 • 희망 등 심리적 측면을 강조 하였다.

 

르봉은 ‘혁명의 구호가 충분히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혁명을 호소당한 이성이 감정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군중에게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반대로 가장 보수적인 인민이 가장 격렬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보수파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는 결과 돌연한 변화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혁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여 혁명은 이성의 감정화에 있다고 하였는데, 가장 보수적인 인민이 가장 격렬한 혁명을 일으킨다는 견해는 심리적 원인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브린튼은 ‘혁명 전 사회의 특징은 첫째, 경제적 상승 사회에 있어서 부유한 사람들 중에서 불만이 발단하나 철저한 억압에 대한 불평보다도 속박, 구속에 대한 불만이 크며 둘째, 뚜렷한 계급의 대립인데 그것은 1789년대의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관계와 같이 매우 복잡하고, 또 각 계급은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접촉이 상당히 많음으로써 대립하며 셋째, 지식 계급의 이반이며 넷째, 정부 기구가 무능하여 그들이 태만함으로써 구제도의 개혁을 소홀히 하고 다섯째, 구 지배 계급의 자신 상설과 혁명파의 동조를 들어’구속의 심리와 계급 심리를 흥미 있게 분석하였다.

 

데이비스(J.C Davies)는 ‘오랫동안 경제 및 사회 발전이 짧은 기간의 급격한 후퇴에 부딪쳤을 때 혁명이 얻어날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럴 때 국민들은 많은 노력으로 획득한 이득이 아주 손실될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두려워하며 그들의 기분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된다.’고 하고‘혁명은 새로운 필요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기대를 만족시키는 계속적이고 방해 없는 기회의 사회에서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또 희망도 없고 기대도 없는, 오로지 고통과기아만 있는 사회에서도 얻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그는 혁명이 경제적 원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은 빈곤 때문이 아니며 오직 자기의 재산의 상설을 두려워하는 심리적 요인에서 라고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혁명의 원인을 정치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에서 보는 이론을 고찰하였으나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도 심리적 요인을 부인하지 않았고 심리적 요인을 강조한 이론도 정치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혁명의 본질이 정치적 • 사회적 및 심리적인 3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론인데, 어떤 요언을 중시하는가의 차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