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9/100회_지하경제권력.

 

 

 

제 2 장 지하경제에 의존된 정치권력의 야누스적 두 얼굴

 

 

제 1 절 국가정책의 실제적 입안자는 검은돈

 

1. 격변기의 불안정과 불확실성 시대 추이로 인한 정파의 이합집산식 구조적 한계

 

1) 정책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여 · 야당의 잠재의식적 이질성

 

한국정치사의 정책원리에 대한 논의에 있어, 오늘날 목표상을 잃어버린 채 고도성장의 타성으로 하여금 소위 단말마적 발상에 젖어있는 정부와 정치권은 과연 국민을 위하여 그 지도성을 무엇에 향하게 하였는가는 논자의시각과 목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 동안 역사적 조건을 상설한 채 다수의 민중 속에 소수의 금권욕 문제를 둘러싸고 무원칙적인 파행과 난장판으로 얼룩진 정치부재 경험을 겪고 나서 국가장래의 불안감 때문에 많은 국민은「일관성 결여된 정책이라도 정부나 정치권에게 좋은 것이라면 국민에게도 좋다」라고 지배해온 논리에 처음으로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

 

이와 같이 기성정치의 타락성에 결여된 정부형태와 정치권에 대한 격렬한 국민의 비판이 높아진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역사적 의식전환 국면고찰」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의미로는 한나라 정치를 선택한 것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국민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업자득이란 실체에 대해 김영삼 문민정부로서의 의식전환 국면에서 피하기 어려운 오늘날 당면 과제로써, 그런 의식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이제 다수의 국민들 스스로의 깨어난 자각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행동일 것이다. 우리사회가 도태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보수적 정경유착 조화의 원리로 인해 파생된「검은돈」의 실체는 곧바로 타락한 정치행태로 연결되어 현대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폐쇄되어 버린 지 오래 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경제에 팽배해지고 있는 블록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경제 운영계획 수렴 자체가 정치권을 막론하고 정부의 통제권 밖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뿌리 깊은 금권정치 활동에 연유되어 곧장 탈세와 부조리로 이어지는「검은 돈」의 위력에 거래되어 수립된 정책들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김영삼 정부는 최근 예산을 책정하는 경제기획의 기능을 대통령 직속으로 두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있다고 하며첫 번째 지시로 예산안에 대한 재검토를 명했다. 이를 두고 세인들은 ‘오랜 야당생활의 설움에서 돈줄을 취지 못하면 권력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이에 대한 포철의 대응은 포철이라는 거대기업의 지배권을 놓고 벌이는 김영삼 정부와 박태준 명예회장의 제 2차 파워게임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포철에서 무엇이 나올 것이 있어서 그러는가?

 

그것은 바로 막대한 금액의 정치자금이라는 이야기이다. 14대 총선 당시 박 회장은 지구당별로 5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백 24개 선거구를 감안한다면 최소한 1백50억 이상의 자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얼마나 되는 돈을 사용 했을까?

 

더구나 <기부금 1천억 원의 행방>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포철은 천억 이상의 영업외 비용을 사용했다. 영업외 비용중 이자, 할인료, 이연자산 상각, 환차손 등 금융비용을 제외한 기타 영업외 비용의 상당액은 기부금이라고 한다. 다른 대재벌들이 기껏해야 1백억 이하의 기부금을 썼는데 비해 포철은 1987년 1천75억 원, 1988년 7백61억 원, 1990년 2백81억 원, 5백 15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금으로 사용했다. 또한 1991년 수서사건으로 유명한 한보철강의 정태수 회장은 회사의 규모로 본다면 포철에 비할 바 못되는 규모인데도 약 3백억 원의 비자금을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수서사건이 문제가 됐을 때 민자당 재정위원이기도 한 그는 “내가 입을 열면 나라가 전체 흔들린다."고 당당하게 굴었고 실지로 현재까지 건재하다. 검찰은 비자금이 12억에 불과하다고 못 박았고 사용처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이렇듯 한국의 현실정치과정을 조망해 보면, 이제껏 정치자금의 조달 및 배분은 정치체제 및 권력구조의 상태, 경제 기본구조의 특성 및 변화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기능하여 왔다는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한 예로, 한국의 자본주의적 경제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는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띠며, 이러한 양자의 상호관계는「정부에 의한 투자재원의 통제」에 의해 두드러지는 바, 이러한 통제의 과정 및 방법에서 정치자금의 원천이 발생한다는 논의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격변기의 불안정과 불확실성 시대 추이로 인한 정파의 이합집산적 구조적 한계를 한국 정당정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어떻게 범주화 될 것인가. 또한 이러한 파맥에서 정책형성 과정에 있어서의 여 • 야당의 잠재의식적 이질성을 어느 정도나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 정당정치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유추해 볼 때, 오랫동안 전제적, 폐쇄적 정치사회에서 삶을 영위해 왔던 한국민족은 해방과 더불어 갑자기 대중적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영역에 있어서 평등화 과정을 밟는 정치시대가 도래하였다. 특히 해방 후 결사의 민주주의에서 오는 정당의 이상 비대화 현상으로 인해 정당의 등장은 선거전의 지명절차에서 온 것이거나 집행부와 입법부와의 관계에서 온 정당 국가에 기초한 복수정당제가 아닌 지도자와 추종자의 상징적 관계를 표시한 하향식 구조에 기초한 조직이고 항구성과 고정성을 갖지 못하여 지도자와 더불어 명멸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정당정치의 비근대성에서 온 것이다.

 

상기에서 밝혔듯이 한국의 집권당은 통치자의 필요에 따라 하향식으로 조직된 외생정당 이였으므로 경쟁 체제를 이룩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생리로 말미암아 반대당에 대한 공평한 경쟁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자기들에게 저항하는 야당의 발전을 허용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최초의 집권당인 자유당은 야당과의 정책적인 사의 내지 타협의 필요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목적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여기서 한국 집권당의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이 이루어져 그 후 줄곧 명목상의 복수정당제를 유지해 왔지만 사실상 집권당의 독주와 일방적인 비대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정당들 간의 균형이나 조화 있는 상호작용은 한 번도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여당의 과도한 대정부 추종 태도로 독선적 정부를 감시, 규제하는 정당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야당들은 철저한 부정형 기질이라는 것이 통념화 되었다. 야당은 여당이 될 기능성올 지니면서 지배 권력집단에 대한 비판, 통제, 감사 및 규제의 기능을 한다. 한국의 정당은 복수정당으로 존재하지만 제 1야당의 존재가 열세여서 경쟁적 집단이 되지 못하고, 일당 우위체제, 즉 정당의 정부화와 같은 모순을 보이기도 했다. 제 1야당은 당내 민주주의와 경쟁적 파별과 압력단체군의 주식회사(hoiding company)인 것이다. 잔여 군소정당은 움직이는 습성을 지니고 부침하였다. 일당 우위체제라는 것은 정당 제도를 초래하여 정당 정치사상 한 번도 물리적 방법이 아닌 야당체제로써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제 요인도 있겠지만 여당이나 정부의 탄압과 야당 체제내의 결함에서 오는 원인 등으로 오늘날 야당부재란 말이 나오기까지 한 것이다. 이는 여당이 외형상 야당의 이념 및 정책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만물상 정당(catchal party)’ 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여당과의 차별성이 부각되기 어려운 점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여 • 야 정권 교체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부재했던 상태에서 정치적 관계의 변화가 일반국민 대중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정당의 제도화 수준과 권력구조에 대한 현실인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즉, 박정희 정권이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1인 전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나 평가에 있어서도 정당이나 제도보다는 대통령 후보자 개인의 속성이 더욱 중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야당 자체도 당이 제도화 되어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붕당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권이 평화적으로 교체되어 야당이 정권을 잡을 전망이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 야당의 가입은 백해무익한 것이며, 여당 가입은 안전하나 당 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산출이 투입에 비해 너무 작다는 것이다. 라는 의식구조를 사회전반에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정당은 발생배경에 있어 사회적 동질성, 이데올로기적 배제, 주어진 보통선거 등으로 인해 정당의 사회적 연계 동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집권세력의 권위주의적이고 반의회주의적인 태도는 정당의 발전을 크게 제약하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여 • 야 대립의 정당체계는 사회적 집단과의 연계성 속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대중정당으로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었다.

 

또한 절차적 민주주의 및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쟁점 자체도 일반 국민들의 생활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즉, 오랫동안 군부 권위주의 체제가 지속되고 실질적인 여 • 야 정권교체의 역사가 부재한 가운데 1공화국 이래 한국 정당체제의 중심을 이루어왔던 여 • 야 정당체제의 속성이 한국 정당정치의 중심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와 정권교체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형성된 소위 ‘여 • 야 대립’의 정당구도가 그 동안 한국 정당체제의 특성을 규정되어 온 것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국민들의 정치체제 및 정당들에 대한 태도가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측면보다는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정치세력 및 정당간의 구체적인 정책 대결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여기에 군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적 쟁점이 정치권력의 도덕성과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 정치의 현실은 이러한 경향을 더하게 만들었다. ‘외국의 야당은 정책대결을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애국적이고 양심적이며, 누가 비애국적이고 비양심적인가의 대결’이다. 이러한 1960년 후반의 윤보선의 발언은 당시 야당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당과의 대립, 사회 내 제 집단과의 연계성 부족, 여당과의 이념적 차별성 미약 등, 한국 야당의 기본적 위상과 성격은 대체로 지속되어 왔다. 이는 야당 정치인 자신들의 성격과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지배체제의 비민주성, 이데올로기적 제약, 여 • 야 정권교체 경험의 부재 등 그 동안 지속되어 온 반공 권위주의 체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야당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은 평화적 정권교체가 없는 곳에 친정한 정책대결이 있을 수 없으며,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이 막혀 있는 상황 속에서 야당이 제시해야 될 최선의 정책은 민주회복이며, 평화적 정권 교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체제 • 반체제 세력 간의 정치균열은 모든 정치체제에서 대체로 그렇듯, 질적으로는 가장 첨예한 대립구조라 할 수 있으나 사회구성원들의 많은 부분을 포괄하는 균열구조는 아니었다.

 

1960년대의 경우를 면밀히 살펴보면, 체제세력은 집권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관료, 군부세력으로 구성된 국가기구 장악세력, 그리고 산업화과정에서 지배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던 자본가 층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반체제세력의 경우 주로 지식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 정치행동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반체제세력은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지속됨으로써 누적 • 확대되어 갔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구조적 소외계층인 노동자층의 임부도 반체제 세력으로 등장한다. 또 일부 야당세력도 그들의 정치참여 자체가 거의 봉쇄되었던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는 반체제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네비안코의 개념에 따르면 정치적 환경에 대한 지배(domination)와 적응(adaption)이라는 정당의 이중적 기능 중 지배만이 관철되었고, 적응의 기능은 관료 행정기구의 일방적이고, 직접적 자원배분 결정과 집행 및 폭력, 정보기관의 억압으로 대체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아몬드와 버바는 신민형(subject) 정치문화가 지배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신민형 정치문화의 인간은 정치체계 및 정부의 권위를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감정적인 호감의 정향도 갖는다. 그러나 정부와의 관계는 수동적 관계에 불과하며, 정치체계를 통해 자신의 욕구 및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정향이 거의 부재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정치에서는 모든 국가정책이 사당화 된 정당간의 이해관계로 변조, 왜곡되었으며 자당의 이해에 합치되어야만 정책이 시행 되어졌고, 정파의 이합집산 또한 공존의 정립이 문제되는 것 보다는 유력자의 비공식적인 흥정과 중상모략, 권모술수, 인위적 공작으로 대의명분이 없는 정파에 기존 하였으며, 당내의 파벌경쟁은 당과 당 사이의 경쟁보다 더 심각한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기형적으로 출발한 한국의 정당들은 사회세력들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자신들의 지지획득의 전략으로 활용할 영역(hunting ground)이 극히 협소하였기에 고도의 동질적인 사회기반을 기초하여 태동하게 되었으며, 계급 정당운동과 이데올로기 운동은 분단 정부의 수립과 좌익 이데올로기의 불법화 및 억압으로 정당정치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