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혁명. (부제: 국가통치사상학)_16/100회_지하경제권력.

 

 

19세기에 들어서면 실학은 전단계의 현실적인 개혁론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자들을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라 한다. 이들은 선행 실학자들이 실증적 연구 방법을 계승하는 한편,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실증적인 학문 연구의 태도를 확립하였다.

 

실학자들은 서구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였고, 당시 전래된 천주교를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학으로 인식하여 학문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정약용과 김정희의 제자들에 의해서 초기개화사상에 영향을 주였으며, 구한말(舊韓未)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이나 일제(日帝)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그 개혁안이 원용되었다. 이것은 실학사상 안에 근대 지향적 성격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양의 충격은 이미 임진왜란(1592~1598)직후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특히, 명말(明末) 이래로 천주교와 함께 중국에 들어오고 있던 서양의 과학 내지 기술은 비록 후일의 산업혁명 내지 기술혁명을 거친 뒤와 같은 상태일 수는 없었으나 당시의 중국으로서도 경이적인 것이 적지 않았고, 그것은 빈번한 연행사절(燕行使節)을 통하여 상당한 정도로 조선조에도 파급되어 왔다.

 

천주교는 16세기 말엽 중국에 전래되었고, 이것이 17세기에는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하여 한국에 소개 되였다.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실학자들이었다.「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의 이수광(李晬光)은「지봉유설(芝峰類說)」속에서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이마매 (利馬賣)>가 지은「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소개한 바 있었다. 뒤에는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같은 실학자들도 역시 서학에 호기심을 가지고 논의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졌음 뿐으로써 사상적으로는 오히려 비판적이었으며, 아직 서학에 대한 신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정조(正祖)」(1777~1800) 때에 남인학자(南人學者)들을 중심으로 신앙 운동이 점차 열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정조 7년(1783)에 이승훈이 자기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온 뒤에는 신앙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들 서학 신봉자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전도(傳導)에 의해서보다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천학초함(天學初函)」등의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자발적으로 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까닭은 소수벌열(少數閥閱)의 집권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서학에서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性理學)과는 반대로 인간원죄설(人間原罪說)을 주장하는 서학은 약한 자를 억누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골몰하는 벌열(閥閱)들이나 부농(富農) ․ 거상(巨商)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모순에 기득 찬 현실 속에서 이에 비판적인 재야 학자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던 일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천국(天國)을 건설하는데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천주교는 순조(純祖) 31년(1831)에는 정하상 등의 활약으로 조선교구가 독립되었으며, 프랑스 신부가 들어와 포교하면서 신도가 더욱 늘어났다. 1830년대 조선조의 통치가 풍양 조씨 세도(豊壤趙氏勢道)로 바뀌면서 천주교 탄압이 가열되어 헌종(憲宗) 5년(1839)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었는데 이를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하였다. 이 사건 이 후에 「척사륜음(斥邪綸音)」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금압시켰고 5가(家)를 l통(統)으로 하여 자치적 연대 책임으로 천주교 포교를 감사케 하였다.

 

「철종조(哲宗祖)」(1849~1863)에 들어와서도 천주교 교세는 계속 확장되었다.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安東金氏)가 노론시파(老論時派)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기도 하였지만, 세도정치의 극성으로 관기(官紀)가 해이된 점과 민중의 가혹한 시달림은 신도를 증가토록 하였고, 프랑스 신부도 계속 입국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천주교 서적이 자체적으로 인쇄 • 유포 되었으며 왕실에 까지도 파급되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이 즉위(1864)하여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하자 다시금 병인사옥(丙寅邪獄)」(1866)이라 일컬어진 대박해가 있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묵인하였으나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 함대로 견제해 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척사(斥邪)의 여론과 왕권강화 등의 이유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군대의 침공이 있었는데 이를「병인양요」(1866)라 한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강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1783년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포교된 이래 유교적 사상 체계와의 상치 및 전례분제(典禮問題),정치적 상황 등으로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그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종교 내지는 민족 종교 로 확산되지 못한 것은 기본적으로 각기 상이한 문화적 속성과 그 제약 때문이었고, 또한 현실 개혁의 의지보다는 현실의 고뇌를 내세신앙으로 달래 보려는 입장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 전래 이래 불우한 계층의 옹호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생적 농민종교의 동학(東學)의 창도(唱道)에 일부 영향을 주어 결국 그와는 대립된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본격화와 양화(洋貨)의 범람은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혼돈은 어떠한 새로운 이념이나 종교를 갈구하게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발생한 것이 동학이다.

 

동학사상의 창도자(唱導者)는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이다. 그는 37세에 밖으로는 접영(接靈)의 기(氣)가 있고, 안으로는 강화(降話)의 교(敎)가 있어 상제(上帝)의 선어(仙語)를 청문하는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도를 깨달음으로써, 동학사상을 제창하게 되었다. 그는「동경대전(東經大典)」에 실린 글에서 “내 또한 동방에 태어나서 동방에서 도를 받았으니 비록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서학에 대응하는 동학임을 알 수 있다.

 

동학의 근본 사상은 하늘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 하여 본래적으로 천인(天人)이 일체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인내천 사상(人乃天思想)으로 발전되는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적 교리에 있어서도 타력신앙(他力信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력으로 수행하여 깨치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동학에 있어서의 대천주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으로서 철두철미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통한 천주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수운(水雲)은「용담유사(龍潭遺祠)」에서 “천상(天上)에 상제님이 왕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陰陽理致) 고사하고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는가”라고 읊은 것이다. 천국이라고 하여 천상(天上)의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서학에서 말하는 바, 죽어 천당에 간다는 것도 “상천(上天)하고 무엇 할꼬 어린 소리 말아서라”고 하여 서학의 교리에서 주장하는 대상적(對象的) 천주신앙(天主信仰)과 사후천당설(死後天堂說)을 마치 유치한 생각으로 문제도 삼지 않았던 것이다.

 

동학사성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기이원설(至氣二元說)에 입각한 세계관적 원리이다. 수운(水雲)에 의하면 지기란 허영창창(虛靈蒼蒼)하여 무슨 일에나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무슨 일이나 명(命)하지 않음이 없다. 형용이 있는 듯하되 형상하기 어려우며, 들리는 듯하되 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또한 흔원한 일기(一氣) 라고 한다. 그리하여 신도 자연도 모두 지기(至氣)로 본다. 따라서 인간의 선 • 악한 미음의 사용도 일기(一氣)의 조화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운은 수심 • 정기를 거듭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유 • 불 • 선 삼교의 융합과 샤머니즘, 심지어 서학적 요소도 가미하여 전통 사상을 계승한 형태였지만 비과학적이며 추상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몰락 양반이 창도했던 한계성 때문이었다. 관리도 아니요 생산 담당자도 아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동양사상의 천도 • 천운, 즉 주역(周易)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운수관(運數觀)에 젖어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영세한 농민과 곤경을 같이하고 있으므로 토착 신앙을 인정, 승화시켜 동학 교리의 실천 방법으로 구현시켰던 것이다.

 

주문(呪文)의「지기(至氣)…」는 만물 중에 가장 빼어난 기, 즉 인간을 의미 또는 중시하는 것으로 유교의 기철학(氣哲學) 측면이며, 부적(符籍)의 「궁궁을올(弓弓乙乙)」은 정감록(鄭鑑錄)「궁을(弓乙)」을 지상의 천국으로 상징화하여 원용하였고, 나아가 재난을 막을 뿐만 아니라 서학제압(西學制壓)의 암시로 적용하였다. 즉 궁(弓)은 활이요, 을(乙)은 새(鳥)이며, 궁(弓)은 동(東)을 상정하고 을(乙)은 서(西)를 상징하니 활이 새를 제압한 것과 같이 동학이 제압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체계는 사회사상적 측면에서 혁명적 • 반봉건적 성격이며 외세배척의 국가적 • 민족적 성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한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동학은 민족적이요 민중적인 종교로 일시적이나마 성장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서구 모델의 진화론적 근대화론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를 맞이하여 세속적 ‘삶의 기회 ’를 중심으로 그 사상적 가치가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전통적이며 주체적인 정체감을 해체시키고 경제적 실제 가치를 부여받고자 하는 새로운 집단 이기주의적 정체감으로 대체되었다고 가설을 내릴 때 오늘날 국가권력 • 종교 형이상학의 정치적 혼융을 통해 지하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 정치의 정종유착에 관하여 최근 실례를 옮겨 보기로 한다. 성결교회 일부 소장 목사들이 13년 전의 한 기도회에 참석했던 기독교 원로 목사들을「반란방조」혐의로 대검에 고발해 교계 안팎에 파문이 일고 있다. 1980년8월 6열 롯데호텔 에머랄드 룸에서 열린 문제의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기도회에는 신군부의 지도자였던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국보위 각 분과 위원장들을 위시해 한경직, 조향록, 김지길, 김준곤, 김창인 목사 등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 23명이 참석했었다. 또한 방송과 신문을 통해 기도회 내용이 집중적으로 보도돼 사회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미 널리 알려졌던 과거의 기도회가 뒤늦게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일까?

 

원로 목사들을 고발한 성결교회 소장 목사들의 모임인 한나라 선교회(회장 이선교 목사)측은 이에 대해「이들 목사가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시키는 기도회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역사에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고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당시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은 이미 나는 새도 떨어드릴 만한 최고 실권자로 권부에 군림하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남겨진 과제는 통치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리고 국제적으로 특히 미국으로부터 자신의 자리를「공인」받는 작업이었다. 이때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 10 • 26 수사, 12 • 12 쿠데타, 5 • 18 광주사태 등으로 인해 총칼의 냄새가 밴 자신의 이미지였다. 전(全) 위원장의 측근들은 그에게「유화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종교를 활용할 것을 권유했고 그래서 준비된 것이 기독교 초교파 원로들을 초청해 열었던 기도회였던 셈이다.

 

또한, 지난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떨어뜨린 결정적 계기로 알려진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설’이 치밀한 공작에 의해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1987년12월5일 오후 탁명환 씨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는 코리아나 호텔에서 ‘6대 의혹 사건’이란 내용의 기자 회견을 가졌다. 탁 씨는 회견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10 • 26사건이 발생, 통일교를 지원하던 유신정권이 붕괴되고 정치적인 혼란기였던 1980년2월 당시 모 야당 재정 분과 위원장이던 허모 씨를 통해 통일교 제 2인자인 박보희 씨로부터 5억 원을 다섯 차례에 걸쳐 받은 사실이 있느냐?" 고 물었다. 이후 정권이 바뀐 오늘날 한국기독교 청년협의회 단체로부터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설에 관하여 재조명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 교회 청년협의회는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가 통일교와 관련돼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탁명환 씨(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의 주장은 5공 정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회견에서 당시국제 종교문제연구소 경리담당 상무로 일했던 이신구 씨 (57,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는 “탁 씨는 당시 김영삼 후보가 통일교와 관련됐다는 기자 회견을 앞두고 나와 함께 감사원을 두 차례 다녀왔다"며 “돌아오는 길에 탁 씨는 ‘1시간 동안 황영시 당시 감사원장을 만났다. 이번 대권은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리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김영삼 후보의 통일교 자금 수수설은 황영시 당시 감사원장과 탁명환 소장의 은밀한 조작극’이라고 폭로했다. 이 씨는 당시 탁씨가 김영삼 후보 통일교 자금 수수설과 관련한 기자회견 대가로 감사원으로부터 수억 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