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워(War) 게임_(Mr. Jung-Sun Kim)_(10-12)

 

 

1. 군사전략의 개념

2. 한국의 군 구조 실태와 문제점

3. 예상되는 한국군의 작전술

4. 전쟁과 군비통제 항공강압 및 해군전략

 

 

4. 전쟁과 군비통제, 항공강압 및 해군전략

 

 

월남 ․ 리비아전에서의 항공강압작전

 

 

1952년 미국은 동남아에 대한 공산화를 방지하고 내외적으로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하여 자유세계의 강화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정책목표를 책정하고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 및 기술원조를 지속하였으며 프랑스의 전쟁수행을 군사, 경제 및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1954년 프랑스의 패전에 따라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월남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도미노이론도 개재되어 있었고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월남전에 개입하였다.

 

1964년 말에 월남의 정치, 군사적인 상황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절망적인 것으로 보였다.

 

월남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은 월남정부의 통치력은 물론 월남정부군의 전투능력을 크게 약화시켜서 평정계획도 실패한 반면 월맹의 지원과 통제를 받는 베트콩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베트콩은 소부대 위주의 전술에서 벗어나 그들 전략의 최종단계로 믿어지는 대규모 공격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미국의 항공 전략은 대별하여 월남과 월맹상공에 대한 전략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월맹에 대해서는 점진적 대응전략, 월남영내에서는 대 게릴라 지원 전략으로 나누어진다.

 

월맹 상공에 대한 공중공격 계획은 1964년 3월에 처음 준비되었고 이 계획의 목표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월맹에 월남방어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하며

 

둘째, 월남군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셋째, 월맹의 계속적인 베트콩 지원은 희생과 고통이 가증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회담을 통하여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두고 월맹에 대한 폭격을 가함에 있어서 군부와 민간인 보좌관들은 처음부터 그 의견을 달리했다.

 

합참은 항공력의 강력하며 결정적인 운용을 건의한 반면 대부분의 민간 보좌관들은 폭격의 범위와 강도에 있어서 점진적이며 제한된 접근방법을 옹호했다.

 

극동문제 담당차관보인 윌리암 번디는 국가 안보회의 대게릴라전 실무진을 주재하여 장차 월남문제에 관한 정책수립을 하고 있었는데 민간인으로 구성된 이 실무진은 월맹폭격에 대한 항공 전략의 기본개념, 즉 점진적 대응전략을 내놓았다.

 

이 개념은 월맹에 대한 항공폭격을 가함에 있어서 정확히 계산된 압력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킨 것으로 월맹의 반응을 고려하여 폭격의 강도를 크게 하고 지리적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반면 전통적 전쟁논리에 입각하여 미 합참과 태평양 사령부는 의견의 맥을 같이 하면서 일단 항공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면 강력하고 신속하게 운용할 것과 월맹의 주요 목표물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태평양 지역사령관 샤프(Grant Sharp)제독은 전쟁을 단시간 내에 종식 시키려면 월맹, 라오스, 캄보디아의 군사원천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중공격이 전략의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최종 승인과정에서 존슨대통령은 민간 지도자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목적, 기준, 선택, 비용 대 효과와 같은 체계분석에 기초한 점진적 대응전략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점진적 대응전략은 핵시대 상황 하에서 적과의 협상에 중점을 두는 제한 전 이론과 결정적 군사력의 사용이 아닌 최소의 압력으로 적의 반응을 얻어냄으로서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합리적 경제적 사고에 의해 수립된 것이다.

 

월맹은 한국전쟁에서 전면남침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을 인식하여 공공연한 공격은 미군의 대대적인 대응조치를 유발시킬 것을 우려하여 게릴라 공격으로 전투를 시작하였다.

 

호지민이 게릴라 공격으로 전투를 시작한 후 1963년 12월부터는 전쟁의 성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월맹은 베트콩에 대한 군사지원과 게릴라 간부들을 파견하여 전쟁에 직접 개입하였으며 1964년 여름이 지날 무렵 월맹은 정규군을 남파하여 전쟁을 더욱 확대시켰다.

 

1964년5월2일 통킹만 연안 25마일 공해상에 위치해 있던 미 구축함 매독스호가 3척의 월맹 고속어뢰정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미국 구축함의 피해는 없었고 항공모함으로부터 출격한 미 해군의 항공기가 월맹어뢰정 2척을 격파시켰다.

 

미국은 즉각 월맹에 대하여 외교루트를 통해 재차 동일한 사태가 발생하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공식적 항의를 제기했으나 월맹은 이틀 후 다시 미구축함에 공격을 가해왔다.

 

죤슨 대통령은 미군으로 월맹의 공격을 격퇴하여 더 이상 침략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대책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통킹만 결의안(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남아시아 결의안(Southeast Asia Resolution)을 상원 88 : 2, 하원 416 : 0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동남아시아 결의안을 근거로 하여 미 행정부는 월맹상공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1964년 8월5일 오후 월맹의 빈 어뢰정 기지와 유류저장소에 첫 공격을 가함으로서 월맹에 대한 공중공격이 시작되었다.

 

월맹에 대한 폭격을 가함에 있어서 미국의 폭격은 월남방어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의사표현, 월남군의 사기증진, 월맹의 베트콩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협상테이블로 유도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월맹에 대한 모든 폭격은 적의 군사잠재력을 공격하여 적의 의지를 꺽음으로써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월맹에 표현하며 월남군의 사기증진은 물론 협상테이블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65년2월 소련 수상 코시킨은 월맹에게 소련의 지원을 시위할 목적으로 하노이 정부를 방문하였는데 이튿날 베트콩은 월남주둔 플레이쿠 미 공군기지에 포격을 가하여 미국 고문단 막사와 헬기에 피해를 입히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플레이밍 다트 I 작전이 실시되었다.

 

상부 민간 관료들은 가장 가치 없는 목표물을 선정하여 폭격을 허락하였으며 3척의 항모에서 항공기의 출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지만 1척의 항모에 있는 항공기만 출격이 인가되므로 인하여 월맹에는 거의 충격이 될 수 없었다.

 

며칠 후 베트콩이 퀴논에 있는 미군막사를 공격한데 대한 보복폭격이 실시되었는데 국방부에서 허락한 목표물은 월맹의 남단에 위치해 별로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플레이밍 다트 I, II작전은 제1단계 조치에 의해 실시된 것으로서 월맹의 폭격목표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국의 월남방어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표현으로서는 너무나도 허약한 공격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슨 대통령은 월맹에 대해 보복범위를 벗어난 제한적이지만 계속적인 폭격을 선언함으로써 제2단계 조치인 롤링썬더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초기부터 순조롭지 못하였는데 합참은 1965년2월20일 월남 공군과 합동으로 롤링썬더 I 작전을 하달하였고 목표는 월맹남단에 위치한 쾅케(QuangKhe) 해군기지 막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폭격작전은 월남내의 정치소요로 인하여 월남공군과 합동작전이 되지 않아 취소하였으며 연속 계획된 롤링썬더 II, III, IV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65년 3월2일 롤링썬더 IV 작전이 실질적인 첫 출격이 되었고 104대의 미 공군항공기와 19대의 월남 공군항공기가 소규모 쾅케 해군기지 및 한 개의 화약고에 대한 공격을 하였다.

 

목표물 자체가 월맹군 전의에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음의 작전은 무려 13일이 지난 3월15일에야 인가되어 수행할 수 있었으며 목표물은 푸퀴 지역 근처 화약고와 타이거 섬의 레이더 시설로 한정되었다.

 

이후 공격도 일주일에 1회 정도의 폭격에 불과했고 목표물은 여전히 월맹남단의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월맹은 1965년 폭격의 경험을 살려서 부대이동이나 보급 활동은 거의 야간에 하였기 때문에 미 항공기의 후방차단 성과는 줄어들었고 최선의 방법은 월맹의 공중 목표물인 중요 군사시설과 산업중심지, 그리고 하노이, 하이퐁 지역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1966년도 중순 대단한 논란을 거쳐서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시설에 대한 공격이 처음 인가되었고 95%의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후방차단작전에 투입되는 항공기 소티가 증가되고 지리적 범위가 다소 확대되었어도 하노이, 하이퐁지역, 중국과의 국경지대 등에 대한 계속적인 제한을 하였기 때문에 월맹의 가장 중요한 산업시설, 병참, 철도 및 도로 등은 전과 다름없이 건재하였다.

 

월맹과 중국을 잇는 주요 철도망에 대한 공격은 롤링썬더 작전이 시작된 지 만 2년이 훨씬 지나서야 인가되었다.

 

이 철도망을 통해서 주요 전투무기, 병참물자가 입수되어 하노이, 하이퐁, 탄호야 같은 도시에 집결되었다.

 

중국, 하노이를 연결하는 철도는 월맹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철도망으로 길이 82마일 하루 약 27,000톤의 물자를 운반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비로소 하노이 부근에 대한 일부 비행장에 공격이 허가되었다.

 

1968년 최초의 3개월은 기상이 예상외로 불량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은 한 달에 평균 3일에 불과하였고 4월에 미국 대통령이 월맹의 최남단을 제외하고는 폭격을 중지시켰다.

 

1968년 5월 월맹과 미국이 파리회담을 가지자 1968년 10월에는 폭격이 전면 중지되었고 1972년 전까지는 부분적인 폭격만 실시됨으로써 사실상 롤링썬더 작전은 끝을 맺었다.

 

물론 월맹이 회담에 임한 것은 미국의 폭격압력에 굴복한 것 때문이 아니라 월남전쟁을 위해 전략적으로 재정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이 수락한 월맹폭격의 중지는 하노이 당국을 파리 평화회담에 끌어내긴 했으나 협상의 어떠한 진전도 안겨주지 못했다.

 

워싱턴 당국이 폭탄을 절약하고 월맹이 일방적 주장을 계속하면서 회의 탁자를 지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월남전은 그후 4년이 계속되었다.

 

결국 월남전에서 항공작전이 전술적으로는 성공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월남 공산화로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항공강압작전이 부분적으로는 성공하였으나 항공 목표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과 적시성의 결여로 항공강압작전의 성공을 전략적인 승리로 승화시키지 못한 정치적인 원인을 고려하면 항공강압작전 자체(행동차원)만으로 봐서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리비아에서의 항공강압작전의 실질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1969년 정권을 장악한 카다피는 그의 “Green Book" 틀 내에서 아랍통일을 위한 범 아랍주의 반 시온주의,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반 제국주의를 추구했다.

 

1971년말 미국은 월맹에 춘계 대공세를 수행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군사분계선 부근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닉슨 대통령은 작명 라인 벡커 I 작전의 개시를 명령하였다.

 

1971년 12월 처음으로 월남해역을 봉쇄하고 하이퐁 항을 포함한 주요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고 월맹의 전략요충지인 북위 20도선 이하지역에 대한 폭격을 가하였다. 작전에 투입된 항공기는 B-52, F-4, F-105, F-111, A-6, A-7, ECM장비를 장착한 EB-66, EC-135, AC-130 등 다양한 항공기가 참가했으며, 특히 북위 17도선 이하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 B-52 항공기가 북위 20도 지역에서의 폭격에 가담하게 되었다.

 

공격대상은 군사적 가치가 높은 목표물이 선정되었고 선택에는 현장 지휘관이 상당한 재량권이 행사될 수 있었다.

 

1972년10월 파리 평화회담이 재개되었지만 회담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동년 12월13일 회담이 결렬되자 닉슨 대통령의 단호한 결정아래 하노이 하이퐁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라인벡커 II 월맹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중 전술폭격기 2,123소티, B-52 729소티의 폭격이 있었고 이때까지 제한되었던 하이퐁항의 조선소, 통신시설, 비행장에 대한 폭격을 가했으며 월맹은 보유하고 있던 1200기의 지대공 미사일과 고사포 전력을 총동원하여 응사하였다.

 

라인벡커 II 작전은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최초로 표현한 폭격이었으며 1973년1월28일 파리협상이 체결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73년11월 욤 키퍼(Yom Kippur) 전쟁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리비아는 시드라만을「죽음의 선」(Line of death)으로 명명하고 이 선(線)이하로 월선(越線)하는 세력에 대해선 영해침범으로 간주하고 공격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반제국주의(반미주의)정책과 혁명노선의 요소를 더욱 강조했다.

 

이것은 대외정책이 철저한 반 이스라엘 색깔을 유지하면서 확장됨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의 명예로운 철수를 위한 미봉책으로 체결된 1973년 파리 협정에서조차도 미국의 월남전 개입 종식과 미군 포로의 귀환이란 단지 2가지 효력만을 발생케 했을 따름이다. 즉 협상에서 또 다른 월맹의 군사행동 시 더 큰 보복을 하겠다는 강압적인 의사표시가 없었고 여기에 따른 신뢰할 만한 능력의 전개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는 강력한 의사표시인 강압전쟁에서 군사목표가 민간인에 의해 선정되었고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목표였으며 지휘관계에서 보면 정책결정과정에서 군 지휘관을 경시한 풍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1979년부터 1983년 사이 국제테러사건이 년 평균 500건이었다. 1985년 그 건수가 800건으로 늘어나고 희생자는 2,233명(미국인 23명 사망, 139명 부상)에 달했다.

 

동 기간 중 미국인과 미국의 이익은 점차 테러의 요긴한 목표가 되었다.

 

이러한 테러는 중동에서 1983년 베이루트에서 미국 대사관과 해병대 숙소에 대한 폭탄세례로 295명 이상이 사망한 것을 포함한 109건에서 1985년 378건으로 크게 증가하고, 1985년 유럽과 그 밖의 지역에서 중동단체와 관련된 60건의 또 다른 사건은 지난 10여 년 간 미국인들의 자존심과 명예에 커다란 심리적인 좌절을 안겨주어 일종의 무력감을 안겨 주었던바 미국 내 여론은 심기일전하기를 바라는 잠재력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어 보수 강경 노선이 주효하는 상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인 1981년 1월 이란에서의 미국 대사관원 인질석방에 뒤이어 테러리스트에 대한 미 정부의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보복을 단언했다.

 

이러한 선언은 극단적인 도전을 처리하는데 미국이 주저하거나 군사적으로 무능함을 보여주었다는 미행정부의 새로운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테러리즘의 증가를 고무시킴은 물론 초강대국이나 세계의 지도자로서 미국에 대해 신뢰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에도 불구하고 테러행위는 계속 증가되었다.

 

이런 가운데 1985년 12월 로마와 비엔나에서의(리비아의 지원 가능성) 테러공격에 자극받아 레이건 행정부는 리비아에 대한 강압의 포괄적인 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전략적 수준에서의 강압은 테러리스트와 그의 지원자를 고립시키기 위해 우방과의 협력을 통한 포괄적인 정치, 경제적 제재조치를 취했다.

 

1986년1월 레이건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리비아로부터 수입이나 리비아로 수출 금지, 미국-리비아 간 해상이나 항공관계 금지, 리비아 내 사업에 관계되는 용역거래 금지, 신용대부 금지, 여행 금지, 리비아 자산 동결 등을 시도하였다.

 

한편 1986년3월14일 의회연설에서 강력한 군사, 안보지원과 경제지원을 택한다고 연설했다.

 

이러한 목적은 1970년 대 베트남, 캄보디아 사태, 이디오피아, 남예멘 사태, 엘살바도르에서 공산 리카라과 반군지원,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 소련이 팽창정책을 더욱 가속시킨 점과 지역안보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우방과 협력이 더욱 요청된 점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986년3월23일 통상적인 미국의 항법자유훈련을 카다피가 일방적으로 선언한「죽음의 선」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미 항공기에 공격을 가했다.

 

동년 4월5일에는 서베르린에서 테러분자들은 미군이 자주 출입하는 디스코텍에 폭탄을 폭발시켰다.

 

이러한 것은 리비아 대사관에서 트리폴리로 사건의 성공을 보고하는 무전을 미국이 도청함으로써 리비아가 도발한 명백한 증거를 잡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보복으로 미국의 확고한 강압의 신뢰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리비아 폭격 작전계획을 작성한 실무요원들은 위기사전계획 그룹이라는 소수집단이며 이 멤버는 합참본부의 존 펠러링 중장, 국무성의 마이클 아마코스트 차관, 국방성의 리처드 아미타지 차관보이며 이 그룹이 작성한 계획서는 국가안보회의(NSC)의 테러담당 책임자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이끄는 소위원회에 넘겨졌다.

 

이 소위원회의 멤버는 극동 전문가인 하워드 라이커, 정치군사 전문가인 제임스 스타크 대령과 노스 중령이었다.

 

이들에 의한 계획은 백악관 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리비아 공격작전 계획(Eldorade Canyon)은 1986년4월9일 합참의장인 크로우(William J. Crowe)제독의 브리핑이 있던 날 확정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는 국가안보회의(NSC) 및 백악관 수석 보좌관들로서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방장관, 베이커 재무장관, 테프트 국방차관, 포티어 대통령 안보담당 부보좌관, 케이시 CIA국장, 미즈 법무장관이 참석했다.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인 포인 텍스터로부터 접수한 세부사항을 보고했다.

 

참모총장은 이번 작전은 해․공군 합동작전으로서 지중해 전력에 제 3의 항모를 추가하고 영국에 있는 제3공군에 F-111 전폭기들을 사용하며 전략공군 급유기들을 증원시킬 것을 건의했다.

 

1986년4월10일 공군 참모총장 가브리엘 대장은 영국의 밀덴홀 공군기지에 도착하여 F-111기들의 출격준비를 점검한 후 기습효과를 최대로 업기 위해 야간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지휘체계는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 해군 ․ 공군 참모총장, 제 6 함대와 제 3군으로 연결되었으며 전체적인 작전 지휘권은 해군중장 캘소 (Kelso)에게 부여되었다.

 

캘소 해군중장에게는 항모 항공지휘관으로서 현장지휘를 위해 E-2C기가 주어졌으며 모든 보고는 그에게 보고하도록 지휘체계를 단일화시켰다.

 

공군은 가용한 작전수단인 전략공군의 B-52 폭격기와 급유기 전폭기, 전술공군의 전투기들로서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민간인 피해를 최소로 줄이고 프랑스 스페인 영공을 우회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여 장거리 항공작전과 B-52의 재래폭격보다는 정밀폭격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이 계획은 급유기를 포함한 영국기지의 F-111기들과 전자전 및 공중감시기들을 포함시키게 되었고 폭탄 미사일 로켓 등 전체무장은 350톤이 소요될 것으로 보았다.

 

해군은 대리비아 작전을 위해 제6함대의 항모 코랄 씨, 사라토가 외에 아메리카호를 추가로 증강시킬 것을 계획했다.

 

E-2C 조기경보통제기가 시드라만을 주야로 계속 감시하여 리비아 항공기들이 야간에 부분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행동이 불가능하도록 계획하였다.

 

작전 1주일 전부터 F-14 20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SR-71기는 계획된 목표물에 대한 정찰을 실시했다.

 

<공격방법(고고도-저고도-고고도) 및 공격 시간표> 1986년4월14일 아침. 지중해의 항모 코랄 씨(Coral Sea)는 시실리의 북쪽을 항해하고 있었고, 아메리카호는 지중해 한가운데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 6함대는 F-111기들과 함께 목표를 타격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코랄 씨호는 뱅가지 지역을 공격하고 아메리카호는 트리폴리 지역의 목표들을 강타하는 F-111기들을 엄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코랄 씨호는 그를 따르는 소련 구축함을 따돌리고 4월14일 해지기 전에 Messina해협을 통해 고속으로 남진하였다.

 

1986년4월14일. 17:13(리비아 시간)에 10 KC-10, 9 KC-135기들이 밀덴홀 기지에서 5KC-10, 4 KC-135는 페어포드(Fairford)기지에서 총 28대의 급유기가 이륙했다.

 

17:36 24대의 F-111기들이 영국의 레이큰 히드기지를 이륙했으며 동시에 EF-111A ECM기 5대가 영국의 헤이포드(Heyford)기지를 이륙했다.

 

이중 6대의 F-111과 1대의 EF-111은 예비기로 첫 급유 후 귀환하고 5대의 F-111과(2대는 계통결함, 3대는 이유불명) 1대의 EF-111은 (엔진고장)임무를 포기해 13대의 F-111기와 3대의 EF-111기가 참가했다.

 

21:20에 코랄씨(Coral Sea)호는 8대의 A-6E, 6대의 F/A-18A를, 아메리카(America)호는 6대의 A-7E와 F-14기들을 발진시켰다. 21:45~22:15 사이에는 아메리카호로부터 6대의 A-6E기, 코랄 씨호로 부터는 8대의 A-6E기가 발진했는데 이들 중 2대가 항법장비 고장으로 회항했다.

 

항법단계는 6개 편대 2파로 나누어 무선을 사용하지 않고 항법을 하였으며 레이더 회피가 필요한 몇개 구간만 항법장치(INSTRUME- NT NAVICATIONAL SYSTEM)에 의한 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공격 진입시 4회, 귀환시 2회의 공중급유를 받았다.

 

저고도 침투단계는 리비아 레이다 포착범위 밖에서 저고도로 강하후 침투하면서 목표 30NM전에 정밀 유도 장비인 Pave Tack(AN/AVQ-26)을 작동하고 IP(초기 진입점)에서 항법 오차를 시계 참조물 기준으로 수정하여 정확하게 목표지점으로 진입했다.

 

목표 포착단계 때는 항법장치(INS)가 가르친 목표물을 정밀유도 장비인 시계(Pave Tack Line of Sight)를 통해 실제 목표물을 찾았다.(목표 90초전 400FT, 540KTS) 목표추적 및 무장투하 단계 시는 적외선 영상수상기(IR Imaging scope)의 조준점 중앙에 목표물이 오도록 Tracker Button을 조절한 후 LASER를 발사하고 무기통제사는 계속 목표를 조준점 중앙에 오도록 Tracker를 조절하여 사거리에서 Bomb Button Press 상태로 접근하였다.

 

이탈단계는 폭탄이 떨어지면 회피기동으로 목표를 이탈하면서 폭탄이 Impact 될 때까지 유도장비인 Pave Tack으로 목표물을 계속 추적하였다.

 

E-2C기 1대는 지브랄타 동쪽에서, 1대는 트리폴리 북쪽에서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항모에서 발진한 EA-6B들은 전자전 임무를 수행케 했다.

 

23:54에 3대의 EF-111과 2대의 EA-6B가 적의 통신망과 레이더 전파를 교란했고, A-7과  F/A-18 항공기들이 대공제압으로 슈라이크(Shrike)와 함께 함(Harm)미사일을 발사했다.

 

F-111 폭격기들은 트리폴리지역으로 접근할 때 이탈리아의 Lampedusa섬의 미군기지에서 발사하는 전자표식의 유도를 받아 전열을 갖추어 목표지역에 진입하였다.

 

24:00, 8대의 F-111은 트리폴리의 카다피의 숙소가 있는 알 아지지야(Al Azzizija) 병영과 시디비랄(Sidi Bilal) 해군기지를 공격하고 12대의 A-6기들이 뱅가지에 있는 베니나(Benina)공항과 알주마히리야(Al Jumahiriya)병영을 공격했다.

 

00:06-00:11 사이에 5대의 F-111기들이 트리폴리(Tripoli)공항을 공격하고 폭격중 EF-111기는 적의 통신 주파수와 목표 탐지 레이더(Target Acquisition Radar)을 방해하고, EA-6기들은 서트(Sirte), 뱅가지(Benghazi)미사일 기지를 Jamming했다. 아메리카호로부터 발진한 F-14기들은 공중엄호를 했으나 리비아기들은 이륙하지 않았다.

 

몇 분 후 리비아군의 대공포와 미사일들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00:13에 임무를 완료하였으며 53분에는 함재기들이 귀환 완료하였고 01:14 1대의 F-111기가 실종으로 보고되었고 23:24에 1대의 F-111기가 고장으로 스페인의 로타(Rota)공군기지에 비상착륙을 하였다. 05:10에 F-111기들이 영국으로 귀환 완료하였으며 10:00 탐색구조작전(Search and Rescue)를 취소함으로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미국의 리비아 항공폭격은 작전적으로 성공하였고 또 다른 공격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 확전의 공포를 주었으나 이러한 작전의 성공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는가는 논란이 많다.

 

미국 국내의 정치적인 면에서는 1970년대 무력감에서 탈피한 듯한 국민적 자존심을 주었고 NATO 제국은 무력사용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지중해에서의 대 소련 힘의 균형을 우려하여 1986년4월27일 EU모임과 동년 5월5일 도쿄정상회담에서는 대테러 제재 조치에 리비아를 직접 지칭하는데 합의를 했다.

 

이것은 미국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유럽의 우려사항 때문에 미국을 진정시킬 필요에 의해 합의를 해줬다하더라도 유럽의 대리비아 제재를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 결과가 되어 작전의 효과는 NATO국들에 대한 미국의 지도력(Leadership)에 다소나마 기여한 것으로 본다.